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시리즈 5   애통하는자 (1) 마 5:4

애통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보이는 첫번째 반응입니다. 
"애통"은 고통받고 슬퍼하는 모든것 을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펜둔테스. 펜데오 에서 온 단어. 슬퍼하다, 죄를 확신하여 슬퍼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슬퍼하다)


A. 애통하는 이유 두 가지는,

1.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죄의 상태를 발견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주님의 통치아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그것을 대항하는 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싶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것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애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 마음이 가득하여 눈물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회개의 은혜는 언제나 죄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다윗은 범죄 후, 자신의 하나뿐인 소망인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경건의 죄에대한 회개로부터 나오고, 진실한 회개는 애통하게 만듭니다.
'애통'은 자신을 향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희망'을 갖게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름답게 보시는 두번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때,
두번째는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하게 뉘우치는 때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해서 나의 허물과 죄가 크다는 이유때문에 진실하게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한 사람이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가는 좋은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탁월하게 좋은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언제나 생명에 이르는 문입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분의 생애는 애통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신 기록은 없지만 우신 기록은 세번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고 꿈꾸는 세상과, 현실의 세상사이에서의 갈등이 느껴지셨고 그것이 애통으로 나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의 기록은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길 바라셨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때문에 애통하셨습니다.

'시편119:139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에서도 시인은 같은 이유로 애통합니다.

이 눈물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그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이 눈물이 그치고 위로가 되겠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령한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은혜와 은총만이 아니라, 그 은혜를 따라 살아야할 그 무엇이 따릅니다. "소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무위도식할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이웃을 위해서 어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며 울부짖는 기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삶은 기도의 초점과 일치할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게 되고(그 삶을 살게 되고)
기도는 삶과 초점이 맞을 때에 열렬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불꽃처럼 기도하게됩니다)

"평탄하고 그저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의미가 적은 인생을 살것이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가 사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라도 의미가 큰 삶을 택할 것이냐.."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정을소중하게 생각하라"

무엇에도 도전받지 않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목표도 없고, 불타는 마음도 없는 것은 사실상 영적인 식물인간의 상태입니다.

아직도 애통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나같은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어디에 쓰시려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드셨나요,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B.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 위로.
"호티" 왜냐하면, 반드신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파라 칼레오)는 "옆에서 부르다"라는 의미로 '보혜사'(파라 클레이토스, 옆에 있어서 스승처럼 가르치시고 부모처럼 도와주시고 변호사처럼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성령님)와 같은 어원입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옆에 계셔서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변호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처럼 중보자적인 일 하십니다.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 앞에서 어쩔줄 모를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로의 은총'이 베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언제나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고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질때,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지 않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도우시고 가르치시고 변호하시는 것' 이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강하게 나아가는 데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이 두 가지가 그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인함과 연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이 두가지는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런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의무"를 달콤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되니 겁낼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후)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을 어찌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이 있기때문에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가능성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지켜주시니)

주님의 사랑이 내 맘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기쁜 일 만날 때 주님께 감사하고
슬픈 일 당할 때도 주님을 찬양해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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