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8   새벽십자가 사경회5. 사랑으로 함께 하심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하셨습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경건과 신앙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통해 마음에서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성도이고, 이 성도는 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삽니다.


2. 서로 사랑하게 하시려고 이름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형제도 모두 그렇게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우리안에 그 사랑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 사랑충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그분의 분신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부활의 기쁨은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속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죽으시고 이 일을 위해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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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7  새벽십자가 사경회4.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예수님의 소원은,

1. 당신과 함께 있게 하는 것과, 

2.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는것이었습니다.



1. 제자들과는 몸으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함께 하셨지만 지금은 시간, 공간을 넘어서 누구든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밀함이 있고 이것은 육적 친밀함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더 깊이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구약시대에는 기적과 이적을 보이셔서 영광을 보여주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개인적인 부흥을 통해서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흥이 개인, 교회, 세계에 나타나고 임하고 경험되길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고 반드시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흥을 보는 은혜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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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새벽 십자가 사경회3.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됨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시는 모본과, 사람은 온전하게 사랑하시는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성도가 온전한 사람이 되며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힘은 사상과 윤리인데, 이것을 묶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이 은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안에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사랑, 그 사랑이 바로 성령입니다.이것이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은혜로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인데, 

1. 우리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교회가 온전한 지식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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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5. 새벽 십자가 사경회.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상


요 17:20~2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 인생의 커다란 실수 두가지는 첫째는 목사가 된 것이고 둘째는 결혼한 것입니다."

로이 클레멘스라는 영국의 1000명이상의 목회를 하고 책을 여러권 쓴 영향력있는 목사가 어느날 갑자기 남자 정부(게이)와 도망가면서 남긴 유서와 같은 편지. 그는 대학시절 게이였지만 예수를 믿고 은혜받고 목회자가 되었지만 은혜가 떨어지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치유"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중심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술 주정뱅이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가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리깡(심리학자) "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하는 곳에는 내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모순에 가득찬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는 것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참된 나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이렇게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세계를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죄와 상관없는 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랑은 세상 사람이 믿음을 갖는 원인이 됩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먼저 보여주시고, 우리안에 그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를 꺾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최고의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이 사랑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사랑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인 것입니다.


누구도 이 세상의 자원으로 사랑할 수 없고, 은혜만이 그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는 "사랑으로 하나되겠습니다"라는 서약인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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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새벽 십자가 사경회.  아버지와 아들처럼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기도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기도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 하나됨

같은 것을 믿고 아는 지식의 하나됨과,

사랑에 있어서의 하나됨입니다.


5절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에서 말씀하시듯이 삼위일체안에서 가졌던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2) 신적 보전

삼위일체의 사랑은 분쟁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서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된 상태를 보전해 주시기를 구하시고, 악한 세력으로부터도 보전해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교제처럼, 우리도 불완전하지만 교회안에서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살아 영광을 돌리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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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 39:5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의 요셉)


요셉은 선지자(성직자)도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빛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을때, 수많은 노예들 중에서 어리고 젊은 나이에,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을 히브리인(애굽인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노예,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는 노예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가장 천한 일에 종사하는 것이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A.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눈여겨 볼만한 무엇인가가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보였을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보디발은 요셉을 여호와라는 어떤 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번 의로운 일로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된 그의 삶을 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같이 살지만 그들이 요셉을 보고 "우리"라고 말하기 어색한, 그 무엇을 가진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느냐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예수믿는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수없는 사람은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B.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은,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삶가운데 한두가지 잘하고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 인격 전체에 가진 것을 말합니다. 남은 잘 돕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일은 열심히 하지만 게으른 사람도 아닙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감옥에서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은 또 한가지, 요셉에게서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통케하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막히지 않고 굽지 않고 쭉 뻗어서 눈감고 운전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뜻입니다.

요셉을 산 보디발이 요셉에게서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이 얻은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우리들에 대해서 '우호적'일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세상에 우리가 '유익'을 남겨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믿고 나서 가족들을 더 섬기고 사랑합니까? 더 수고합니까?

