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3
그리스도인과 남은 고난

I. 본문해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교회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과 기도제목들 중 얼마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대부분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가장 유익을 누리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온전해짐은 교회의 온전함과 연결됩니다.
즉,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나를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실 은혜를 나에게 흘려보내주신 것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소명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소명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무슨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동기로 하느냐, 
어떤 사람이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소명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고
신자의 소명은 신자다와지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인해 오해되기 쉽지만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속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들, 그 뒤에 있는 것, 그것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속에 채우노라"(원문)
즉,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똑같다면 그리스도의 

A.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성육신하신)
홀로 당하신 고난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습니다.
어쩔수없는 죽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고난과 죽음입니다.
일회성이 아닌 영원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홀로 당하셔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홀로 지게하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구도 나눠질 수 없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십자가로 가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마음을 보여주시고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도 보여주시고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해서 당하신 고난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모자라게 당하신 고난도 없으십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몸으로서 교회는 불완전한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의 죄와 불완전함 때문이고, 
그로인한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고난이지만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겪어주시는 고난입니다.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
교회, 성도가 박해받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기가 받는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만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교도들, 불신자들이 받는 고통까지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이라고 생각하시고, 이것은 선교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보시면서 눈물훌리시는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마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교화'를 위해서 이십니다.
이런 일들은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더 닮아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비례합니다.

교회를 이런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은채 주일에 교회에 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설교자의 재능을 믿는 사람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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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둘째날.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

I. 본문해설

어제, 너무 오래해서 오늘 할 것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성도가 한 몸임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뿐 아니라, 
먼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은 무지 속에서 번성합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믿기 전보다 행복해졌습니까?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할 때 그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있지만 그 생명이 공급될 때 활발한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II. 주의 몸을 위한 고난이 있음

A. 교회 밖으로부터
교회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싫어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이 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받는 박해는 이런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허물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사상이 구분이 안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효과적인 전략이 성공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전쟁은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도가 이 세상과 싸워서 파수해야 할 사상이 있습니까?

세상과 다른 윤리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핍박일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윤리가 아니라 '거룩함의 열매'를 성경은 말합니다.

탈세, 무자료, 누가 정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럽사람은 살기위해 일하고
미국은 일하기 위해 일하고
한국은 일하기 위해 산다.

이 세상은 모든 부분이 틀어져 있습니다.
사회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것이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것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될때마다,
자신은 덤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B. 교회 안으로부터
접붙여진, 이미 생명을 얻은 것은 완전하지만, 
그 몸의 지체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1) 무지. 무식해서 오류가 남아있습니다. 
신령함, 사상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악에 대담해지고 선을 행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2) 사랑의 불완전함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은혜가 떨어지는게 아니라, 일부는 은혜롭고, 일부는 그렇지 못해서 입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이 '갑', 은혜받는 사람이 '을'입니다.
그런데 이 '갑'은 행복한 '갑'이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기때문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아프면서도 기뻐하여 '을'로 남고 싶어합니다.
3) 분쟁때문에 
이기심 - 자기의 이익에 집착합니다. 자기 사랑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 사랑이 깨어져야합니다. (자기 깨어짐)
이기심은 몸 전체에 사랑이 없게 합니다. 
적당한 입맛은 감사하지만 점점 더 하면 몸에 해로운 음식까지 찾게 됩니다.
잠시뿐인 혀의 즐거움때문에 몸 전체의 해를 불러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관점의 부재 -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도다'

신앙의 행복은 영원한 복락을 현실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III. 영적인 몸으로서의 삶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였든지 간에 그것은 몸 전체가 한 것이고, 
내가 무슨 악한 일로 교회에 고통과 분쟁을 주었다면 몸 전체에 해를 가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는 '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백화점처럼 모든 것을 교회가 주려고 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일,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접붙여지는 일을 해야합니다.

