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19  주일. 시편23편 강해 (8)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시편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I. 본문해설

 

시인은 많은 은혜를 입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노래합니다.

 

 

II.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A. “따르리니”

이것은 ‘추격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범죄자를 추격하거나 전투기를 쫓아가서 맞추고야마는 미사일같은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추격’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B.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때문에 피조물에게 선하게 대하시는 호의를 말합니다.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하신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며 무신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선하고 아름다와야 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월호 1주기.

작년 세월호 사태 후, 아모스서를 설교. ‘거지같은 나라’라는 표현.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롬 13:1” , 이 말씀만 기억하십니까? 그 다음을 보십시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 13:3”

이런 나라에 권세에 대해서 그렇게 복종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에 대한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런 권세에는 쉽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도 되지 않는 국가의 권세에는 왜 그렇게 쉽게 굴복할 마음을 갖습니까?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할 때 93%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어떤 국가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고, 지금도 그것이 남은 것은 일본입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은 비록 그들이 죄가 있었을 지라도 그들의 죄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목사이지만 그들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그렇게 죽는다면 남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정의로운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은, 비록 그것이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국가는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피 끓는 분노를 일으켜야하는 것입니다. 

설령 잡혀가더라도 말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교회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국가를 감시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회초리를 들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용기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C. “인자하심” (헤세드)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개거품을 물며 욕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욕을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자하시게 살아계시다는 반증입니다.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일평생 시인을 추격할 것이다, 그렇게 강하게 따를 것이라는 것을 시인은 깨달은 것입니다. 

 

 

III.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습니다.A. 여호와의 집

완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는 성막이 있을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성전신앙은, 철저한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개인의 어려움, 국가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혹은 개인적인 희노애락과 크고 작은 소원들까지도 이 성전을 찾아 드려졌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신자들에게 무엇이 될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에게 ‘어머니’인 것입니다.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면 교회를 모르고, 믿는다는 게 뭔지, 세계와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지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B. 영원히 거하리로다

신자는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에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람처럼 스치듯 지나가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슬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잘 사십시오. 

바람같이 지나는 인생의 끝에, 여러분들이 얻기위해 그렇게 피땀을 흘리고 몸부림친 모든 것은 죽는 순간 여러분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으셨습니다. 그분들이 좋은 분도 있으셨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두 번째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교회였고, 아버지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거짓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지만 참 교회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도 없고 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닌 것들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참 교회인 어머니를 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언제나 거기 계셔서 선하게 인도하시고, 우리가 행한 악도 선하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미운 물건으로 여기고 떠났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지나간 날들만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날들도 그 지나간 날들처럼 속히 지나갈 날들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나의 목자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 안에 채우며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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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12. 주일. 시편 23편 강해(7)    기름을 부어주심

 

시편 23: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I. 본문해설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이 넘치는 이유가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는 것과,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II. 기름부음의 의미

 

A. 구약의 3직과 기름부음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택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하시고, 이들을 이끌 세 가지 직임을 주셨는데,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입니다. 왕은 법과 통치로, 선지자는 계시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모세의 율법을 해설하며, 제사장은 죄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중보의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올리브기름으로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서 세우시는데 실제로 그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 사명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개인을 선택하시고 기름부어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 사명이 끝나면 성령을 다시 거두어 가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시고 보혜사로서 도우시고 간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B. 신약의 기름부음

성령의 주요 사명은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사람중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고,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성령시대의 축복을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이 다윗의 고통스런 삶을 극복하게 하는 힘은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부음의 효과는 모든 개인적인 소원이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어떻게 더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순전하고 거룩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완전한 행복이고 완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맑은 생수로 해갈을 해본 사람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아무 구정물이나 마시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행복의 샘물을 맛 본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해도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다.” 찰스 스펄젼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행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십니까?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완전한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없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버리고 성결해지고 성령의 충만함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살아가고 싶은 삶을 살아갈 힘이 없는 것이 “영혼의 빈잔”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그 보혈의 샘에 와서 샘을 마시는 자에게 그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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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지 않은, 목사님의 성령체험 이야기.

두 번의 성령체험을 말씀하셨고, 각각 다른 경험을 하셨는데, 중요한 핵심은 그 체험이 어떻게 느껴졌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체험으로 온 효과였다.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고 나서, 개인적인 간절한 소원이나 기도제목은 사라지고 하나님 처럼 순전하게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었다는 것.

