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1:15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4. 3. 2. 1 '

4.   네 번의 "엔 푸뉴마티" - "성령 안에서"
  1:10 일곱교회의 환상
  4:  2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의 환상
17:  3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상
21:  7  천상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영화로움

3. 세 가지 심판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

2. 두 개의 성
     큰 성 바벨론 성과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
 "바벨론 성" -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 "큰 것" 그러나 그 멸망은 "한 시간", 순식간에 멸망한다.
 "예루살렘 성" -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 교회가 추구할 것. 성도가 추구할 것.

1.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
    왕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말씀

- 요한 계시록을 보고 싶게 만드는 한 번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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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1.  오후. 섬김의 본이 된 디모데.  김성구 목사님


빌립보서 2:19~24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빌립보 교회를 지극히 사랑한 바울은 직접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대신 보내고자 합니다.


본문을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읽게 되면,


왜냐하면, 너희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왜냐하면,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그러므로... 이 디모데를 보내기를 바라고..


이렇게 됩니다.


진실로 성도들을 생각한 바울.


20절 - 뜻을같이하여

21절 - 자기 일을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구한..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라.

22절 - 연단받은 디모데


연약하고 심약하고 이단이 많은 곳에서 어렵게 목회한 디모데,

'연단'(도키메)은 "시험을 통과하여 입증한, 증거" 라는 뜻입니다.


시련과 환란으로 단련되어 입증이 된 디모데는,

1)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교회, 목자, 성도.

2) 복음을 위해 '수고'했다.

   - '수고'는 '종이 되어 섬기다'는 '둘로스'의 뜻입니다.

      즉 자기의 것이아닌 주인의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지고 가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 내 기억속에서 잊혀져도 주님의 기억에서는 한번도 잊혀진 적이 없는.. 아웃리치..

주님께서는 아웃 리치에, 디모데와 같은 이런 사람을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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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01일  주일.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이성호 목사님


요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떡, 음식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먹고 즐기고 만족하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음식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을 얻을 때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합니다.


본문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배부르게 하시려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단지 허기를 충족시켜주시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삼으려는 사람들을 떠나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본질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일들에 관해서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등은 예수님의 말씀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표적을 보고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그 놀라운 일이 가리키는 의미를 수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영적인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쁨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이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은 떠나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뭔가 잘 보이면, 지금은 힘들지만 뭔가 하나님 앞에 잘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섬기고 따른다면 그들과 예수님은 함께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보지 못하는 세 가지.

1. 예수님의 능력은 죄인들을 위해 사용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2. 예수님 자신이 그들의 떡 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신 것과, 예수님 자신이 떡 이신 것을 연결시켜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영혼에 만족함을 주시기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시기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것에 사로잡힌 욕망을 정복하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우리의 필요를 따라 간절히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복음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길 소원합니다.

부, 건강, 명예, 권력보다 더 좋은 것,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좋은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쁨을 누리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영원한 기쁨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떡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떡이 되어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빌립을 시험하신(6절)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과연 제대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어떤 혜택을 받으셨습니까?

건강을 얻으셨습니까?

재산을 얻으셨습니까?

자녀가 잘 되셨습니까?

문제들이 해결되셨습니까?


필요를 따라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영혼의 해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고 계십니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계십니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아 아십시오.

그분 한분만이 여러분의 영원한 만족이 되십니다.


____

이렇게 말씀을 듣고, 이런 진리가 있어도,

"그럼, 예수님만 쳐다보고 살고, 밥 굶고 망해도 좋으냐.." 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하게 되면,

당연히 머리를 흔들것이다.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은 '돈'이고 '번영'이라고...

예수님도 그걸 기뻐하신다고,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다고, 결국 돈이라고..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삯꾼 목자의 강단에서 하는 말을 직접 들은 것)


예수님을 잘못 보고 있고, 그래서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 단지 돈과 필요들을 채워줄  "임금"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은 지금도 떠나신다.


나는 예수님은 어떻게 보고 있고 왜 따르고 있는가...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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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오후 마태복음 8:18~22   박현철 목사님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이 나타납니다.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나고 그 후에 "그 무엇"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나고 "그 무엇"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세번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그 무엇"은 바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입니다.


1. 서기관


본문에 나타난 서기관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으면 사람들에게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은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2. 제자 한 사람


제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제자의 복입니다.