신자의 운명은 교회와 함께하고,
교회의 운명은 그리스도께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안에서 맺힌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불완전함으로 고통을 당하신 것처럼 
몸의 지체인 우리도 함께 고난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로운 연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과의 연합도 신비로운 영적인 연합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심정을 전수받고 우리도 고난을 이길 힘을 공급받으며 
몸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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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골 1: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I. 본문해설

  

골로새 교회를 격려하려는 바울의 편지(옥중서신)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기록, 우주적 기독론을 담은 서신(에베소서는 교회론적으로 기록)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애정을 담은 서신.(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주석을 쓰고 싶으신 목사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문제를 왜 생각해야합니까?교회론과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져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정체

  

너희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너희'는 14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얻은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A. 속량, 곧 죄사함을 얻은 자

  

그리스도인은 죄인이었다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속량(속전)'으로 말입니다.

  

노예를 사고 파는 곳에서의 "속량". 노예를 팔고 사는데에 지불되는 값. - 죄의 노예에 팔린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속전을 주고 속량하신 하나님.

  

완전한 속량, 어떤 대가나 공로를 약속하고 지불하는 것이 아닌..속량받은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 성령의 축복, 미래의 생명의 약속, 생명과 사랑의 교통, 교회에서 누리는 복락들... 주님의 속량때문에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나를 속량하신 감격이 있으면 옛날에 받은 구원의 은혜가 옛 것이 아니라날마다 오늘, 지금의 그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속에서 사는 것)

  

B.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김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권세(엑소시아)'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것입니다.'어떤 것을 명령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적 트럭을 세우는 경찰이 가진 '권세')

  

'흑암' 사상적인 어두움(무지함, 모름, 속이고 겁주기에 좋은 사람,                         욕망이 맘대로 그를 휘둘리기 좋음, 수은을 먹고 죽은 진시황, '무지'가 '권세'를 형성하여 그를 망하게 함)--> 예전의 "나"  윤리적인 어두움(무지의 어두움안에서 어두움에 적합한 일을 하는 것,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보는 눈에 안질이 있으면 그것이 아름답지 않고 괴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구원파는 죄가 별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편리함을 느꼈습니다.

  

C.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하나님의 이 세계를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구원 뿐만이 아닙니다.창조, 구속, 완성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창조하셨을뿐만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계십니다.그래서 '학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로고스가 만물에 깃들여 있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세상의 지식을 무시하듯 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것입니다.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발견된 지식에 해석을 넣어서 가치관을 만들어내는데,거기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없기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학자, 신자들은 학문을 더 공부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만물의 끊어짐으로 타락한 세계 속의 무질서에는 탐욕이 들어있습니다.이것을 하나님께서 고칠 작정을 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접붙이시고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지금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지만,마지막 완성의 때에는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수와 인간과 화해, 자연과 화해하는 법을 지금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한 선취적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몸에 접붙이심을 생각해본다면,"내가 구원받았을 때, 나의 형제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실선 바깥에 있던 내가 점선으로 이어져 실선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III. 몸을 위한 괴로움에 참여함

  

24절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은 골로새 교인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으로 투옥되었지만,이것은 개인의 괴로움이 아니라 예수의 몸의 괴로움, 사도 바울 뿐만아니라골로새 교인들도 예수의 몸이기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한 것입니다.

  

'괴로움'

  

A. '겪음' : 피동적 고난(괴로움)

 

 

세상과 다른 신자의 상태때문에 겪는 피동적 고난(괴로움)입니다.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없는 이유는 끊임없는 타협과 변절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괴롭힐 의지가 없지만 그가 존재하는 것이 세상에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괴롭히고 고난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기뻐할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일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절대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 겪음이 감사한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겪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형제들의 불완전함은 구분이 되질 않아서 함께 겪는 것입니다.그것을 떼어내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는 날까지 고통을 받게 되지만,세상의 고통은 고통만 있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고통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게 아니라 고난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는 팔아먹으려는 사람,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 개념없는 사람들, 또 바깥에는 예수님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안팎의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지금도 계속되는 고난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도 교회가 있지만 교회 안에도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된다는 것은, 이 모든 그리스도의 몸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그 몸의 세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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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새물결플러스)