성령의 불을 받고, 능력을 받고, 남들이 하지 못한 신기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체험으로, 그렇게 잊지 못할 정도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면 그 다음이 과연 무엇이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전에, 유초등부에서 성경학교 행사 중에서 기름부음에 관련된 행사를 하고, 마지막에 아이들을 안수한 시간이 있었는데, 다 마치고 나서 담당 교역자가 아이들에게 뭔가 느낀 것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를 물어보았다. 몇몇 아이들은 손에 전기가 흐르는 것 처럼 찌릿한 느낌이 있었다고 하고, 어떤 아이들은 뭔가 바람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당시에 나도 이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무척 감사하기도하였고, 놀라기도 하며 좋아했었는데, 정작 그 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든지, 예수님을 더 닮고 싶다든지 하는 아이들이나 교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기억하는 모든 교사들과 아이들은 느껴지는 체험에만 집중하였다.

 

고난이 많은 인생을 지내온 시인 다윗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배경.

원수의 눈 앞에서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려 주신 기억과,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성령에 충만한 체험을 다윗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에게서 성령이 떠나간 것을 보고, 그가 미치광이가 된 것을 보며 후에 자신에게서도 성령을 거두지 말아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은 세상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고, 

신자라고 해서 모두 안다고 할 수 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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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9. 주일. 시편 23편 강해 (6)  원수 앞에 차린 밥상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1. 본문해설

 

오늘 본문에서는 내 잔이 넘치게 해 주셔서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육체는 이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소비하여 생명을 유지합니다.

영혼은 하늘에 속한 자원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소비하여 생명을 유지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는 시인의 마음속의 영혼의 빈잔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혼의 빈잔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그것을 채울지도 모르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많은 유명 스타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쓸쓸하고 외로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마를린 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가장 큰 형벌은 그가 하나님 없이 살게 하시고 허무한 일에 굴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는 “나를 괴롭게하는 사람들(여러사람)의 목전에서”입니다. 

그들이 주는 괴로움이 시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인의 영혼의 빈잔을 수시로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잔이 넘친 이유는, 

첫째, 상을 차려주시고,

둘째, 기름을 부으셨기때문인데, 오늘은 상을 차려주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I. 밥상을 차려주신 하나님

A. 밥상의 의미

밥상은 가족, 형제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추격을 받은 후에 라반은 그를 다시 쫓지 않겠다는 화해의 의미로 식탁을 나눕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 공동체가 되어 ‘만나’를 함께 먹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난 받은 이유는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가족됨을 보여주셨는데, 당신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하면 가족처럼 사랑하고 받아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먼저 가족처럼 사랑해주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죄인들을 사랑으로 먼저 받아주고 감동시켜주신 것입니다. 

성찬 역시 충분히 먹을 것을 나누며 한 가족임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에도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시면서 생명적인 연합, 한 가족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시인은 이 생명적 연합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B. 밥상을 차리심(‘아라크’ 군대의 정렬, 물건을 질서있게 나열함, 식탁의 음식들이 많게, 잘 차려짐을 의미)

이 밥상은 대충 차린 상이 아니라 진수성찬으로 정말 정성껏, 맛있게 가득 차려진 밥상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시인이 그런 밥상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가장 곤고한 인생의 날에, 하나님께서 이  시인의 영혼에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잘 차려진 “밥상”에 비유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에서 오는 위로를 통해서 시련을 지났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신앙이 없으면 힘들고 어려웠을텐데, 신앙 때문에 그것을 피하고 평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원수들의 앞에서 이 식탁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원수들은 하나님과 겸상하고 있는 이 시인을 보게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비밀은 고난과 시련을 피해가는 ‘요행’이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의 인생에서 주님을 붙들 수 있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험한 세상을 극복할 힘을 얻고, 미워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승복하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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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2. 주일 시편23편 강해(5) 사망의 골짜기로 지날 때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I. 본문해설

 

2절은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은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II. 시련과 하나님의 계획

 

A.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인간은 누구나 외적인 시련과 내적인 절망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본성은 절망적이라서 인간에게는 좋은 것도 나쁘게 되고 나쁜 것도 나쁘게 됩니다.

