2014.10.26 주일.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김남준 목사님


시편 107:19~20


I. 본문해설


고통에서 건지신 하니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또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자를 '외국인', '나그네'라고 하였는데

돌아갈 곳, 바라볼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욥처럼 애매한 고난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행복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거룩입니다.

거룩함의 펼침이 행복이고 행복의 접음은 거룩함입니다.



II. 신자들이 고통받을 때


A. 신자들이 받는 고통

고통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이고, 그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아서 잔잔한 바다일 때도 있지만, 

풍랑치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나의 순결함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없었다."

나의 불완전함과 순수하지 못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고통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져주셨습니다.



B. 신자들의 부르짖음

계시와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계시 - 공표된 하나님의 의지

섭리 - 감춰진 하나님의 의지(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고통은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기도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음'(쟈하크) - 구원을 바라는 간절할 외침.



III. 말씀으로 구원하심


A. 말씀을 보내심

우리는 고통이 빨리 끝나길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길 바라십니다.


고통을 당할 때, 기도보다 먼저 할 일은 말씀을 찾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열렬히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열렬함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기도보다 보내시는 말씀을 맞이하고 

말씀에 비추어 깨달아야 합니다.


B. 고통에서 건지심

"위험한 지경"은 원문에 의하면 "고통들"입니다.


내 안의 망가진 부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손 대실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교회의 일부분으로 있는 것이 교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지만 죄 때문에 복수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신자의 성숙함은 고통 당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생각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내가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가까이 계셔서 붙드시고,

말씀하시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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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장혜영 옮김, 새물결 플러스)

'신정론'에 대한 책을 읽는 중이라서 더 관심있게 듣게 된 주일 말씀.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고, 나의 의로움이나 '큰 잘못없음'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지를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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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 주일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1)  나의 믿음 순금같이 되어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I. 본문해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본문은 엘리바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욥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II. 연단하시는 하나님


A. 나의 인생길이 있음


원문에는 '나의 길'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한 (인생)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마다 있는 개별적인 인생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질문'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잘 하고 있는가?"

"사회는 무엇인가? 사회는 잘 하고 있는가?"

나와 관계맺은 것들에 대한 질문은 곧 '나'의 행복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과 지식들을 어디서 얻으십니까?

세상의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그런 지식을 얻어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대치되거나 대신 살아질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 가치가 있기에 '나'는 존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연적인 껍질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한 가슴떨림이 있습니까?

이 떨림이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물어보게 됩니다.


B. 나를 아시는 하나님("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야다' 시제(과거,현재,미래)는 없고 시상(완료, 진행)만 있는데, 이것은 '완료'의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식에서 '내'가 배제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아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앎, 부모처럼 돕고 사랑하시기 위한 앎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C. 단련받을 때가 있다.


"단련"은 "제련"의 의미입니다. 

금에서 불순물을 분리해내는 반복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연단을 반복하고, 이때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이 분리되고 

인식하게 되고 회개하고 자기부인을 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인 마음에서 불순물이 분리되고 순전한 마음이 되게 하십니다. 


D. 나를 순금같게 하심


순금(지하브)은 '정제된 금'을 말합니다. 

이것은 '태도'만이 아니라 '본성' 자체에 도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연단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살 인생인 우리들이

순금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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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지금과 같은 천일염이 아니라 당시의 "암염"은 그 안의 소금 성분이 공기나 습기와 접촉하여 녹아나오고 나면 불순물만 남게되고 그렇게 되면 짠 맛은 없어지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기때문에 버려질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고나면 소금의 역할을 할수 없고 다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버림받는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가치"에 대한 것입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어 흐린 맛, 변질된 맛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소금이라고 부르신 그 "가치"를 잃어버린 다는 뜻입니다.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지만 그것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배반의 인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중생과 회심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라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그 맛을 잃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다시 그 맛을 회복시켜 소금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세상을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팔복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들중에 어떤 사람들은 연약하거나 혹은 죄때문에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팔복의 사람에서 멀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자신들을 가치있게 만드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서 팔복의 사람으로 회복되고 소금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것을 유지하기위해 기도하고 애쓰며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치있게 하셨는지도 잊지말고 소금으로 부르신 삶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평생 처음 경험해본 사경회.

