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2월 09일  팔복의 사람 12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김남준 목사


마 5:7   

 

팔복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성품입니다.

인간의 덕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주체라면, 


1.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


불변하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지금 완전하시다면, 예전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므로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전에 가지신것을 지금은 안가지고 계시다는 것도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특정한 상황이나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만 사랑을 나타내신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신자에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야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때문에 우리가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시기 이전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구원의 은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우리에게 그런 죄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입니다.


요즘의 세상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뭔가 모자라게 보이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비참한 처지에 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도록 그리스도인을 부르셨습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자들의 행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부른 노래(창세기)는 자신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와 해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 라멕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포악과 무자비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받은 것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매일매일 이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누구든지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긍휼을 입으며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나는, 눈물없이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위한 기도가 막힌듯한 느낌일때, 나보다 비참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로 시작해보십시오. 그때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긍휼이 필요없을 정도로 비참하지 않은 영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우리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은,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도저히 보실 수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 길에

길 잃은 양 한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여러분들이 주님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살아서 무자비한 이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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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2.주일 팔복의 사람 1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I. 본문해설


세상의 정의 추구 방식은 긍휼을 배제합니다.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어서 이 "긍휼"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의의 실행 방식을 보여주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공의"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긍휼의 사랑"인 것입니다. 


II. 긍휼히 여기는 자


A."긍휼히 여기다"의 의미

1) 하나님께, 긍휼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동기입니다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디도서)"

    긍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근거 입니다. 

2) 인간에게는 이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로서 인간 상호간에 긍휼을 가지고 대하도록 요구하십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와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 "...너도 불쌍하게 여기는게 마땅하지 아니하냐..")


B. 사랑의 속성 중의 하나(그렇다고 해서 이 세가지로 사상이 구성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1) 오래 참음 - 원하지 않는 그 질서를 고통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비 - 남에게 베푸는 친절과 호의입니다.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라며 베푸는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긍휼 - 타인의 현재적 비참을 공감하는 것이며, 그의 그 고통이 속히 제거되길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은 "엄마"입니다. 

고통의 원인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 고통이 그에게서 제거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III.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그의 질병의 원인이나 죄의 근원을 중요하게 보지 않으시고 그의 "비참"을 보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오고 돌로 치기 위해 모인 자들에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죄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희미한 긍휼의 그림자를 "엄마"에게 주셨고, 이것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탕자의 아버지 입니다.

슬픔을 동반한 사랑, 눈물을 머금은 사랑, 마음 속에 피눈물이 절절히 흐르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냥 서로 마냥 좋고 즐거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두가지 질문.

1) 최근에 내 잘못으로 겪는 고통과 비참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2) 주변에 그런 고통과 비참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내 고통처럼 여겨서 내 품에 쉬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과 긍휼을 하거나 베풀어 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늘 이 마음에 새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무한히 빚진 자이며, 이것을 베풀며 사는 것이 빚진 자의 삶입니다.


사람이 외로운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랑을 하지 않아서 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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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1월 26일  팔복의 사람 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김남준 목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



1.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


2. 의를 추구하는 자의 만족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림과 목마름에 만족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우주적, 종말론적 만족


- 하나님의 뜻이 계속 펼쳐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주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인간과의 원수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일은 인간 세상에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인간과 짐승,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서도 화목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의의 완전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B. 국지적, 현재적 만족


- 오늘날에도 미래의 만족을 부분적으로 누리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마귀의 잔존하는 세력이 남아 있기에 세상을 이길 자원과 힘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살려두시고,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전하여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 그 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을 주십니다.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철저히 폐쇄적인 중국에 출판이 허가 된 "게으름"과 "새벽기도". CRTS 학생이 출간사를 차려서 심의에 신청하여 통과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주는 상처는 남지만, 하나님을 위한 상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의 위로와 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배부르지 못할 양식을 구함