직장생활을 더 잘해서 유익을 줍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것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모습이 참모습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거품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유익을 크게 주었고, 보디발은 그런 요셉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가족들에게, 직장에 유익을 주어서 그들이 여러분을 그런 유익한 사람인 것을 알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만일 일은 안하고 기도만하고, 말씀만 보고 그랬다면 능지처첨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일상의 생활을 잘라먹으면서 믿는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삶을 방식때문에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유익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기때문입니다. 

이 일이 한번이 아니라, '사사건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케하시는 것을 보디발이 본 것입니다. 

일개의 '노예' 한 사람때문에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주인공과 신앙의 눈을 보는 주인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절대신상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역사 중심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가 있는 어디에서든지 예수믿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입니다, 나를 기억하셔서 이들에게 구원과 평안을 주시옵소서. 내가 얼마나 섬기고 사랑하고 죽어야하겠습니까.."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을 특별하게 생각했을까요?

요셉의 특별한 믿음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 사는 것이 요셉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요셉은 비젼, 꿈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 꿈은 자신이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고 그것이 비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알지도 못했을 그 꿈이 내용이었을 것이지만, 바로앞에 가서도 그 꿈을 좇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자신을 총리로 세우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여러분이 어떤 지위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순전함을 잃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죽을때에도 애굽땅에서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기고 조상들의 땅을 기억했던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려는 사람을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요셉은 자신의 믿음의 순전함을 붙들었을까요?

바로 고난 속에서입니다. 총리로 있을 때가 아니라 노예로서 있을때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노예로 팔려와서 기가막힐 상황에 있었지만 낙망하여 눈물짓기보다는 당장 앞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믿음의 순전함을 지킬까를 더 크게 생각한 것이 요셉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형통케 하심'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핑계삼아서 믿음의 순전함을 지킬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이 고난을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창 39:9   하나님의 임재안에 산 사람(보디발의 아내와의 사건에서의 요셉)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을때,

A. 신의, 주인에 대한 신의를 말하였습니다.

교회용 영성, 예배용 영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삶 속에 깊이 녹아드는 영성이어야 합니다.

치열한 살의 현장에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B. 순수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디발의 아내와 단둘의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전보다는 '순결한 신앙이라는 핵심가치'에 더 많이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신앙을 목숨걸고 지켰기 때문에 그 비전도 이루고, 그보다 더 소중한 축복을 받았으니 그의 일생에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 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꿈에 미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미쳐야할 것은 꿈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여기에 미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도 이뤄주시고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창 41:38, 시 105:19   신령한 사람 요셉(바로 앞에서의 요셉)


요셉이 바로의 꿈을 즉시로 말하고 해석하여 준 그 신령함은,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기보다는 이미 요셉이 그런 일을 할만큼 신령한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요셉의 이 신령함은 감옥에서 말씀으로 연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말씀으로 연단 될때 그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평생에 단 한번도 말씀의 연단을 받아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인 것입니다. 

단숨에 벼락맞듯이 새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가장 힘든 때는 말씀이 나를 연단할 때, 고쳐지기 싫어하는 나를 연단할 때이지만 사실은 그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말씀은 결단코 우리를 혹독하게 몰고가서 죽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연단을 통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씀의 연단으로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도 지금은 아무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긴 시간 동안의 하나님의 말씀의 연단으로 우리도 그 신령함으로 인도하실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형제들을 만난 요셉)


창41:45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며,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 두가지를 기억하십시오




5. 용서의 사람





-- 변향근 집사님의 추천으로 듣게 된 시리즈.

비전과 꿈의 사람이라고 주로 듣고 알려진 요셉의 이야기.

분명 비전과 꿈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굴곡 깊은 삶을 관통하는 그가 지키려고 애쓴 "순전한 믿음과 신앙"을 깊이 돌아보게 한 말씀.

요셉의 인생에서 최고의 관심사와 가치는 꿈을 이루고 크게 쓰임받는 것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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