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 6.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9(마지막)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김남준 목사님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I. 본문해설


바울은 주의 고난에 참여함다는 '자기고백'으로 1장을 마칩니다.

각 사람은 온전한 자로 세우려는 목적을 위해서 수고한다고 말씀합니다.



II.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스스로의 만족을 위하고 개인의 평안을 위하는 것이 성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온전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조금 받으면 다른 일을 하게 되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힘들게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했었는지를 생각하고 돌아보고

더 의지하면서 섬겨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III.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함


A. 분투하여야 할 목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때는 그를 통해서 교회를 보았지만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교회의 온전함과 성숙함에 그리스도의 보여짐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온전함은 교회의 온전함입니다.


섬기는 일을 할 때, 최대의 수혜자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섬기는 일을 하는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는 다른 길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을 막고 훼방하며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B.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

"능력으로 활동하는"


바울이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은혜'때문이었습니다.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인데,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울고

남의 영혼에 대해서 울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인간은 정욕이 발동하면 자기 스스로 주인됨을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며,

은혜의 작용은 또 그에 맞는 무엇인가를 하게 합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만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일을 못한다면,

첫째, 그 은혜가 가짜일 것이고

둘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지식과 결합하여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인해서

그렇게 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교회가 온전케 그리스도를 나타내기위해 은혜를 간구해야합니다.


C. 힘을 다하여 수고함

"그의 모든 힘과 함께 분투하여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주님 안에 있기는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촛점'이 있고 '집중'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울 때, 힘들 때, 고난 당할 때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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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교리반과 제직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에 대한 지식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사경회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드려지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것이고

나의 존재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예전에 일로서 일을 대하는 게 아니라,

그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고 세우는 것임을,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일임을 잊지말고

모든 섬김의 일 가운데 은혜주시길 간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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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9.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8.  남은 고난에 참여함은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했을까요? 사도바울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II.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

"완전함"은 '다 자란, 어른이 된, 성숙한'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숙한 자로 내세우기 위함이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는 영화된 사람을 말하지만 이땅에서는 영화가 불가능하기에 '성숙'을 말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영화를 위해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숙'은 '지식의 성숙과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성도를 성숙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난을 채움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세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할까요?

'전파하고, 권하고 지혜로 가르침'은 분사형태로서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A. 그리스도를 선포함('전파하여'의 본 뜻)

누구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있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공중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포가 없이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한 때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과 밖에서 모두 계속 선포되어야 합니다.


B. 모든 사람을 권함(각 사람을 권하고)

'사람 사람마다 권하고'

'권하고'는 '권하다(누스)와 티데미'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은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하게 되기위해서 교회가 하는 중요한 섬김은

'사람들의 정신을 제 자리에 놓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도 한 주간 지내는 동안 은혜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정신'은 제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지킴)


어거스틴.

내 마음이 손,발에 명령하면 말을 듣지만

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말을 안듣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망가졌기(병들었기)때문입니다.


마음이 일단 움직이고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하지 못한다)

정신을 통해서 생각이 마음에 떨어지면 그것이 자라나 번성하면서 

힘을 가지고 활동하게 됩니다.


목양은 이탈하는 성도들의 정신을 수시로 선명한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회자 혼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생이 꼬였다는 것은,

내 뜻대로 일이 안됐다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일이 안된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잊지말라, 기억하라, 생각하라'를 강조합니다.

왜?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여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면 일주일 동안 경건생활, 특히 기도생활을 착념해야합니다.


인간에게 미래의 일을 안보여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교만해서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낙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르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C. 모든 사람을 가르침

성도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사는게 고달파서 배울 시간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배우지 않아서 고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지식과 교훈을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우기 싫어하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III. 적용


고난이 기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한 성도로 채울 수 있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줄로 알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예수사랑을 가진 희생으로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은혜안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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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3.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7. 영광의 비밀, 그리스도. 김남준 목사님


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I. 본문해설


세계, 역사, 인간, 종말에 대한 관심은 지각있는 사람들 누구나 있으며 질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에 대한 경륜, 우주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 가치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II. 영광의 비밀을 안 사람들

"성도들에게 이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도'란 창조와 타락, 구속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A. 비밀스런 영광

그리스도인은 이 '영광'을 맛 본 자들이며,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불행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음에서 오는데, 이것은 대부분 '욕심'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욕심'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B. 이방인 가운데 풍성함

"그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셨다"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되기 위한 종자씨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누구든지 다른 제물이나 사람의 중재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라도 말입니다.



