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1. 총신대 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십자가와 신학함. 김남준 목사님


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신학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신학의 중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무엇인가?'가 아닌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

고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혼란 두가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는 것이었고, 이

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할 자라면 저주받을리가 없을텐데, 예수

님은 부활하셨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저주받은 죽음이 당신의 죄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때문

임을 깨닫고 이 혼란에서 큰 빛을 보고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모든 신학적 시

야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이 놀라운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과 세계와 인류에 대한 시양,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에서의 변화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체험에서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목회는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같은 진리가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에서 시작

되는 것이고, 교회의 불행은 이렇게 외칠 것이 없는 사람이 매주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를 시킨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공부에 헌신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가하면, 

7년정도, 건강한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해야합니다.

교회의 재앙은 가르칠 내용이 없는 목사가 매주일 예배당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의 기록은 22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에세이를 쓴 것입니다. 책상에 물과 빵을 놓고 

말입니다.

또 한번은 17시간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여러번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공부하다가 죽으면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비하다가 죽는게 내 분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다가 죽고자 했습니다.


목숨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무지한, 무책임한 설교가 강단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설교단은 힐링캠프같은 것이 아닙니다.

설교단은 일생에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선포하다가 죽는 곳입니다.


공부하지않는 친구들과는 사귀지 말고 배울만한 친구들과 교제하십시오.

한 학기에 자기 키만큼의 책을 읽어내십시오.


공부는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다 할수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지성의 깊이와 관련이 적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실

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려고 하는 진지한 고민과 몸부림이 필요한 것

입니다. 마음을 주님께 쏟으며 주님을 알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훌륭한 청중이었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통성기도 인도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적이 없는 당회자. 

이런 것들은 직업적으로 해야하니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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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3. 고려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김남준 목사님


레 2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

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성막과 관련된 등잔불 규례입니다.

성막은 열두어평쯤 되고,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고, 물돼지 가죽으로 덮

여있어서 일체의 외부의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본문은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문이 없어서 자연채광이 불가능하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오직 등잔의 

불빛으로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교회에서 울려퍼져야 할 것은 오직 계시의 빛인 진리의 말

씀이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어야하고,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는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

다. 슐라이 마허 이전까지만해도 개신교의 전통은 신학은 목회자만 하는 학문

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신학을 공부의 의무가 있었고 목회자는 더 

깊은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마그넬리아데이, 그 책을 화란 사람들은 농부들이 밭갈러 갈

때 수레에 싣고 가서 새참시간에 읽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슐라이 마허 

이후에 신학교육이 전문화되면서 일반학문의 계몽주의 학습방법을 따라서 목회

자만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의 학문,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모였을때 설교를 듣거나 교훈을 받으면서 자기의 상식을 깨

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죽기까지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성막안의 등잔불인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것과 제도권안에서 안수를 받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터득하고 살아내고, 그 살아내는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사상, 의지는 윤리. 이 두가지는 삼위일체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 두가지가 결합되어 힘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려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신

앙의 차원입니다. 최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부활의 영광, 재림의 

소망으로 가슴이 벅차 본 적이 언제입니까?

둘째는 그 이후에 진리에 대한 골격이 서게 됩니다.


첫째,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하고 어린아이처럼 성경을 읽어야합

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합니다.


20년간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이번주는 무슨 설교를 하지? 라고 한적은 한번

도 없었고, 오히려 이걸 또 설교해야하는데 왜 일주일 후에 모일까? 했습니다.

19년동안 5215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원어 공부를 하십시오. 

원어 공부를 안하는 것은 육군이 되서 바지에 흙묻히지 않겠다는 것이고 해군

이 되서 바지에 물 안묻히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학 공부를 하십시오.

성경만 읽은 학생은 성경은 안읽은 학생과 비슷하게 위험합니다.


신학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기억하고 공부하십시오.


설교는 "불붙은 논리"(로이드 존스 목사님)입니다.

누가 들어도 좋은 소리를 하는게 설교가 아닙니다.


외국에 나가서 숙소에 가면 티비에 조엘 오스틴이 나옵니다. 

리모콘을 끌 수가 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분명히 '개소리'라는 것이 분명한데, 원고없고, 유창하고, 외모 잘생겼고, 목

소리 좋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웃겼다 울렸다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가 그

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그사람과 나는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을 것입

니다. 이것을 분별도 못하고 은혜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금의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 마메섹의 요한, 

존 오웬은 십대때에 신학을 공부하다가 헤친 건강을 평생 십자가처럼 지고 살

다가 죽었습니다.


존 칼빈이 22세에 파리 꼴레쥬 있을때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뽑힌 것은 어마어

마한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라틴과 그릭의 교부들의 문헌을 거의 암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앞두고 스위스 로잔에서 카톨릭과 공개 토

론이 있을때 칼빈은 완벽하게 암기된 상태에서 카톨릭이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가지고 카톨릭의 견해를 반박해서 거기 모인 수십명의 수도사들이 칼빈의 강연

을 들으며 개신교로 넘어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전체가 카톨

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돌아왔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도하기 싫은 것, 하나님 사랑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입니다.



'감람을 찧어낸 기름'은

성령(기름)이 목회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진리의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월터 발로우라는 사람은 선교사이자 신학자인 엔드류 머레이를 만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갔을때, 그분은 무릎위에 손을 얹고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가 우리를 위해 형제들이여 기도합시다 할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고, 그 분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27세 때,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러 올라올때 성도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방금 만나고 온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광채가 난다면 정말 그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분이고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일까하며 말입니다.


죠지 길레스피라고 하는 청교도는 어느날 신앙 고백을 작성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스코틀랜드에 모였을때, 길레스피 목사의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기도 서두에 고백하면서 기도를 시작했고 기도가 마치자 어떤 사람이 긴급동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오늘 이 길레스피 목사님의 기도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목사님의 기도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눈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찧어낸" 기름은 프레스로 눌러 짠 기름이 아니라 불순물이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얻은 순수한 기름입니다.

이 기름의 불은 그을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름이 성령의 역사라면 찧어진 열매는 자기깨어짐을 말합니다.

"자기 의", "자기 사랑"에 대한 깨어짐을 말합니다.


테르툴리아니우스는 "나는 회개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지금 교회의 추문들은 목회자가 한 가지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눈물있는 회개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뭔가 모자라는게 아니라 나쁜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에 몇번씩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던 사람이 6일동안 살다가 올라가서 온 마음을 다해서 증언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는 설교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라

성령의 사람이 되라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이 되라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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