 

진리의 선명한 빛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차가운 미움 속에서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곱추의 등에서 그것을 제거하면 그것은 그의 영혼을 제거하는 것이다. - 니체)

 

이런 인생의 골짜기에서 평탄하게 살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절망’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감염되어 마음까지 사망의 골짜기에 접어들면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때는 거기에서 뛰쳐나와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이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B. 안위하시는 하나님(안위 – 위로하심)

지팡이와 막대기.

지팡이는 흔히 그림에서 보듯이 끝이 구부러진 긴 막대인데, 이것으로 곁길로 가는 양의 목을 감아 잡아 바른 길로 이끌어옵니다. 사랑으로 말씀으로 인격적으로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무기의 역할인데, 맹수의 위협에 대처합니다. 이것은 위기에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원수를 쳐서 이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지팡이와 막대가 시인으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위로를 얻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바리처럼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투듯 살며 행복을 쟁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절대적 절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우러르며 갈망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것은 이 세상 사람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로의 근원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능력은 여러분의 모든 삶의 처지보다 뛰어나십니다. 문제는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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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15. 주일. 시편23편 강해 김남준 목사님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I. 본문해설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거저 구원해 주신 것이지만, 그렇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그 구원의 계획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지 않으면 믿음 없이 사는 것만큼 힘듭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II. 구원의 의도

 

A. 의의 길(말겔레 째데크, 길, 똑바른 길)

시인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신 것은, 은혜를 주신 것은, 기쁘고 감사하고 그저 좋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영적인 은혜의 힘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난관을 극복하며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영혼의 회복,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의로운 삶은 구약에서는 기준이 율법, 십계명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알고 그 은혜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남이 못 받은 사랑과 은혜를 받아 영혼의 생명을 누리고 있으니 이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백성으로서 살아라, 한 줄기 빛처럼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이렇게 성공했다라고 보여주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 말씀이, 아무게 권사님이 있었는데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섬겼더니 큰아들은 하버드, 둘째는 예일, 셋째는 프린스턴에 들어갔답니다. 그 설교를 듣는데 속이 다 뒤집혔습니다. 우리 교회에 그 권사님보다 더 헌금 많이 하고 섬겨도 자식이 하버드 못 들어간 분들 많습니다. 그게 복음입니까?

 

내가 성공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사람들이 나도 한 번 저렇게 부자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의의 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은 그 그리스도인 앞에 서면 왜 그런지 인간으로서 자신이 부끄럽고, 저 사람은 행복한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잘 살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15년전, 평촌의 교회 건물을 마련한 일

방배동 지하에서, 장년 100명이 장소가 좁아서, 9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월세 1,100만원, 보증금 5억을 빚내서 들어감. 3년 반 만에 장년 1000명으로.

그 장소도 좁아서 다시 이사 가기로 하고 땅을 알아보는데, 돈은 보증금 5억과 통장에 1500만원이 전부. 평촌의 땅을 알아보니 땅 주인 할아버지께서 교회를 짓는다는 말에 팔기로 하심. 그 할아버지 26세에 장로가 되었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안수하셨고, 이 건물에서 한경직 목사님께서 매주 성경공부를 1년 6개월을 인도하신 건물.

36억에 구입하려는데, 세금이 3억이라서 이중장부를 써서 30억에 하고 6억은 비자금으로 하자는데, 교회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3억을 더 주고 39억에 구입.

계약금은 주었지만 중도금이 없어서 어려울 때, 주인이 등기와 인감을 주면서 교회에 넘겨주고 대출하여 갚아달라고 함. 나중에 1억을 끝까지 못 갚으니 주인이 자기 돈을 먼저 주면서 갚도록 하고 나중에 회사에 갚으라고 함.

 

불의한 세상을 욕하는 것은 혀에 침만 바르면 되지만 자기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는 사람과 결별하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꺼이 감당해야할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에게는 없는 영적인 은혜의 자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위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불의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불의하게 살아도 진리가 살아있고 모든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삶은 어렵고 힘듭니다. 손해를 많이 보는데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십니다. 영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이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B.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은 있어도 그 모양이나 생김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말을 들으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운 인간의 입으로 모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솟구치는 의로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싸움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골리앗의 말을 듣고 잠잠했던 수많은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다윗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의로운 길을 따라 살면 사업에 성공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도 아니고 이름 없는 한 사람으로 세상의 한 구석에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령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매일 그 영혼들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를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둡고 불의하기 때문에 이것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의롭고 정직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를 주시면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자신이 최종 소비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신 것은 어찌하든지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의 인생이 불의와 악에 에워싸여 살아가고 있는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라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힘입니다.