 5일간 저녁시간을 드린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오히려 더 깨닫고 받은게 많아서 내가 드렸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시간과 경험과 말씀들.

"인격적인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예배 드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예수님 발앞에 앉아서 말씀듣기를 다른 모든 일들보다 귀하게 여겼던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 알게되고, 말씀은 비록 초등학생일 지라도 깊은 영혼까지 이르러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인식할 만큼의 변화를 충분히 일으키신다는 것까지 깨닫게 하신다.

 

예배에 나아가고 말씀을 대하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나 중심" 이었는지. . .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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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마 5:13

소금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사람들은 4장에서 병고침받은 자들처럼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갈 맛을 느끼지못하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받고 위로받음으로 세상 살아갈 맛을 회복한 자들 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였고 그런 삶이 "그 소금"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살 맛 안나는 세상에 그 맛을 내게하는삶, 맛을 느끼게 해주는 삶...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주님으로인해 맛을 느끼게되고 이제 주님은 그들이 맛보았던 것처럼 세상의 맛을 느끼지못하는 사람들로하여금 "맛"을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소금이십니다.

진리의 빛보다 먼저 소금의 삶으로 세상 사람들이 맛을 알게하고, 그 이유와 소망을 묻는자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 오직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어린이들도 다른 장소에서 똑같이 사경회. 불을 바라는게 아니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 한 시간 넘는 말씀을 듣고나서도 기도하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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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 18-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1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될 것을 예언.

A 기대할 수 없는 포로 생활
- 실패 자체보다 무서운 것은 체념입니다
(실패에 익숙한 삶에서 무슨 희망이 솟겠습니까)
*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넘어질 수 있으나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님으로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B 포로의 귀환을 보게함
- 단지 포로에서의 귀환의 문제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죄로 하나님과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가신것입니다.
- 새 일을 행하실 약속을 믿고 희망을 품어야합니다!

C 광야의 길, 사막에 강을..
- 지난 해 고난과 한파를 격어왔으나 은혜로 헤쳐오지 않았습니까
- 황무한 땅이라 할 지라도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물을 내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시오!(주의 사랑의 강물이 메마른 마음에 충만히 흐르기를...)

2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말라.
- 이전의 일들은 버리고 믿음을 따라 도전하십시오! 
-* 말씀 하나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얼마나 쉬울까요?!
- 새해에는 주님을 의지하여 믿음을 굳건히 하되 어떤 상황이 올 지라도 믿음을 새롭게하십시오!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얼렬히 기도하며,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 많을 줄 알고 30분 일찍 도착.
그래도 많은 사람들.. 
중등부가 된 지윤이와 같이 말씀을 기쁨.
익히 알고 많이 노래로도 불렀던 본문이지만 "새 일"을 이렇게 말씀하셔서 이해한 것은 처음..
헌금에 소원을 쓰지도 않고 
말씀뽑기도 없지만 
말씀가운데 마음을 찢는게 어떤 것인지,
목사님과 성도들을 보며 깨닫게 하심..

마치고, 
여전히 새신자 모임 광고에..@@..
이 예배에 처음 온 사람도 많았지만, 
주일예배와 똑같이 새신자들을 위해 늦은 새벽시간에도 새신자 모임을 연, 참으로 빡센 우리교회.

지우는 따로 주일학교만 송구영신예배드리고 나오며 뭔진 몰라도 눈물이 쪼금 났다고 은혜 받았다고..ㅎㅎ

두 주후, 신년 사경회가 5일간.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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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7.  주일 팔복의 사람(22.마지막회)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I. 본문해설


천국에 속한 팔복의 사람들은 세상이 박해하고,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II. 신자의 삶 : 기쁨과 즐거움(명령형)


A. 기쁨과 즐거움


세상이 알 수 없는 원천에 기쁨의 근거를 갖는 것, 그럴 때 세상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급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진 후에는 그만큼 외로워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면 잃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후유증없이  사랑할 분도 하나님 뿐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이 아픔을 주지 않기때문입니다. (어거스틴)


무한하신 하나님이 날마다 그 지식과 사랑을 가르쳐주시고, 그것이 날마다 증진되는 것입니다.