-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의 욕망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고프고 목마르지만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도, 자아도 아닙니다.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렇지 못한 세상의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만족, 배부름을 주시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를 만족시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만족으로 얻은 힘으로 다시 세상에 항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주님과 평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 사람이 많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내게 없기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상처를 받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취한 욕망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의해 거절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세상에 아부했고, 자기 사랑을 꺾고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대신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번영의 길을 예수의 힘을 입어 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얼굴에 침뱉은 세상의 입에 어떻게 입맞출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신앙의 마지막 숙제는 어떻게 사랑을 올바르게 하느냐 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완전히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도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티끌같은 나를 통해 티끌만큼 하나님의 의라도 이 세상에 이루어지길 갈망할 때 우리는 이미 현재적으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채우심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만족, 그리고 이 초라한 인간을 그래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동시에 체험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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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9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의 사람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1)


I. 본문해설


주리고 목마른 상황은 복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해지라고 가르칩니다. 더 소유하고더 성취하여 행복해지라고 합니다. 



II.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A."의"란 무엇인가?


의는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를 가진 단어 중 하나입니다. 

마6:1에서는 경건함으로,

행24장에서는 심판의 정의로,

갈 2장에서는 바깥에서 덕을 입어 올바르게 됨으로

마 27장에서는 책망받을 것없는 무죄, 순결의 상태 등으로 표현됩니다. 


1.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상태의 의(성경>모세오경>십계명)

율법은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규울하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율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이런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은총에 덧 입힌 상태의 의(율법에 충족되지 못하는 의 때문에 필요합니다)

시32편의 죄의 사함을 받고 허물에 가리움을 받은 자의 복이라고 표현 됩니다.


3. 대속에 덧 입혀진 상태의 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긴 율법을 인해 받은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셨습니다.


위의 세 가지 의에 대해서 갈망을 가지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B.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그 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덧입혀진 상태에 모든 사람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위의 1번에대한 해결이 되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이 새로 태어나서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껍질만 하나님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내용까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의롭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특히 복음전파에 대해서 그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에서 어그러진 세상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거나 눈물흘리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거룩해지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바쳐서라도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만족을 얻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라고 기도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쳐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누룩과 소금과 빛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이 살아있는냐 그 말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빛보다 어두움이 크고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을 살려두신 것은 이 세상을 티끌만큼이라도 나를 통해서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마음속의 "욕망"으로 입증됩니다. 여려분의 마음에는 어떤 "욕망"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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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3 주일 팔복시리즈 2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가르치신예수님
육신의 배고픔과 병고침으로 끝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인 영혼의 필요를 채우시고 고치시기위해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자원으로는 하늘로부터의 것을 대신하거나 채울 수 없습니다.

2. 입을 열어 
진리이신 예수님은 입을 열때마다 그 진리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진리가 가득 차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진리가 있다면 완전하진 못해도 그렇게 진리가 입을 통해 전달될 수 있어야합니다.

3. 말씀
진리를 전하는 불변의 수단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드라마, 영화 등의 다른 것으로 설교가 대신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입의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진리의 전달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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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주일 팔복시리즈 7  온유한 자의 복(1)

온유함은 '줏대없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온유는 자기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일들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온유였습니다.
온유는 타고나거나 환경에 의해 되어지는 성품이 아닙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온유하셨지만 때로는 무섭게 책망도 하셨습니다. 
온유는 신령한 성품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의 성품인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성화의 결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은 온유보다 전투, 투쟁, 호전적인 성품을 요구합니다. 
자녀들에게 경쟁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친절하고 여유로운 태도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거룩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죄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의 복음으로 온유하게 된 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온유함, 
칼보다 피와 눈물을 택하신 주님의 온유함을 기억하십시오.

- 나도 이 온유함을 갖도록, 주님의 온유함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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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7)  하나님이 낮추실 때    


욥기 22: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I.본문해설


29,30절은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충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려야하고 떠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II. 낮추시는 하나님


"understand" 는 낮은 자리에서 서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낮추시는 이유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쉽고, 부패하면 반드시 그 자리,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리를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끊임없이 낮추시는 역사가 없으면 인간은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때로는 마음을 때리기시기까지 하십니다. 