이 은혜를 주실수록 의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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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8. 주일 시편23편 강해(3) 영혼의 회복(1)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I. 본문해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는,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고”(히)입니다.

이 말은 시인도 어느 때엔가는 죽은 것과 같은 때, 죽은 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II. 영혼의 회복

 

A. 인간 존재의 구성

 

유물론적 시각으로는 인간이 한 번 죽으면 끝난다고 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생각하며 인식합니다. 흙 즉, 티끌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는 창조의 동작으로 육체와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육체는 먹고 마시는 일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세상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영혼은 하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육체는 본능적으로 필요를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데에는 ‘결단’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필요에는 인간의 감각이 무뎌져 있습니다.

육체적 필요가 채워져도 영적인 것이 모자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이 때에 영혼의 소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육체는 자연과 멀어질 때 질병과 죽음에 가까워지며, 영혼은 하나님의 자원을 살 힘을 얻으며 그 하늘 자원을 공급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B. 영적 침체의 원인 세 가지

1) 무지 –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비록 그에게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을 모르면 영적인 침체를 겪게 됩니다. (시편 73편)

2)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욥 – 고난의 이유를 모름) - 고난 자체가 영혼의 침체를 주기보다는 그 의미를 아는지의 여부가 침체를 주게 됩니다.

3) 죄 – 다윗에게는 인구조사(행정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으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죄)와 밧세바 간음의 죄가 있었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커다란 죄는 양심의 가책과, 돌아보며 회개할 기회를 찾지만 작은 죄들은 쉽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의 크기는 달라도 그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반감’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존 오웬)

 

죄를 지을 때 경험하는 단절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움 때문이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음이 아닙니다.

영적 생명의 고갈은 영혼의 침체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자신을 파괴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의 삶을 살게 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것, 인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죄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이 세상의 민낯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긍정의 힘 같은 것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 하십시오. 여기에서 ‘신앙’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십시오. 미래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영혼의 회복을 꿈꾸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시련과 어려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을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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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1. 주일 시편23편 강해2. 영적 침체와 염려


시편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I. 본문해설


II.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푸른 풀밭에

선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양이 앞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이 풀을 뜯는 동안에도 목자는 다음 풀을 뜯을 곳이 어딘지를 찾아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려고 할수록 불안과 염려에 잡히게 됩니다. 

시인은 ‘가난’은 연단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단을 통해서 시인이 깨달은 것은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신앙의 결핍은 미래에 대한 염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큰일이 우리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된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신앙’은 결핍 속에서도 마음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누이시며” 는 영혼과 육체의 안식입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과 탐욕으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거기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B. 쉴만한 물가로

이 부분은 오역입니다. 물 옆에서 쉬는게 아니라 물을 먹여야하는데, 양의 특성상 움직이는 물, 흐르는 물에는 공포심을 느껴서 물을 먹지 못하기에 목자는 물이 아주 고요하게 잔잔하거나 흐르는 물이라면 돌이나 풀들로 물을 막아서 흐름이 없이 잔잔하게 만들어서 양이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필요를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선하게 이끄십니다. 


C. 인도하심

완력, 폭력, 경고를 통해 노예적으로 복종시키지 않고 조잡한 우리의 인격속에 풍성한 사랑을 보이시며 인도하십니다. 



III. 결론과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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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Ⅰ. 본문해설
시편 23편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절로,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둘째 부분은 2절부터 5절까지로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밝힙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6절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어떠한 확신 속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이 나옵니다. 