What Shall We Say? Evil, Suffering, and the Crisis of Faith


'신정론'은 '하나님의 옮음을 인정하는 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보았을만한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물결플러스 김요한 목사님 덕분에 읽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들(악, 고난, 신앙의 위기까지)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닥친 어려움(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서는 절망, 또는 삶을 포기하게까지 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서 저자는 오래 수 백년 전부터 있어왔던 대답들과 세월을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답변들, 그리고 당연히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까지 가지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것인지, 늘 옳으신 것인지, 전능하시다는게 사실인지, 혹시 수많은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컨트롤할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신지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얼마전부터 교리학교 강의가 진행 중이라서 '신론'에 대해서도 듣고 배우고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불분명하고 희미하게(한편으로는 어느정도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 인용한 다른 사람들의 신정론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들은 또 다른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그려보게 하였다.



4장과 5장 사이이의 '간주곡(울부짖음, 욥과 폭풍우)'에서,


욥과 친구들 간의 차이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종교적 체계를 사랑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친구들과 달리 욥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신학을 버릴 용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69 


"주님, 왜 저입니까?"에 대해 이 책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대신 욥기는 더욱 심오한 질문, 결국은 더욱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 인간의 고통이 불굥평하다는 판단을내리기 위해 도덕적 질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도식, 즉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도식을 하나님과 맞바꾸기를 원하는가?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인간으로 기꺼이 나아가겠는가?" 바로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무게에 준하는 결단이다.   175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 주신다면 자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178


신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가 실제 겪는 일들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다른 면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또는 '오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상황에 맞는 다른 하나님의 이미지로 '수정'하는 일을 통해서 역시 다른(옳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계속 생겨나게 되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나 하나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쉽게 다가가게 한다.


'이성'으로 이해한 후에 '신앙'을 갖는 것보다, '신앙'으로 걸음을 떼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겨자씨'로 인한 큰 나무와 '한 줌 누룩'으로 인해 부풀은 반죽 덩어리를 보는 길이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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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 주일.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김남준 목사님


시편 107:19~20


I. 본문해설


고통에서 건지신 하니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또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자를 '외국인', '나그네'라고 하였는데

돌아갈 곳, 바라볼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욥처럼 애매한 고난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행복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거룩입니다.

거룩함의 펼침이 행복이고 행복의 접음은 거룩함입니다.



II. 신자들이 고통받을 때


A. 신자들이 받는 고통

고통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이고, 그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아서 잔잔한 바다일 때도 있지만, 

풍랑치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나의 순결함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없었다."

나의 불완전함과 순수하지 못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고통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져주셨습니다.



B. 신자들의 부르짖음

계시와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계시 - 공표된 하나님의 의지

섭리 - 감춰진 하나님의 의지(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고통은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기도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음'(쟈하크) - 구원을 바라는 간절할 외침.



III. 말씀으로 구원하심


A. 말씀을 보내심

우리는 고통이 빨리 끝나길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길 바라십니다.


고통을 당할 때, 기도보다 먼저 할 일은 말씀을 찾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열렬히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열렬함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기도보다 보내시는 말씀을 맞이하고 

말씀에 비추어 깨달아야 합니다.


B. 고통에서 건지심

"위험한 지경"은 원문에 의하면 "고통들"입니다.


내 안의 망가진 부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손 대실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교회의 일부분으로 있는 것이 교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지만 죄 때문에 복수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신자의 성숙함은 고통 당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생각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내가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가까이 계셔서 붙드시고,

말씀하시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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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장혜영 옮김, 새물결 플러스)

'신정론'에 대한 책을 읽는 중이라서 더 관심있게 듣게 된 주일 말씀.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고, 나의 의로움이나 '큰 잘못없음'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지를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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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적 군사입니까(김남준, 솔로몬)


사탄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합니다. 그의 졸개 마귀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죽기까지라도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헌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때가 있어도, 그들은 쉬지 않습니다.   49