국내, 해외 아웃리치를 앞두고,

서기관처럼 "준비"없이 그저 끌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제자처럼 자기를 부인한 없이 제자같지 않게 하지는 않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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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금요.   십자가로 돌아온 사람.   요 19:34   김남준 목사님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상세하게 확대해서 보여주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십자가에서의 세번째 말씀, 이 말씀은 요한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베드로는 멀찌기 뒤따라가며 보는 기록들이 나오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거기서 세 번 부인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때에는 요한이 홀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길로 갈수만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존재로서 충성스러울때도 있지만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 조차도 이렇게 미끄러질 수 있었다면 우리가 미끄러지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요한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두려워서 도망갔지만,이 때는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누군가 요한을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라고 신고하면 그도 잡혔을지도 모르지만

요한은 그런 두려움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한은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죄인의 괴수라고 인정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당시에 요한은 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했는지, 지금의 여러분들 보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요한이 부활의 소망을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그 십자가 아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도 모르고, 의미도 몰랐지만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에 주님을 홀로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없이, 그리스도의 용서 없이 견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끄러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예고하시면서도 그 일 때문에 상처받으시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요한을 기쁘게 받으셨고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세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금도 서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십자가에는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계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난 때문에 당신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위에서 떨어지는 피를 맞으며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주님보다는 목숨을 더 사랑하여, 혹은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다면 속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시 주님을 버리기 전에 이미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여러분이 돌아올때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십자가앞에 돌아와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성 금요은 Good Friday 인데, 이것이 예수님께 good 이 아니라 우리에게 good 인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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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금요일 김의현목사님. 막 1:1 시작되는 복음.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 정말 십자가의 피가 뚝뚝 흐르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그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 세상사람들이 날마다 부르짖는 성공이나 비전보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이나 희생이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나 예수님따라 살리라", 날마다 예수 닮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태도, 내 인생 전체가 예수님께 달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내 부끄러운 과거를 주님앞에 내어놓고 더러운 피가 흐르는 유출병걸린 성경의 여인처럼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나를 만져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몸에 더러운 피가 흐릅니다,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길 원합니다"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영적 무지와 교만한 것들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자기의를 붙드는 사람들을 오늘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서운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 바깥에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잘못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잖아요,
정말 잘 살려고, 예수님 처럼 살려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고 포기하며 살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으니까 나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데도 어느순간 언뜻언뜻 돌아보면 십자가가 없고 자기 죽음이 없고 자기 부인이 없는 그래서 복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고얼마나 마음 아플때가 많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를 열심히 죽이다보면 죄를 죽이는게 쉽다"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짜증나는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되는지 몰라도 나는 잘 안되요. 너무 어려워요.아내한테 자존심 꺾는게 어렵구요, 자녀를 위해서 시간을 쓰고, 아버지답게 살아가는게 어렵구요,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본이되게 살아가는게 어렵구요, 내안에 문득문득 일어나는 내 욕망을 죽이는게 너무나도 어려울때가 많아요.
그럴때마다 어디로 돌아가야됩니까? 어디서 출발해야 됩니까? 복음으로 돌아가고 십자가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도와 눈물과 희생과 고난가운데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복음과 주님의 십자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 설교 뒷부분만 그대로 받아쓴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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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주일 오후  신앙가정의 모범.  김찬제 목사님



욥기 1:1~5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의 특별한 의의라면,

하나님께서 길게 직접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는 성경이라는 것과,

그와 더불어 사탄이 가장 말을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이 나타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으로 시작해서 "가정"으로 마쳐지는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1. 신앙의 가정은 무엇인가?


첫째, 1절의 신앙이 있는 가장, 예수믿는 가장, 즉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성도됨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둘째, 2절의 많은 자녀를 둔 사람입니다. 자녀가 많으면 복입니다. 많은 자녀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셋째, 3절의 재산이 많은, 그것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한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넷째, 4절의 좋은 관계를 자녀들과 형제들 사이에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째, 5절의 좋은 신앙의 전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매일의 가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노동의 댓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져 주신 것입니다.



2. 다가올 고난과 시련을 대비하십시오.


"생명"의 의미, 우리가 살아있을 뿐아니라 때로는 불평할 수도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고난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인내하고 견디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것을 견디시며 그 길을 가셨지만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셔서 교회와 함께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3. 고난의 참된 의미는 "영혼 구원"입니다.


내가 고난 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 영혼구원입니다. 