Ⅱ. “여호와”와 목자이심
A. 하나님의 이름 
먼저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가 등장하는데 “여호와”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입다.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그 언약관계를 따라서 자신의 일생을 사랑과 은혜로 돌봐 오셨음을 노래합니다. 
요즘은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농담 속에서도 들먹거리지만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름은 감히 부를 수 없는 존귀하고 거룩한 존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의 크기와 자연 세계의 오묘함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탁월하신 분이신지를 알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B. 나의 목자이심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그에 비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는 삶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처럼 하찮은 존재와 관계를 맺으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돌보며 인격적인 교제를 이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시인의 목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한 마리 어린 양인 셈인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을 양으로 비유한다.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어기제가 없는 양은 눈이 매우 나쁘고 물을 무서워하여서 아무리 목말라도 흐르는 물은 마실 수 없는 동물입니다. 또한 다리도 짧아서 빨리 뛸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양은 창조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의 보살핌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비록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이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Ⅲ. 우리를 인도하심
A. 인격적으로
또한 이 목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자는 양을 몰 때 말이나 소처럼 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협박이나 위협을 따르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일러주셨듯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요 10:3). 하나님은 급할 때는 우리를 빨리 인도하시고 여유가 있을 때는 천천히 인도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도 몰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끼치심으로 인격적으로 설복하셔서 우리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끔 하신다. 신앙이란 이렇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도록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신앙을 갖고 싶다면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하려면 듣고 말하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되며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통과 시련을 주님이 이해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 사랑으로
하나님은 또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당신을 완전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시인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는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배신과 상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계기가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모든 슬픔을 능히 이기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Ⅳ. 결론 
하나님은 언제나 목자로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믿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에 인격적으로 응답하십시오.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 인격적인 사랑의 힘이 거기에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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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의 일입니다. 이때에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확실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습니다. 그 빛을 가지고 예수님의 하신 일들, 말씀들을 비춰보게 하시고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1. 사람들이 못 박은 십자가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너희가”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가담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지만, 더 큰 의미에서는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심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진노는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십자가는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단의 인류를 가진 지배권을 무장해제시킨 일이었습니다. 바로 ‘죽음’을 극복 하신 것입니다. 


질병은 죽음의 일부가 육체에 스며든 것이고,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하기에 즉, 죽음이 들어와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죽음이 우리를 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극복하셨고 지금 우리도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살아나는 것 뿐만아니라,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도 약속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후에 나타나셔서 하신 첫번째 말씀이 “평안을 주노라”였습니다.

죽음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삶입니다. 

이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기쁨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던 세계를 향한 통치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주(아도나이)는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전에는 자신이 주인을 삼으며 살았다가 이제는 그리스도가 주(아도나이)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만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로 데려가고, 부활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 되셨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고마울수록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며 감격하는 것과 함께 미래의 삶을 온 땅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온 인류가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015. 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2)   십자가와 화평을 이루심>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주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우주적인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 모든 관계에 있던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이 모든 평화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화평을 이루는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사람들끼리 만나게하셔서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그 평화를 이룬 사람들이 이 자연을 선량한 관리자의 마음으로 대하게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고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1.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손해를 입은 쪽이 위로를 얻고, 사과를 받은 후에 용서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십자가는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진노를 풀어드리고 그 공의에 합당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져받은 구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대가를 치룬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어떻게든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죄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눈물겹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와, 그 죄를 보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의식하는 깊이 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고난으로 인해 얻은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경험하며 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고, 회개하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실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한 선택,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진정한 구원을 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외에 모든 다른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2.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화목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나라가 사랑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있기에 그런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사람들과의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창조하신 이 세계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돌봄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며 그 삶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화평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2015. 4.1.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3)   십자가 외에는>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덴에서 전도하던 바울은 에피큐리오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에게 철학적으로는 그들을 상대하여 이겼지만 열매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 후에 고린도에 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이 말은 다른 모든 학문이나 지식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의미입니다. 알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모호했던 태도를 이 일을 겪은 후에 확정을 짓고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를 보고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많은 지식들이 발전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과는 멀어지게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와 사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 사태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외에는’이라고 사도바울은 말씀했던 것입니다. 



<2015. 4.2.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4)   자기 십자가를 짊>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루는 마태복음 10장.

9장까지는 제자들을 데리고 있다가, 10장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성령의 큰 권세를 함께 주셔서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이런 권세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여기 10장에서 꽤 긴 설교를 남기시는데, 복음전도자로서의 자세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부분에서는 복음전파가 영적전쟁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까지도 깨어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가족관계까지도 막 깨뜨려도 좋다는게 아니라, 복음 전파로 인해서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도 있고 그로인해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십자가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더욱 구체화해서 신자가 성숙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총칭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스타오로스’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극한 고통을 숨이 붙어있는 동안 느끼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많은 출혈로 심한 갈증과 두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에게는 십자가로 형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은 이 ‘스타오로스’,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 조차 꺼렸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십자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심각하게 이 말을 받았을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국적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타향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로 박해를 받으며, 사상때문에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팽개치고 살면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신자의 삶을 살려고 하면 고난을 받습니다. 