III.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A. 견해들


공로로 구원을 이루려는 로마 카톨릭에서 온 것으로 실제로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선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생각을 천국에 투사시켜서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곳에서 상급이 있음을 말합니다.

눅 6:23, 빌(부름의 상급을 위해서 달려가노라), 고전 15:41


어쩌면 천국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의 차이 일지도 모릅니다.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알게 되어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으며, 더 적게 받았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그런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목사님의 견해)


B. 상급받은 팔복의 사람들


나를 사랑한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게 하시고, 나에게 하늘의 성품,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셨습니다.


박해 받을 때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데서 온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하늘의 백성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버리고 싶어할때도 주님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거기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여 팔복의 사람으로 살며 그 외에 행복을 찾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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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  주일 팔복 시리즈 21.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


마태복음 5장 12절



I. 본문해설.


팔복의 사람이 받는 고난은 나쁜 일을 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다른 이질적 존재이기에 받는 "존재적인 박해"입니다.



II. 선지자들과 비교하심.


이 말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받을 상급과 그것을 기쁘게 여기며 헌신 할것을 말씀하십니다.


A. 신정국가와 선지자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기 위해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3직)

왕으로 다스리며,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전통편의 제사장으로,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계시편의 선지자로,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B. 고난받는 선지자들


좋은 의미의 선지자들의 특징 세 가지는,

하나님의 소명,

확실한 계시의 말씀이 주어짐,

충만한 성령의 권능이 함께 주어짐입니다.


이사야 5:7에서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으로 비유하시면서 정의와 공평, 의, 사랑을 소작료, 열매로 요구하셨습니다. 


C.이스라엘 : 제사장 나라 됨


출애굽기 19:6은 신학적 기초로, 창세기 1:1절은 역사적 기초로, 이 두 기초위에 요한복음 3:16절이 설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나라는 자기구별과 정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핵심 가치는,

거룩함,

헌신(벧전 2:5), 

중재(롬 15:16) 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커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누룩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지자가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것을 듣고 마음을 찢는 것,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에 돌이키는 것이 선지자에 대한 영광이고 존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싫은 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구약에서 이렇게 죽은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여러분의 입맛을 맛추는 "요리사"가 되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의사"로서 필요하면 여러분의 배를 가르기도하고 머리 뚜껑을 열어서 종양을 꺼내기도 하고 주사를 놓기도 하고 약을 처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지자의 "외침"이엇습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할 뿐아니라,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존재론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III.하나님의 나라와 삼직의 통합


A. 기독론적 통합

그리스도께서 이 3직을 통합하여 지금도 그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B.구원론적으로 제사장은 "소금"으로 부르심, 선지자는 "빛"으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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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주일 팔복시리즈 20.고난받는 팔복의 사람(2)


마태복음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라는 것은 신자가 이 세상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닮음의 사람됨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를 많이 닮은 팔복의 사람이 될수록 박해를 받게 됩니다.


"욕하고",

"박해하고",

- 힘으로 팔복의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박해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 사실, 진실, 진리가 아닌 옳지 않은 방식, 사실이 아닌 것들로 구실 삼아서 팔복의 사람을 박해하는 것

입니다.


"모든 악한 말"

- 말뿐아니라 행동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행이 일어나길 바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이런 모든 박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여 하는 박해인 것입니다.

예수가 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싫었던 것입니다.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영토가 넓어지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며, 모든 물질과 부를 누리며 사는 강대국이 되는 것인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복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전한 팔복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예수님의 가난한 심령을 보고 잘못됨을 깨닫고,

완악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온유하신 예수님을 보고 잘못을 깨닫고,

포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조차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으며,

방탕한 욕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한 예수님을 보고 정죄를 받음을 깨닫고,

불의한 사람들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를 보며 자신의 잘못을 절실하게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미워하며 시기하며 분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보며 깨닫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민주정치제도가 있었습니다. 