III. 그 비밀, 그리스도


A. 그 비밀이신 그리스도

인간은 누구나 세계와 역사와 인간과 종말에 얽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적용하여 사는 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나눌 소명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바꾼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여기에 눈을 뜬 바울은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루에 한 번 쯤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종교적 체험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B. 그 소망이신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5절)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며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게 아니라,

죄와 슬픔 많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누리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열린교회에 대해서 지나친 자부감이나 동일체 의식을 갖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교회를 위해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몸인 교회, 그 몸의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 가장 무섭습니다.

(교회안에서의 싸움) 이렇게 되면 

교회의 고유한 사명을 위해서 헌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남겨 두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실 수 있지만,

교회에는 그 이후에 주님을위한고난을 남겨주셔서 교회의 일을 섬기게 하십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잘 살기 전에 잘 죽어야 합니다.


두터운 무지, 이 무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상보다 무지를 쫓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일평생 다하도록 마귀 다음으로 미워해야 할 것은 '무지'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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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 9.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6.   성도에게 나타난 비밀.  김남준 목사님


골 1:26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I. 본문해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사도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비밀스런 경륜은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II. 오래 전부터 감춰짐


'만세와 만대'


A. 오랜 동안 감춰짐

'시대들과 세대들로부터'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입니다. 

세계를 향한 경륜이 영원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드러난 것은 창조 이후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지성안에 가지고 계신 경륜이었습니다.

현재완료분사로 사용되어졌는데, 

이것은 언젠가부터 감춰졌고 계속 그렇게 감춰져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진리는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그것때문에 고민한 사람들에게는 감춰졌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이런 질문을 하지만 

그 답을 분명하게 찾아내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레떼의 강, 강을 건너면서 물을 마시고 망각하게 되어 영혼에 대한 개념을 잊게 됩니다. 그 강물을 적게 마신 자들은 육체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을 좇지만 영혼의 기억이 조금씩 남아서 알지 못하는 그곳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교인이나 무당이 된다고 합니다. 많이 마신 자들은 육체만을 위해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때문에 영혼의 고향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B. 비밀스러운 경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이 세계가 필요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쓸데없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이유는 그분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으로 인해

흘러 넘쳐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 행복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복이라면 아니겠지만,

그 행복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라면 그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가르쳐주고 싶어했습니다. 그 '문'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비밀스러운 경륜의 '열쇠'였습니다.



III. 성도들에게 나타남

'그의 거룩한 자들에게' 


A. 그의 성도들에게

'그의 거룩한 자들에게' (카도쉬:거룩한)

속된 것에서 잘라져서 거룩한 곳에 덧붙여진 것,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하실것이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처럼 온전하게 하실 작정 속에 있습니다. 


손 끝의 살 점 하나가 떨어졌을 때에도 온 몸이 그 부분을 위해 아파하고 돌보기를 힘쓰는데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가슴 저미시는지를 생각해보게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이 경륜을 이해한 사람들이고,

영적으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얼마나 탁월한 지위입니까?

수많은 철학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 이 경륜을 깨달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께 접붙혀 은혜아래 살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B. 밝히 나타남

'이미 모든 사람에게 밝히 보일 수 있게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무신론자), '똑똑함'이라는 '어두움'이 그를 덮고 있어서 어떤 복음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펼침을 위한 씨앗이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접고 접으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세계와 하나님과 우주와 인간과 모든 비밀들이 그리스도 예수 한분의 인격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아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비밀이고 거룩한 성도가 되는 비결이며

그것이 펼쳐진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륜을 알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탕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또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렇게 드러난 경륜의 비밀을 붙들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 때, 들풀처럼 사라질 여러분들의 인생은 영원을 잇대어서 사는 의미있는, 살아도 영원히 죽지 않는 성도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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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5. 교회의 소명과 일치

 

골로새서 1: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I. 본문해설

 

우주적 경륜 안에서 사도됨을 고백하는 바울원문으로는 " 그것(교회)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그 경륜을 따라 한 일꾼이 되었는데 그 경륜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너희 속으로 나에게 주신 것이다." 입니다.'직분'이 아니라 '경륜'으로 보아야 맞습니다. 