고생을 하면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미래에나 현세에나 상급이 없습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고 건강하다면 고통이 덜 할 수는 있지만 그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가는 길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여전히 위대하다”(마르틴 루터)

얼마든지 악이 이길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을 추구하고 노력한 사람의 가치가 무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그것을 보고 그를 사랑하십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열매로 상을 받는게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가로 상을 받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중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복음으로 성공과 번영을 가르치면서 모두 변질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도 계량화하고 물질화하면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규태 장로 이야기...


무우순을 씹어보면 작고 다른 모양이어도 무우의 맛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보잘 것없어도 예수님의 맛,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에서 기쁨이 오고, 그 기쁨으로 인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이길 힘을 얻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개’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최상규 목사님(이단을 대적하는 사역) 이야기...


여러분들은 온상에서 자란 묘목들입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에서 손 하나 까딱하면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여러분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간이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쓸모있는 삶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이 말은 무게를 달아보아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한다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는 더러운 세상을 왜 사는지 의미도 몰랐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알고 하나님께서 쓸모있는 삶으로 만들어주시는 것,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쓸모가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그렇기위해서 은혜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쓸모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015. 4.3.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5)   옛 사람과 십자가>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사도바울은 먼저 교리를 논증하고 교리에 토대를 둔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3,4장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논증하고, 5~8장까지는 이신칭의를 받은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합니다. 


  1.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인간의 죄가 큰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크시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고, 그 죄의 결과가 인간 자신뿐만아니라 온 인류와 세계를 망가뜨리는 크기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어떤 

희생으로도 그 죄를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죄값이 치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입게 됩니다. 

이 칭의는 단순히 법정적인 선언만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예전에 없던 성령이 오셔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힘을 함께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 자체가 성화의 소명을 요구합니다. 칭의안에 은혜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화의 소명이 즉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2.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이지만 그 본성에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옛 사람, 새 사람’ 즉, ‘옛 본성, 새 본성’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을 주인삼은 정욕적인 삶입니다. 정욕은 성욕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주인삼으려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삼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려는 삶을 살려는 본성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옛 사람’, ‘옛 본성’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적용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는 크기는 다양하지만 질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한 그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죄의 몸이 죽어”

‘죄의 몸’은 옛 사람에 의해 지배된 육신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이것을 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4.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당시의 종은 ‘노예’입니다. 출퇴근하거나 월급받는 ‘종’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연적인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본성처럼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연적인 죄를 짓는 것도 두려워해야하지만 죄의 종이 되는 것, 본성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그 죄가 습성화되어서 그것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되면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인생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때 구원의 감격이 유지되는 것이고, 그 구원의 감격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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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 6.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9(마지막)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김남준 목사님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I. 본문해설


바울은 주의 고난에 참여함다는 '자기고백'으로 1장을 마칩니다.

각 사람은 온전한 자로 세우려는 목적을 위해서 수고한다고 말씀합니다.



II.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스스로의 만족을 위하고 개인의 평안을 위하는 것이 성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온전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조금 받으면 다른 일을 하게 되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힘들게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했었는지를 생각하고 돌아보고

더 의지하면서 섬겨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III.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A. 분투하여야 할 목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때는 그를 통해서 교회를 보았지만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교회의 온전함과 성숙함에 그리스도의 보여짐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온전함은 교회의 온전함입니다.


섬기는 일을 할 때, 최대의 수혜자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섬기는 일을 하는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는 다른 길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을 막고 훼방하며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B.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

"능력으로 활동하는"


바울이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은혜'때문이었습니다.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인데,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울고

남의 영혼에 대해서 울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인간은 정욕이 발동하면 자기 스스로 주인됨을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며,

은혜의 작용은 또 그에 맞는 무엇인가를 하게 합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만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일을 못한다면,

첫째, 그 은혜가 가짜일 것이고

둘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지식과 결합하여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인해서

그렇게 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교회가 온전케 그리스도를 나타내기위해 은혜를 간구해야합니다.


C. 힘을 다하여 수고함

"그의 모든 힘과 함께 분투하여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주님 안에 있기는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촛점'이 있고 '집중'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울 때, 힘들 때, 고난 당할 때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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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교리반과 제직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에 대한 지식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사경회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드려지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것이고

나의 존재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예전에 일로서 일을 대하는 게 아니라,

그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고 세우는 것임을,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일임을 잊지말고

모든 섬김의 일 가운데 은혜주시길 간구하게 된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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