엄밀히 말해서,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댜수의 그리스도인들이이러한 영적인 전쟁의 실상이 심각하다는 것에 눈 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마귀와 그의졸개들은 오직 이 영적 전쟁 하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62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세월은 악하고 세상은 우리의 영적 싸움을 응원해 주지 않습니다.   109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안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115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손 안에 붙들어 주시는 때에만 영적인 군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7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은밀히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이런 허리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을 속박하는 이러한 허리띠는 싸움에나 편리하지, 죄악의 낙을 즐기며 살아가는 방탕한 삶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31


그는 가끔 입술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다시 영적인 군사로 무장시켜 달라고 구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된 기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속사람은 이미 불 같은 정욕의 화살을 맞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술은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를 구하나, 그의 육체는 이미 세상의 일락을 위하여 살기를 기뻐함으로써 자신의 기도가 말뿐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205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206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개인적인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사상이나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지 않는 수많은 사상과 생각들은 개념과 생각의 혼란만을 더할 뿐입니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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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이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

영적 전쟁은 마귀와 싸워서 무언가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무엇을 대부분 '재물'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배웠다.

사업이 잘되는 것도 영적 전쟁이고, 

교회 못나가게 하는 남편, 가족들과도 영적전쟁이라서 절대 지면 안되고

불화하는 것도 불사해야하는 것이었고,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마귀'이고 '귀신'이라고 했다.

오히려, 본문의 앞 부분에서 말하는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 부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 후에 영적 전쟁을 말한 사도 바울은 영적전쟁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으며, 그 전쟁에 이런 군사로서의 무장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적 전쟁을 생각한다면 태도와 마음, 삶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된다.

정신차리고 배워야 할 이유이다.


2014.10월부터 구역공과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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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주일. 김성진 목사님.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사사기 6:11~28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날마다 좇아다니는 자였으며,

아브라함은 살던 곳을 떠나라고 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고,

노아는 산에 배를 지으라고 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고,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으며,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본문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이방민족을 통해서 괴로움을 당하여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하는 역사의 반복이 사사기 입니다.


이 반복이 여섯번 반복되고, 

오늘 본문은 네번째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1)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우상을 세우고 이방신의 제사장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백성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탓으로 (13절) 돌렸습니다.


2)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진 자였습니다.(14,15절)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기드온을 부르시지만   

   기드온은 과거 하나님의 역사를 알면서도 지금은 그런 하나님이신 줄을 모르고

   부르심에 뒤로 물러나는 반응을 보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그저 '주'(아도나이-어르신, 

   상전을 통칭하여 부르는 의미)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엘로힘으로 부르게됩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맞다면, 그런 능력, 권한이 있다면 

   그런 징표를 보여달라고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밖'에서 말씀하시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25,26절)

우상을 찍어버리고 제단을 만들라고 하십니다.(바알과 아세라)

기드온에게는 생계의 위협이며 집안의 가업을 버리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감히' 이 일을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합니다.

이것도 결단입니다. 

비록 우유부단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결단을 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세상과의 타협으로 결단하지 못했다면, 다시 포도주틀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결단을 못하는 사람은 "날"(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을 살지만

결단을 하는 사람은 "때"(하나님의 때)를 삽니다.


큰 것을 결단하는 사명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거치는 것을 버리는, 이 작은 결단을 하십시오.


** 방지일 목사님

http://blog.daum.net/jndong/1659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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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주일.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 길 찾게 하는 연단


시편 119:67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I. 본문해설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입니다.

두문법의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어 22자 알파벳을 각각 맨 앞으로 오게 해서 한 글자에 8절씩 지은 시입니다.

읽고 암기하기 좋도록 이렇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지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어집니다.



II. 고난 당하기 전의 삶 : 그릇 행함


히브리어 번역의 "그릇 행하였다"는 '길을 잃어버리다', '길을 잃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행하다' 입니다. 즉 삶의 방향을 잃은 것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길을 잃은 삶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인, 간음도 저지르고, 하나님 싫어하시는 인구조사을 하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삶의 주체가 자신이지만(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체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거룩한 욕구만 우리의 삶을 이끄는게 아니라 정욕적인 욕구도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신문이나 티비,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향을 받을 뿐만아니라 그것들이 이끄는대로 끌려가는 것은 주체성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받으며 사는 삶이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각하여 뛰는 학생에게, 왜 그렇게 뛰느냐,

빨리가야 출석하고, 출석해야 학점받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나이들어서 죽게되는데, 결국 죽기위해 그렇게 빨리 뛴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 몰두하느라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예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릇 행하는", 즉 길을 잃은 채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III. 고난 당한 후의 삶 : 말씀을 지킴


여기에서 "말씀"은 히브리어에는 단수로 나타납니다.