 

 

II.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심

 

A. 일꾼으로 부르심(디아코노스, 일꾼)

 

바울 자신도 교회의 봉사자임을 밝힙니다.내가 구원받을 때도 모든 형제들이 '거기' 몸의 지체로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에서 무위도식의 피해자는 바로 본인입니다.

 

교회가 온전한 몸이 되기위해서 부여받은 나의 역할(일,소명)은 무엇인지 물어보십오.

 

B. 신적 경륜을 따름('직분'이라는 번역이 아닙니다)

 

"오이코노미아" 는 남편(가장)이 가정을 잘 통솔하여 당시 로마에 적합한 사람들(가족)이 되게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청지기를 의미하고, 하나님과 관련되어서는 '경륜'을 의미합니다.

 

'그 경륜'은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 창조때의 의도하신 영광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계의 부속들은 각각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시간을 가리킨다'는 큰 목적을 위해서 모두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적인 경륜 속에서 나에게 주신 개인적인 경륜이 있고, 그것에 살 때, 영원에 잇댄 삶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III. 교회를 세우신 경륜

 

A.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하나님의 일을 이룸)

 

인류를 사랑의 공동체로 부르셨지만, 죄로 타락하여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다시 하나님의 경륜을 보이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이것은 그림자이고 신약의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라는 것이 그 가치입니다.

 

그 경륜을 모르고 '창기의 지체'로 살기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철학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우주와 직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세기 로마의 상투스라는 성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모든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최후에는 불에 달군 쇠 의자에 앉혀져 죽어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무지"의 어두움은 악, 죄입니다.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무지의 어두움에 대한 미움이 없고빛에 있기보다 무지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B. 목회자와 성도의 연합

 

"너희를 위하여"가 아니라 "너희 속으로" 입니다.

 

단기적으로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신자들간의 연합으로..

 

예수 안에서의 사랑과 소명은 연합으로 인해 하나의 소명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 속으로 들어가서 일치를 이루어 소명을 이루는 경륜입니다. 

 

(목사님 개인적 이야기 - "학생"의 일을 못할 만큼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

 

교회의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일치를 말합니다.(하모니)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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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0.가을말씀사경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4
육체에 채우는 고난

I. 본문해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 뒤의 고난, 교회에의 고난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혼자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시지만 몸된 우리들은 불완전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하셨지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자녀들은 완전하고 순결한 영혼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개인적인 성화가 총화를 이루어 교회의 거룩함이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II. 육체에 채우는 고난

이것을 단순하게 '감옥살이, 고문'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고려해본다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A. 육체에 채우는 고난
'채우다'는 바깥에서 넣어서 채우는 의미가 아니라 안에서 차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사르크스)'는 '죄와 무관하거나, 죄와 관련지어'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죄와 무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죄에 중립), 죄에 물든 육체.
여기서는 죄에 오염된, 옛사람의 성품, 육체를 말합니다.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머리는 못느낄 수가 없습니다.
손발이 잘려 없어도 머리에서는 그것을 있다고 인식합니다, 
(잘린 손발의 간지러움을 느낌.)

중생, 회심한 신자에게 절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교회의 아픔을 전달시켜 느끼게 하십니다.
이때 성도들은 더 거룩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어 교회가 더 거룩해집니다.

아무리 나쁜 신자라도 회개하는 신자는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회개하지 않는 신자보다 낫습니다.
회개하는 신자는 하나님이 공사중인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채움은 '육신적인 성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III.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실재화

예수님의 죽으심은 완전하여 두번 다시 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이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실재화입니다. 

충청도의 구원파 성도들이 모여서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내린 결론,
"이 목사는 구원받은 것 같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하게 보여도 
예수님의 구속과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이 아니라 '뒤에 있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이 우리 안에 가득 차면서 옛 성품이 죽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 고난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그것이 '한'이 되기도하고 '연단'이 되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십자가(순전히 예수님때문에 받는)와 상대적인 십자가

A.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교회 안팎 어디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암에 걸려도 그것을 놓고 기도하다가 새 사람이 되어 
주위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과 환경 너머에 있는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B.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함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리스도'를 묵상해야합니다.
내가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게 느껴질 정도로 아직도 내 속에 있는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죽음의 의미를 내 속에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이 때 열렬한 기도가 나오고, 죄된 자신을 정죄하게 됩니다.