매년 한번씩 사람들이 모여서 조개껍질이나 도자기 조각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인물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내고, 6000표 이상이 나오면 그 사람을 10년간 도시에서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당시 아리스티데스라는 훌륭한 정치가이며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라고 불리웠습니다. 어느날 도편추방의 투표를 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적었고, 글자를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인줄 모르고 그 이름 적는 방법을 묻자, 아리스티데스는 그에게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몰라요, 나는 그사람이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인간이 도처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수없이 얘기하는 그 소리를 듣는게 지긋지긋해서 쫓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함이라.


시시때때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변절하는 사람에게는 박해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런 무가치한 사람을 박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참되고 맛스럽고 달콤한 것이지만, 그것을 느끼고 아는 사람에게만 그런 것입니다.

선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그 선을 아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너절하고 부도덕하게 살다가 세상 법정에서 정죄받고 투옥되는 사람을 박해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한 벌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나쁜일을 했습니까?

제자들이 무슨 나쁜일을 그렇게 많이 했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본을 정확히 따랐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들은 미워하고 지독하게 박해했습니다.

무엇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세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은 불결했고 그들은 거룩했기 때문이며,

세상은 세상을 사랑했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라는 책에서 기술된 것을 보면,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고집하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황소들을 들이받게 해서 배에 구멍을 내었고, 여섯마리의 말들에 사지, 오지를 묶어서 능지처참을 시키기도 하였고, 굶주린 야수들에게 먹이로 내어주기도 하였으며, 뜨거운 불덩어리로 성기를 지지기도 하였고, 불에 녹인 납을 몸에 붓기도 하였고, 아랫도리를 화형시키며 머리에는 찬물을 부어 자신의 신체가 타는 것을 끝까지 보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핍박속에서 죽어간 그들은 이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을 당하며 거룩하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받는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또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이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면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는 복이 있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니면 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빛, 우리가 아니면 맛을 내게 할 수없는 그리스도의 그 소금이 되도록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맘으로 기도하고 이 진리를 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 회개한 세상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와 함께 빛의 사람, 소금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언제나 일어나지는 못할 지라도, 박해가 더 많이 있을 지라도 그때마다 우리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건 복수의 칼을 가는 옹졸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의로운 통치를 이 세상에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연합의 신비가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며 사는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짓밟혀 본 사람만이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아는 인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는 반드시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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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0. 팔복의 사람    고난받는 팔복의 사람(1)


I. 본문해설


10절까지는 팔복에 관한 것이고, 11절부터 12절은 언뜻보기에는 박해받는 사람에 관련된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팔복의 사람의 존재로 인한 박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


A. 세상에서 의를 추구함.


   신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바깥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B.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함.


   팔복의 사람은 행위의 사람, 소유의 사람이 아닙니다. 인격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원형입니다. 예수를 닮은 사람이며,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늘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 통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팔복의 사람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III.  

팔복의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면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그런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교회가 세상의 평판에 전전긍긍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전긍긍해 본적이 있습니까?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예수믿고 우리들이 5년, 10년 수십년을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 하며 살았습니까? 그리고 과연 그 신념 때문에 우리는 박해를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마음 속에 솟구치는 분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짓밟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린하는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한편으로 분노하고, 한편으로는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이 내가 보텐 악때문이라고 통절하게 가슴을 찢어본 일이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넓어도 세상에 소망을 갖질 않으시고 교회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서 말, 여섯 말, 아홉 말의 가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누룩 한 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삶을 덤으로서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실현되기를 위하여 매일 매일 죽을 결심으로 매순간을 살아가라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의 현실 속에 두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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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 주일 팔복시리즈 18. 박해를 받는 자의 복(2)


마태복음 5장


I. 본문해설


심령이 가난함이 현재 천국을 누리는 것의 시작이라면 박해를 받는 자는 현재 천국뿐아니라 미래 천국을 누릴것에 대한 보장입니다.