"말씀"에 집중하게 하시려고 상황을 흔드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B. 사람을 통함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모욕, 배신을 당할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III. 하나님이 낮추실 때.


A. 교만함을 고백함


삶의 태도를 고치며 성실하십시오.

일반적인 어려움에는 "자신"이 할 일을 하십시오.

일 자리가 없으면 일을 구하기 위해서 부지런하고 성실하십시오.

특별한 어려움의 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아무 때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으름과 불성실함을 버리십시오.


낮춰야할 만큼 높아진 마음은 불행한 마음입니다.


B. 겸손한 자를 구원함


겸손은 거룩한 하나님을 의식하고 회복을 위해 낮아짐이지만

비굴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낮아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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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7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6).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욥 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I. 본문해설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신자들의 복된 삶의 절정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존 오웬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사는 성도의 인격. 이 두 가지를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II.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A.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기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어보려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것, 이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은 바꾸시지만 뜻을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 우리의 소원을 사용하십니다.


요 15:7 너희가 내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에 주목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하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 생명이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관심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주님이 하실 일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주님이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네 원하는대로 될 것이다'라고 속이지말고 속지 마십시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나쁜 건강상태에서 

WRTS 개교, 두 권의 책이 중국에 출판, 기념으로 독자들과 만남을 위한 중국 방문.

어렵게 ISBN(국제서적번호)을 받고, 정부 출판국(시중에는 유통가능하나 국가 설립기관에는 못들어가는 것)의 허가까지 받아서 출판됨. 이미 책을 읽고 온 100여명의 독자들과 질문과 토론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심.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믿음을 가장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자기의 뜻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B.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길" 일반적인 길도 의미하지만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시력도, 좋은 길도 필요없게 됩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길은 복수입니다. 즉, "네 인생길들 위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생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수많은 갈래길들을 지나오게 됩니다.


요동치는 삶의 한 복판에서 불변하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빛"은 등불과 함께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이 진리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III.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거기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언제나 겸손하며 언제난 하나님을 갈망하며 동행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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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1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5)  네 기도를 들으실 때


욥기 22:27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최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다면 활발히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II.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을 기뻐할 때


이 기쁨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기쁨의 하나님 이십니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람은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활동이 활발할 때 기도하기 쉽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며, 영혼이 하등한 기능에 활발하면 고등한 기능인 기도가 방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만나던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 기도를 들으실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련, 고통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문이 닫힌 사람입니다.



III. 서원을 갚게 함


침체된 영혼의 기도에는 자기 사랑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의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이 가장 크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원의 이행은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번잡한 일상 생활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유지하십시오.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예수님은 분주한 삶 속에서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자녀들에게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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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0.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김남준 목사님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는데에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A.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지음을 받다" 티바네, 바나 동사의 수동형. '세움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번역됩니다. 

마음과 삶, 내면의 세계, 이것들이 무너진 삶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삶은 다른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레쥬.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가 제정신일때 투신하여 죽은 사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상태가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


무너진 삶으로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중심에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플라톤이 꼽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네 가지는,

지혜, 용기, 욕망,정의였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했습니다. 회개나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할것을 분별하는 것,

용기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 있는 것,

정의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욕망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지하며 가치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억제하는 것입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무너진 삶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킴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서 이탈했는지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전하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를 찾고자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A. 전능자에게 돌아감


'전능자'는 히브리말로 '샷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의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쳐부수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을 큰 힘으로 쳐부순다로 봅니다.

둘째는 '충족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

셋째는 가장 가능성이 큰, '모든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본다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한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불의를 멀리함


'아벨라'는 '불의, 사악함, 불결,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이 불의를 버려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며 불의를 멀리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은혜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런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 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에도 뭔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어서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위기를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칡뿌리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벼랑에 떨어졌는데, 운좋게 칡뿌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칡뿌리를 위에서 쥐 두마리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꿀송이가 있어서 꿀이 한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꿀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위기를 잊고 살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왜 설교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느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번 눈물을 흘리면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겠느냐"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울지 않겠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부르짖는 사람 가까이로 하나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 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걸어가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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