C. 성령으로 육신을 죽임
(텐트 안의 큰 뱀과의 사투 비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행실 하나하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실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 뿌리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D.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
이렇게 육신이 죽고,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연합이 일어나고 
사랑이 그리스도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볼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교회를 사랑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심리적 사랑(아름다운 면을 보고 사랑함), 
성향적 사랑(아름다움이 적어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사랑)

교회에 대한 심리적 사랑은 타인에게 '교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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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9. 가을말씀사경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3
그리스도인과 남은 고난

I. 본문해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교회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과 기도제목들 중 얼마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대부분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가장 유익을 누리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온전해짐은 교회의 온전함과 연결됩니다.
즉,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나를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실 은혜를 나에게 흘려보내주신 것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소명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소명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무슨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동기로 하느냐, 
어떤 사람이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소명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고
신자의 소명은 신자다와지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인해 오해되기 쉽지만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속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들, 그 뒤에 있는 것, 그것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속에 채우노라"(원문)
즉,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똑같다면 그리스도의 

A.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성육신하신)
홀로 당하신 고난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습니다.
어쩔수없는 죽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고난과 죽음입니다.
일회성이 아닌 영원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홀로 당하셔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홀로 지게하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구도 나눠질 수 없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십자가로 가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마음을 보여주시고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도 보여주시고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해서 당하신 고난에는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모자라게 당하신 고난도 없으십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몸으로서 교회는 불완전한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의 죄와 불완전함 때문이고, 
그로인한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고난이지만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겪어주시는 고난입니다.

B. 교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
교회, 성도가 박해받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기가 받는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만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교도들, 불신자들이 받는 고통까지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이라고 생각하시고, 이것은 선교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보시면서 눈물훌리시는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마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교화'를 위해서 이십니다.
이런 일들은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더 닮아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비례합니다.

교회를 이런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은채 주일에 교회에 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설교자의 재능을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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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가을말씀사경회 둘째날.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2

I. 본문해설

어제, 너무 오래해서 오늘 할 것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성도가 한 몸임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뿐 아니라, 
먼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은 무지 속에서 번성합니다. 

예수를 믿고나서 믿기 전보다 행복해졌습니까?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할 때 그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있지만 그 생명이 공급될 때 활발한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II. 주의 몸을 위한 고난이 있음

A. 교회 밖으로부터
교회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싫어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이 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받는 박해는 이런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허물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사상이 구분이 안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효과적인 전략이 성공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전쟁은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도가 이 세상과 싸워서 파수해야 할 사상이 있습니까?

세상과 다른 윤리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핍박일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윤리가 아니라 '거룩함의 열매'를 성경은 말합니다.

탈세, 무자료, 누가 정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럽사람은 살기위해 일하고
미국은 일하기 위해 일하고
한국은 일하기 위해 산다.

이 세상은 모든 부분이 틀어져 있습니다.
사회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것이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것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될때마다,
자신은 덤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B. 교회 안으로부터
접붙여진, 이미 생명을 얻은 것은 완전하지만, 
그 몸의 지체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1) 무지. 무식해서 오류가 남아있습니다. 
신령함, 사상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악에 대담해지고 선을 행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2) 사랑의 불완전함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은혜가 떨어지는게 아니라, 일부는 은혜롭고, 일부는 그렇지 못해서 입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이 '갑', 은혜받는 사람이 '을'입니다.
그런데 이 '갑'은 행복한 '갑'이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기때문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아프면서도 기뻐하여 '을'로 남고 싶어합니다.
3) 분쟁때문에 
이기심 - 자기의 이익에 집착합니다. 자기 사랑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 사랑이 깨어져야합니다. (자기 깨어짐)
이기심은 몸 전체에 사랑이 없게 합니다. 
적당한 입맛은 감사하지만 점점 더 하면 몸에 해로운 음식까지 찾게 됩니다.
잠시뿐인 혀의 즐거움때문에 몸 전체의 해를 불러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관점의 부재 -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도다'

신앙의 행복은 영원한 복락을 현실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III. 영적인 몸으로서의 삶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였든지 간에 그것은 몸 전체가 한 것이고, 
내가 무슨 악한 일로 교회에 고통과 분쟁을 주었다면 몸 전체에 해를 가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는 '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백화점처럼 모든 것을 교회가 주려고 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일,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접붙여지는 일을 해야합니다.