"복이 있나니(마까리오스)"는 이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II. 박해를 받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


천국의 두 국면.

1.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다시 회복되고 존귀하게 되기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영적으로,박해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위로와 용기, 사랑과 평화를 베풀어 주십니다. 


2.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

영적인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계속 될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가 천상적이고 미래의 나라인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나라가 매우 가까왔습니다. 이 영원한 나라가 올 때,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역사성과 초월성. 이 두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3.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신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때까지 신자는 "나그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두움은 빛보다 크고 많습니다.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기때문에 신자는 그때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나그네"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현세적인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심성으로 관심가지시고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이 세상의 풍요와 번성은 무한한 하나님 나라의 풍요에 대한 맛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 이것이 있습니다. 

진리때문에 박해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그 진리때문에 누리는 평화와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 서울 변두리의 100여명 모이는, 부교역자 없는 가난한 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어, 주일학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되어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하는데 교사는 모자라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7명의 교사와 간절히 기도하며 성경학교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꼬박 금식하면서 매일 철야를 했습니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배시설은 나무의자가 있는 한칸이 교회 시설의 전부였습니다.

성경학교가 시작되자 기적이 일어났는데, 보통 100여명 모이던 아이들이 첫날 340명의 아이들이 모였고, 도저히 예배당 의자에 앉힐 수 없어서 의자를 모두 들어내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문앞에까지 앉아서 성경학교를 진행했습니다. 신학도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많은 아이들이 회심을 경험했고, 3박4일 일정의 마지막날 밤은 교회에서 철야를 하기로 해서 아이들은 각자 벼개와 이불들을 들고 모였습니다. 밤에 집회를 하던 중, 갑자기 어떤 남자가 뛰어들어와서 동네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고 이게 무슨 짓들이냐며 조용하지 않으면 예배당에 불을 지르겠다며 독한 말들을 내뱉고 갔고 모두 두려움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박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고,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예수믿고 사는 대는 핍박과 어려움이 많단다.. 라고 조용히 얘기했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입으로 손을 막고 흐느끼며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성령께서 뚜렸하게 그 자리에 임재하셨고, 모두 인내하여 핍박을 이기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지혜로 예배당 밑의 열평가량의 지하실이 생각났고, 아이들을 20명, 30명씩 나누어서 들여보내어 기도를 시켰고, 제가 기억하는, 어른과 아이를을 포함한 집회에서 그토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치하에 있을 때,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가 감옥에 투옥되었고, 20년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후 소감을 묻자, "감옥에 있을 때는 하늘나라였는데,석방이 되고 나니 지상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모진 고문과 핍박을 이겼느냐고 묻자,

"고문이 괴롭고 독방에서 외로울 때마다 지하교회 성도들과 나눈 성찬을 기억하며 그 고난을 이길 수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동유럽의 한 목회자는 그를 회유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의 권모술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들의 회유에 신앙을 져버린다면 박해받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토해놓았던 수많은 설교와 글들이 빛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저항한다면 당신들은 나를 죽이고 나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내 피는 내 설교 속에 스며들 것이고, 내 피는 내가 쓴 수많은 글 한줄 한줄에 베어들어, 모두 일어나서 그 진리가 소리칠 것이고 결국 그 진리가 당신들을 이길 것입니다."


고난, 박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신앙의 단어입니까?

"복음들고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라는 노래는 이미 우리의 예배속에서 폐기된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졌기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핍박을 모를 정도로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버겁도록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 번민, 상처라고 하는 것, 자기만이 아는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팔복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사치스러운 종교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쓸모없는, 가치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본질에 죽고 살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과 괴로움들이 여러분의 온 신앙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날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독수리와 같은 여러분들의 영혼이 이땅에서 다리가 퉁퉁 굵어지도록 모이나 쪼아먹도록 길들여져 날 수 없는 기름진 철새처럼 되어버지 않았는지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대신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들의 그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또 자신들이 박해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전해지고, 또 붙들고 있는 그 복음이 그야말로 그것과 함께 죽고 살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에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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