여러가지 규칙과 교훈을 하나님은 주시지만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처럼 '하나'인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살인같은 하나씩의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그것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와 자신을 향해서 가지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지키다'는 (샤마르) '성을 지키다', '말씀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것', '높은 망대에서 적을 탐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믿음의 규칙(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입니다.

둘째, 생활의 교훈(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되어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 말씀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그의 사람됨을 펼치면 그 사람의 삶이 되고,

그의 삶을 접으면 그의 사람됨이 되는 것입니다.



IV. 고난과 영혼의 변화


고난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는 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편안한 환경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낍니다.


짐승은 고통을 받으면서 그 의미를 물을 수 없지만 

인간은 그것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행복은 '항구적'인 특성을 가져야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잠시 즐겁더라도 내일부터 괴롭게 된다면 오늘의 잠시라도 진정한 행복일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은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 의미를 묻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이기며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고생은 상처만 남기지만

고난은 연단을 줍니다.


진리의 빛을 통해서 나를 객관적을 보며 삶의 사태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인과응보의 고통도 있고, 

죄와는 상관없는 고통도 있을 것이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묻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의미를 알고 받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잘 나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는 듯 보이지만 길 잃은 상태로 사는 것이 행복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한 대 때리시더라도 정신차려 제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징계하신다고(히) 하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사생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성적으로 교통하길 원하시지만 그 지성이 눈 멀때, 환경적으로 말씀하셔서 그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릇 행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삶의 처지에 있던지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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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그 오해와 진실(이민규 지음, 새물결플러스)

한국 교회가 제대로 알아야 할 신약성경의 26가지 키워드

 

 

성경의 진리는 사람들의 삶을 결정하는 참되고 신실하며 변함없고 진실한 성품이다.   21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진실하게)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진실한 성품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22

 

안일한 믿음주의란 쉽게 말해서 복음의 기초적인 진리,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거나 동의만 하면 누구나 단박에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즉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107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근거다.   111

 

요즘에도 일부 목회자들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저주와 축복을 남발하여 헌금을 억지로 빼앗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성장이라는 허울을 내세우지만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일 뿐,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는 없다.    120

 

벌을 받을까 봐 ,손해를 볼까 봐, 혹은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드리는 봉헌은 잘못된 봉헌이다. 봉헌을 드리면서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사실, 봉헌을 할 때 생색을 내거나 분위기를 따르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아닌가?  128

 

그리스도인의 복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풍성함에 있다.  131

 

"나눔의 복을 누리고 있었다면 이런 일로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낸 만큼 돌려받으려고 하니... 많은 헌금이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그 돈으로 크게 짓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도 복 받아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했고...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의 헌금을 부정하자니 그간 해온 신앙이 의미가 없고, 계속하지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없고 목사만 잘사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진 것이지요. 만일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체계였다면 우리는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열심히 하라고 해놓고 나눔의 기쁨은 목사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라 했으니..."  133

 

주님의 날이 아닌 날은 없고 주일만 거룩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날을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한 의도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151

 

"그리스도인은 주일날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날에 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일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양용의 교수)    152

 

기도는 우리의 책임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진심을 담아 간절히 기도할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혹은 재림 때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본문이 요구하는 바다.  202

 

사실 반복해서 하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203

 

어떤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살다가 실패한 후, 이제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통해 또다시 자기 욕심을 이루려 한다. 세상에서 교회로 배경만 바뀌었을 뿐 욕망을 채우려는 간절함이나 태도는 똑같다. 그런 방식이라면 기도는 마술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바로 기도에 대한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이 아니시며, 성경에는 알라딘의 램프같은 요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210

