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3.30.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의 일입니다. 이때에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확실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습니다. 그 빛을 가지고 예수님의 하신 일들, 말씀들을 비춰보게 하시고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1. 사람들이 못 박은 십자가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너희가”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가담한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지만, 더 큰 의미에서는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심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진노는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십자가는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단의 인류를 가진 지배권을 무장해제시킨 일이었습니다. 바로 ‘죽음’을 극복 하신 것입니다.
질병은 죽음의 일부가 육체에 스며든 것이고,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하기에 즉, 죽음이 들어와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죽음이 우리를 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극복하셨고 지금 우리도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살아나는 것 뿐만아니라,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도 약속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후에 나타나셔서 하신 첫번째 말씀이 “평안을 주노라”였습니다.
죽음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삶입니다.
이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기쁨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던 세계를 향한 통치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주(아도나이)는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전에는 자신이 주인을 삼으며 살았다가 이제는 그리스도가 주(아도나이)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만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로 데려가고, 부활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 되셨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고마울수록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며 감격하는 것과 함께 미래의 삶을 온 땅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온 인류가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015. 3.31.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2) 십자가와 화평을 이루심>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주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우주적인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 모든 관계에 있던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이 모든 평화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화평을 이루는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 사람들끼리 만나게하셔서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그 평화를 이룬 사람들이 이 자연을 선량한 관리자의 마음으로 대하게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고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손해를 입은 쪽이 위로를 얻고, 사과를 받은 후에 용서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십자가는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진노를 풀어드리고 그 공의에 합당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져받은 구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대가를 치룬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어떻게든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하는 하나님의 정의가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죄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눈물겹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와, 그 죄를 보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의식하는 깊이 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고난으로 인해 얻은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경험하며 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고, 회개하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실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한 선택,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진정한 구원을 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외에 모든 다른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2.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화목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나라가 사랑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있기에 그런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사람들과의 화목의 관계를 지키고, 창조하신 이 세계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돌봄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며 그 삶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화평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2015. 4.1.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3) 십자가 외에는>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덴에서 전도하던 바울은 에피큐리오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에게 철학적으로는 그들을 상대하여 이겼지만 열매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 후에 고린도에 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이 말은 다른 모든 학문이나 지식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의미입니다. 알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모호했던 태도를 이 일을 겪은 후에 확정을 짓고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를 보고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많은 지식들이 발전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과는 멀어지게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와 사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 사태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외에는’이라고 사도바울은 말씀했던 것입니다.
<2015. 4.2.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4) 자기 십자가를 짊>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루는 마태복음 10장.
9장까지는 제자들을 데리고 있다가, 10장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성령의 큰 권세를 함께 주셔서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이런 권세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여기 10장에서 꽤 긴 설교를 남기시는데, 복음전도자로서의 자세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부분에서는 복음전파가 영적전쟁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까지도 깨어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가족관계까지도 막 깨뜨려도 좋다는게 아니라, 복음 전파로 인해서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도 있고 그로인해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신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십자가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더욱 구체화해서 신자가 성숙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총칭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스타오로스’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극한 고통을 숨이 붙어있는 동안 느끼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많은 출혈로 심한 갈증과 두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에게는 십자가로 형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은 이 ‘스타오로스’,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 조차 꺼렸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십자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심각하게 이 말을 받았을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국적입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타향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로 박해를 받으며, 사상때문에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팽개치고 살면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신자의 삶을 살려고 하면 고난을 받습니다.
고생을 하면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미래에나 현세에나 상급이 없습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고 건강하다면 고통이 덜 할 수는 있지만 그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가는 길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여전히 위대하다”(마르틴 루터)
얼마든지 악이 이길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을 추구하고 노력한 사람의 가치가 무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그것을 보고 그를 사랑하십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열매로 상을 받는게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가로 상을 받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중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복음으로 성공과 번영을 가르치면서 모두 변질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도 계량화하고 물질화하면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규태 장로 이야기...
무우순을 씹어보면 작고 다른 모양이어도 무우의 맛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보잘 것없어도 예수님의 맛,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에서 기쁨이 오고, 그 기쁨으로 인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이길 힘을 얻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개’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최상규 목사님(이단을 대적하는 사역) 이야기...
여러분들은 온상에서 자란 묘목들입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교회에서 손 하나 까딱하면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여러분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간이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쓸모있는 삶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이 말은 무게를 달아보아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한다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는 더러운 세상을 왜 사는지 의미도 몰랐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알고 하나님께서 쓸모있는 삶으로 만들어주시는 것,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쓸모가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그렇기위해서 은혜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쓸모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015. 4.3. 새벽 십자가 사경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5) 옛 사람과 십자가>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사도바울은 먼저 교리를 논증하고 교리에 토대를 둔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3,4장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논증하고, 5~8장까지는 이신칭의를 받은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합니다.
-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인간의 죄가 큰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크시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고, 그 죄의 결과가 인간 자신뿐만아니라 온 인류와 세계를 망가뜨리는 크기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어떤
희생으로도 그 죄를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죄값이 치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입게 됩니다.
이 칭의는 단순히 법정적인 선언만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예전에 없던 성령이 오셔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힘을 함께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 자체가 성화의 소명을 요구합니다. 칭의안에 은혜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화의 소명이 즉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2.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이지만 그 본성에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옛 사람, 새 사람’ 즉, ‘옛 본성, 새 본성’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을 주인삼은 정욕적인 삶입니다. 정욕은 성욕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자신을 주인삼으려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삼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려는 삶을 살려는 본성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옛 사람’, ‘옛 본성’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적용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는 크기는 다양하지만 질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한 그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죄의 몸이 죽어”
‘죄의 몸’은 옛 사람에 의해 지배된 육신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이것을 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4.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당시의 종은 ‘노예’입니다. 출퇴근하거나 월급받는 ‘종’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연적인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본성처럼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연적인 죄를 짓는 것도 두려워해야하지만 죄의 종이 되는 것, 본성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그 죄가 습성화되어서 그것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되면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인생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때 구원의 감격이 유지되는 것이고, 그 구원의 감격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