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새물결플러스)

What Shall We Say? Evil, Suffering, and the Crisis of Faith


'신정론'은 '하나님의 옮음을 인정하는 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보았을만한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물결플러스 김요한 목사님 덕분에 읽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들(악, 고난, 신앙의 위기까지)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닥친 어려움(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서는 절망, 또는 삶을 포기하게까지 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서 저자는 오래 수 백년 전부터 있어왔던 대답들과 세월을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답변들, 그리고 당연히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까지 가지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것인지, 늘 옳으신 것인지, 전능하시다는게 사실인지, 혹시 수많은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컨트롤할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신지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얼마전부터 교리학교 강의가 진행 중이라서 '신론'에 대해서도 듣고 배우고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불분명하고 희미하게(한편으로는 어느정도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 인용한 다른 사람들의 신정론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들은 또 다른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그려보게 하였다.



4장과 5장 사이이의 '간주곡(울부짖음, 욥과 폭풍우)'에서,


욥과 친구들 간의 차이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종교적 체계를 사랑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친구들과 달리 욥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신학을 버릴 용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69 


"주님, 왜 저입니까?"에 대해 이 책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대신 욥기는 더욱 심오한 질문, 결국은 더욱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 인간의 고통이 불굥평하다는 판단을내리기 위해 도덕적 질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도식, 즉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도식을 하나님과 맞바꾸기를 원하는가?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인간으로 기꺼이 나아가겠는가?" 바로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무게에 준하는 결단이다.   175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 주신다면 자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178


신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가 실제 겪는 일들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다른 면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또는 '오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상황에 맞는 다른 하나님의 이미지로 '수정'하는 일을 통해서 역시 다른(옳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계속 생겨나게 되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나 하나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쉽게 다가가게 한다.


'이성'으로 이해한 후에 '신앙'을 갖는 것보다, '신앙'으로 걸음을 떼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겨자씨'로 인한 큰 나무와 '한 줌 누룩'으로 인해 부풀은 반죽 덩어리를 보는 길이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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