신자의 운명은 교회와 함께하고,
교회의 운명은 그리스도께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안에서 맺힌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불완전함으로 고통을 당하신 것처럼 
몸의 지체인 우리도 함께 고난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로운 연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과의 연합도 신비로운 영적인 연합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심정을 전수받고 우리도 고난을 이길 힘을 공급받으며 
몸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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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가을말씀사경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골 1: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I. 본문해설

  

골로새 교회를 격려하려는 바울의 편지(옥중서신)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기록, 우주적 기독론을 담은 서신(에베소서는 교회론적으로 기록)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애정을 담은 서신.(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주석을 쓰고 싶으신 목사님)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문제를 왜 생각해야합니까?교회론과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분명해져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정체

  

너희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너희'는 14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얻은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A. 속량, 곧 죄사함을 얻은 자

  

그리스도인은 죄인이었다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속량(속전)'으로 말입니다.

  

노예를 사고 파는 곳에서의 "속량". 노예를 팔고 사는데에 지불되는 값. - 죄의 노예에 팔린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속전을 주고 속량하신 하나님.

  

완전한 속량, 어떤 대가나 공로를 약속하고 지불하는 것이 아닌..속량받은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 성령의 축복, 미래의 생명의 약속, 생명과 사랑의 교통, 교회에서 누리는 복락들... 주님의 속량때문에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나를 속량하신 감격이 있으면 옛날에 받은 구원의 은혜가 옛 것이 아니라날마다 오늘, 지금의 그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속에서 사는 것)

  

B.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김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권세(엑소시아)'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것입니다.'어떤 것을 명령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적 트럭을 세우는 경찰이 가진 '권세')

  

'흑암' 사상적인 어두움(무지함, 모름, 속이고 겁주기에 좋은 사람,                         욕망이 맘대로 그를 휘둘리기 좋음, 수은을 먹고 죽은 진시황, '무지'가 '권세'를 형성하여 그를 망하게 함)--> 예전의 "나"  윤리적인 어두움(무지의 어두움안에서 어두움에 적합한 일을 하는 것,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보는 눈에 안질이 있으면 그것이 아름답지 않고 괴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구원파는 죄가 별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편리함을 느꼈습니다.

  

C.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하나님의 이 세계를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구원 뿐만이 아닙니다.창조, 구속, 완성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창조하셨을뿐만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계십니다.그래서 '학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로고스가 만물에 깃들여 있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세상의 지식을 무시하듯 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것입니다.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발견된 지식에 해석을 넣어서 가치관을 만들어내는데,거기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없기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학자, 신자들은 학문을 더 공부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만물의 끊어짐으로 타락한 세계 속의 무질서에는 탐욕이 들어있습니다.이것을 하나님께서 고칠 작정을 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접붙이시고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지금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지만,마지막 완성의 때에는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수와 인간과 화해, 자연과 화해하는 법을 지금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한 선취적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몸에 접붙이심을 생각해본다면,"내가 구원받았을 때, 나의 형제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실선 바깥에 있던 내가 점선으로 이어져 실선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III. 몸을 위한 괴로움에 참여함

  

24절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은 골로새 교인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으로 투옥되었지만,이것은 개인의 괴로움이 아니라 예수의 몸의 괴로움, 사도 바울 뿐만아니라골로새 교인들도 예수의 몸이기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한 것입니다.

  

'괴로움'

  

A. '겪음' : 피동적 고난(괴로움)

 

 

세상과 다른 신자의 상태때문에 겪는 피동적 고난(괴로움)입니다.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없는 이유는 끊임없는 타협과 변절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괴롭힐 의지가 없지만 그가 존재하는 것이 세상에는 괴로움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괴롭히고 고난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기뻐할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일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절대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 겪음이 감사한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겪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형제들의 불완전함은 구분이 되질 않아서 함께 겪는 것입니다.그것을 떼어내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는 날까지 고통을 받게 되지만,세상의 고통은 고통만 있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고통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게 아니라 고난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는 팔아먹으려는 사람,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 개념없는 사람들, 또 바깥에는 예수님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안팎의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지금도 계속되는 고난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도 교회가 있지만 교회 안에도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된다는 것은, 이 모든 그리스도의 몸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그 몸의 세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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