 

기도는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화다.    211

 

기도에 대한 정말 큰 착각은 기도ㅗ로 내 소원을 관철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밤낮없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이방인 추구하는 기도방식에나 어울린다.    213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관철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214

 

구원의 선물 또는 은혜란 공짜가 아니라 일종의 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22

 

우리에게 은혜는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받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231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맡았는가, 즉 얼마큼 재능이 있는가는 상관이 없다. 오직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가 관건이다.    286

 

그럼 누가 염소로 판정되면 영벌에 처하게 되는가? 그들은 특별하게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했다. (마 25)    29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293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끊임없는 훈련이다. 훈련은 연습이고, 연습이란 완성될 때까지 실수하는 행위다. 행위심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삶의 갈등이요, 몸부림이다.   304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뿐이다. 하나님으 뜻이 세상에 얼마만큼 구현될 것인가는 우리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즉 순종은 우리 몫이고 실현은 하나님의 몫이다.  314

 

종말론은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고 그 목적은 반드시 완성된다는 신학이다. 따라서 종말론은 미래에 관한 실마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320

 

성경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들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세부적이고 체계적인 관심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있는 삶, 늘 충성스러운 삶이다.   324

 

지식의 목적과 완성은 사랑이다.   333

 

(330  다섯째 줄   "아라"  -->  "아니라" 오타.)

 

 

 

차례

 

말씀만이 살길이다

 

1부 성경에 대한 오해와 진실    (진리, 베드로, 지옥, 아가페...)

2부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와 진실    (헌금, 주일, 안식일, 술, 성탄절, 여자, 기도...)

3부 교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공짜 은혜, 율법, 믿음, 예정, 구원, 최후심판, 부활, 종말...)

 

말씀으로 돌아가자

 

-- 이민규 교수님과 김요한 목사님(새물결출판사) 덕분에 관심갖고 읽게 된 책.

   시작부터 "진리"에 대한 언급으로 눈이 뜨였고,  읽다보니 제목에서 느껴지는 편안함(나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보다는  실제로 경험했던 잘못된, "오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구체적으로 또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나는 어떠했었고 지금은 여전히 어떤지를 생각해보면 한탄과 두려움이 먼저 나온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살아가기 쉬운 사람들에게 오직 "성경" 한 권을 주시고  이끌어 오신 하나님은 놀라울 뿐이다.

 

   단순하게 '오해'를 지적하고 '진실'을 알려주는 것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 진실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바른 신앙생활'까지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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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 주일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1)  나의 믿음 순금같이 되어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I. 본문해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본문은 엘리바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욥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II. 연단하시는 하나님


A. 나의 인생길이 있음


원문에는 '나의 길'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한 (인생)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마다 있는 개별적인 인생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질문'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잘 하고 있는가?"

"사회는 무엇인가? 사회는 잘 하고 있는가?"

나와 관계맺은 것들에 대한 질문은 곧 '나'의 행복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과 지식들을 어디서 얻으십니까?

세상의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그런 지식을 얻어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대치되거나 대신 살아질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 가치가 있기에 '나'는 존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연적인 껍질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한 가슴떨림이 있습니까?

이 떨림이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물어보게 됩니다.


B. 나를 아시는 하나님("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야다' 시제(과거,현재,미래)는 없고 시상(완료, 진행)만 있는데, 이것은 '완료'의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식에서 '내'가 배제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아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앎, 부모처럼 돕고 사랑하시기 위한 앎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C. 단련받을 때가 있다.


"단련"은 "제련"의 의미입니다. 

금에서 불순물을 분리해내는 반복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연단을 반복하고, 이때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이 분리되고 

인식하게 되고 회개하고 자기부인을 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인 마음에서 불순물이 분리되고 순전한 마음이 되게 하십니다. 


D. 나를 순금같게 하심


순금(지하브)은 '정제된 금'을 말합니다. 

이것은 '태도'만이 아니라 '본성' 자체에 도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연단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살 인생인 우리들이

순금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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