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3. 주일 팔복시리즈 18. 박해를 받는 자의 복(2)


마태복음 5장


I. 본문해설


심령이 가난함이 현재 천국을 누리는 것의 시작이라면 박해를 받는 자는 현재 천국뿐아니라 미래 천국을 누릴것에 대한 보장입니다.


"복이 있나니(마까리오스)"는 이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II. 박해를 받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


천국의 두 국면.

1.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다시 회복되고 존귀하게 되기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영적으로,박해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위로와 용기, 사랑과 평화를 베풀어 주십니다. 


2.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

영적인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계속 될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가 천상적이고 미래의 나라인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나라가 매우 가까왔습니다. 이 영원한 나라가 올 때,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역사성과 초월성. 이 두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3.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신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때까지 신자는 "나그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두움은 빛보다 크고 많습니다.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기때문에 신자는 그때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나그네"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현세적인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심성으로 관심가지시고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이 세상의 풍요와 번성은 무한한 하나님 나라의 풍요에 대한 맛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 이것이 있습니다. 

진리때문에 박해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그 진리때문에 누리는 평화와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 서울 변두리의 100여명 모이는, 부교역자 없는 가난한 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어, 주일학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되어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하는데 교사는 모자라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7명의 교사와 간절히 기도하며 성경학교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꼬박 금식하면서 매일 철야를 했습니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배시설은 나무의자가 있는 한칸이 교회 시설의 전부였습니다.

성경학교가 시작되자 기적이 일어났는데, 보통 100여명 모이던 아이들이 첫날 340명의 아이들이 모였고, 도저히 예배당 의자에 앉힐 수 없어서 의자를 모두 들어내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문앞에까지 앉아서 성경학교를 진행했습니다. 신학도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많은 아이들이 회심을 경험했고, 3박4일 일정의 마지막날 밤은 교회에서 철야를 하기로 해서 아이들은 각자 벼개와 이불들을 들고 모였습니다. 밤에 집회를 하던 중, 갑자기 어떤 남자가 뛰어들어와서 동네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고 이게 무슨 짓들이냐며 조용하지 않으면 예배당에 불을 지르겠다며 독한 말들을 내뱉고 갔고 모두 두려움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박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고,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예수믿고 사는 대는 핍박과 어려움이 많단다.. 라고 조용히 얘기했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입으로 손을 막고 흐느끼며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성령께서 뚜렸하게 그 자리에 임재하셨고, 모두 인내하여 핍박을 이기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지혜로 예배당 밑의 열평가량의 지하실이 생각났고, 아이들을 20명, 30명씩 나누어서 들여보내어 기도를 시켰고, 제가 기억하는, 어른과 아이를을 포함한 집회에서 그토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치하에 있을 때,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가 감옥에 투옥되었고, 20년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후 소감을 묻자, "감옥에 있을 때는 하늘나라였는데,석방이 되고 나니 지상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모진 고문과 핍박을 이겼느냐고 묻자,

"고문이 괴롭고 독방에서 외로울 때마다 지하교회 성도들과 나눈 성찬을 기억하며 그 고난을 이길 수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동유럽의 한 목회자는 그를 회유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의 권모술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들의 회유에 신앙을 져버린다면 박해받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토해놓았던 수많은 설교와 글들이 빛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저항한다면 당신들은 나를 죽이고 나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내 피는 내 설교 속에 스며들 것이고, 내 피는 내가 쓴 수많은 글 한줄 한줄에 베어들어, 모두 일어나서 그 진리가 소리칠 것이고 결국 그 진리가 당신들을 이길 것입니다."


고난, 박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신앙의 단어입니까?

"복음들고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라는 노래는 이미 우리의 예배속에서 폐기된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졌기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핍박을 모를 정도로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버겁도록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 번민, 상처라고 하는 것, 자기만이 아는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팔복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사치스러운 종교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쓸모없는, 가치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본질에 죽고 살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과 괴로움들이 여러분의 온 신앙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날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독수리와 같은 여러분들의 영혼이 이땅에서 다리가 퉁퉁 굵어지도록 모이나 쪼아먹도록 길들여져 날 수 없는 기름진 철새처럼 되어버지 않았는지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대신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들의 그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또 자신들이 박해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전해지고, 또 붙들고 있는 그 복음이 그야말로 그것과 함께 죽고 살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에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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