욥은 고난을 당하고 이긴 후에, 마지막에 욥의 형제, 자매(가족과 친인척) 뿐만아니라 이전에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까지도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42:11)

"하나님, 도우소서, 용기를 주소서"



- 설교를 시작하시며..

설교자가 누리는 기쁨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할때와 설교를 준비하며 연구할때 깨닫고 열어주시는 은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의 영광은 설교를 전해들은 사람들의 삶 속에 그 말씀이 이뤄지고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자의 영광은, 그 들은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뤄지고 나타나서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된 자가 나중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인내하고 견디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것을 견디시며 그 길을 가셨지만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셔서 교회와 함께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33:29,30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엘리후의 말)


신자의 고난의 의미, 이런 일들이 생긴 이유...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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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 주일 오후  요한복음 21:1~15  안순우 목사님


성경에서는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난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계획하신 만남이었습니다.(마 28:7~10)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 제자들처럼 돌아가서 주님을 만나야할 "갈릴리" 어디입니까? 무엇입니까? 내일 새벽부터 한 주간 열리는 "십자가 사경회"는 그 "갈릴리" 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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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투옥되자 빌립보 교인들은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고 그들을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절망과 낙심, 실망,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며 그들은 위로하고 권면하였습니다. 이것이 시각의 차이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처한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과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시각과 태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하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다음 두가지 중 하나의 태도를 갖게됩니다.

첫째, 염려, 원망, 불평, 두려움, 자기연민의 태도입니다.

둘째, 염려와 원망,불평해봐야 도움이 안되고,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면 좋은 일이 올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두가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1.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정을 했습니다.

2. 그리스도 한분만 존귀히 되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로 기뻐했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히면서도 그 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 일이 생기자 하나님의 주권으로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기뻐하십니까?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까?

장래에 되어질 일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바울처럼 이 세가지 이유로 인해서 기뻐하십니까?


- 인터넷으로 시청하거나 다시 듣기로만 듣다가 지윤이 수련회 때문에 참석하게 된 금요예배.

지난 월요일의 교회 화재로 인해서 교육관에서 세 군데의 장소에 성도들을 나누어 드려진 예배.

바울처럼 그런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는 세가지의 태도 아니라 일반적인 두 가지의 태도.

"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찬양, 말씀, 기도시간까지 모두 두 시간동안의 예배.

제목을 나누며 합심기도 한 것만 30~40여분. 그리고 나서 개인기도 시간.


지우는 긴 말씀 시간에는 조금 집중을 못하더니 기도시간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꿇고 기도시간 내내 머리를 바닥에 대고 두손 모아 기도.

예배를 마치고 나니 기도시간에 눈물 많이 흘렸다고... 무슨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눈물이 났냐니까 형아하고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울었다고..


한시간 먼저 시작한 지윤이의 수련회 마지막날.

세 시간의 집회를 마치고 만난 지윤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전도사님의 설교 내용을 줄줄이 쏟아낸다.


이런 아이들에게 "예언의 은사"를 가르친다면서 눈감고 뭐 보이는거 얘기하라고 하고, 처음에는 잘 못할 수도 있지만 계속 하다보면 잘하게 된다고.. 대체 성경 어디에 예언이라는 은사가 처음에는 잘 안되고 틀리기도 하지만 자꾸 하다보면 "실력"이 늘어난다고 써 있는지..

말도 안되는 소리를 갖다 붙이기도 잘한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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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14 금요일 김희찬 목사님 
믿음의 경주

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모든 무거운 것 - 죄가 아니어도 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들, 취미로하는 많은 일들, sns 등등... 

얽매이기 쉬운 죄 - 크든 작든 늘 나를 넘어지게 하는 죄들..

인내로써 - 힘든 일을 견딘다기보다 마라톤에서 오래도록 페이스를 유지하듯이 인내하는 것.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 이미 이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들, 다니엘, 바울, 사도들 등등.. 이 사람들이 지금 경주하는 나를 응원하고 있다.

믿음의 주 - '주님'의 주가 아니라 저작권자, 선구자, 먼저 그 일을 행하신 분 즉, 예수님은 이 믿음의 경주의 챔피언이신 분. 그 분을 바라보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원래 뜻은 멸시하다, 우습게 여기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신게 아니라 "우습게 깔"보셨다 경주의 우승의 영광이 어떠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 임성민 형제의 추천으로 듣게 된 지난주 금요기도회 말씀. 
주일날 만나면 들은 말씀, 읽은 책에 대해서 많이 나눠주신다. "은혜받은"남자가 많아서 좋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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