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6 주일.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김남준 목사님


시편 107:19~20


I. 본문해설


고통에서 건지신 하니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또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자를 '외국인', '나그네'라고 하였는데

돌아갈 곳, 바라볼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욥처럼 애매한 고난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행복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거룩입니다.

거룩함의 펼침이 행복이고 행복의 접음은 거룩함입니다.



II. 신자들이 고통받을 때


A. 신자들이 받는 고통

고통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이고, 그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아서 잔잔한 바다일 때도 있지만, 

풍랑치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나의 순결함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없었다."

나의 불완전함과 순수하지 못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고통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져주셨습니다.



B. 신자들의 부르짖음

계시와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계시 - 공표된 하나님의 의지

섭리 - 감춰진 하나님의 의지(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고통은 절망의 원인이 아니라 기도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음'(쟈하크) - 구원을 바라는 간절할 외침.



III. 말씀으로 구원하심


A. 말씀을 보내심

우리는 고통이 빨리 끝나길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길 바라십니다.


고통을 당할 때, 기도보다 먼저 할 일은 말씀을 찾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열렬히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열렬함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기도보다 보내시는 말씀을 맞이하고 

말씀에 비추어 깨달아야 합니다.


B. 고통에서 건지심

"위험한 지경"은 원문에 의하면 "고통들"입니다.


내 안의 망가진 부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손 대실 수 밖에 없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교회의 일부분으로 있는 것이 교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지만 죄 때문에 복수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신자의 성숙함은 고통 당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생각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내가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가까이 계셔서 붙드시고,

말씀하시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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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장혜영 옮김, 새물결 플러스)

'신정론'에 대한 책을 읽는 중이라서 더 관심있게 듣게 된 주일 말씀.


아무리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완전히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고, 나의 의로움이나 '큰 잘못없음'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지를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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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주일. 김성진 목사님.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사사기 6:11~28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날마다 좇아다니는 자였으며,

아브라함은 살던 곳을 떠나라고 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고,

노아는 산에 배를 지으라고 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고,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으며,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본문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이방민족을 통해서 괴로움을 당하여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사사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하는 역사의 반복이 사사기 입니다.


이 반복이 여섯번 반복되고, 

오늘 본문은 네번째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1)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우상을 세우고 이방신의 제사장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백성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탓으로 (13절) 돌렸습니다.


2)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진 자였습니다.(14,15절)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기드온을 부르시지만   

   기드온은 과거 하나님의 역사를 알면서도 지금은 그런 하나님이신 줄을 모르고

   부르심에 뒤로 물러나는 반응을 보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그저 '주'(아도나이-어르신, 

   상전을 통칭하여 부르는 의미)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엘로힘으로 부르게됩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맞다면, 그런 능력, 권한이 있다면 

   그런 징표를 보여달라고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밖'에서 말씀하시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25,26절)

우상을 찍어버리고 제단을 만들라고 하십니다.(바알과 아세라)

기드온에게는 생계의 위협이며 집안의 가업을 버리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감히' 이 일을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합니다.

이것도 결단입니다. 

비록 우유부단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결단을 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세상과의 타협으로 결단하지 못했다면, 다시 포도주틀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결단을 못하는 사람은 "날"(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을 살지만

결단을 하는 사람은 "때"(하나님의 때)를 삽니다.


큰 것을 결단하는 사명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거치는 것을 버리는, 이 작은 결단을 하십시오.


** 방지일 목사님

http://blog.daum.net/jndong/1659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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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주일.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 길 찾게 하는 연단


시편 119:67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I. 본문해설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입니다.

두문법의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어 22자 알파벳을 각각 맨 앞으로 오게 해서 한 글자에 8절씩 지은 시입니다.

읽고 암기하기 좋도록 이렇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지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어집니다.



II. 고난 당하기 전의 삶 : 그릇 행함


히브리어 번역의 "그릇 행하였다"는 '길을 잃어버리다', '길을 잃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행하다' 입니다. 즉 삶의 방향을 잃은 것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길을 잃은 삶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인, 간음도 저지르고, 하나님 싫어하시는 인구조사을 하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삶의 주체가 자신이지만(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체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거룩한 욕구만 우리의 삶을 이끄는게 아니라 정욕적인 욕구도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신문이나 티비,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향을 받을 뿐만아니라 그것들이 이끄는대로 끌려가는 것은 주체성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받으며 사는 삶이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각하여 뛰는 학생에게, 왜 그렇게 뛰느냐,

빨리가야 출석하고, 출석해야 학점받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나이들어서 죽게되는데, 결국 죽기위해 그렇게 빨리 뛴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 몰두하느라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예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릇 행하는", 즉 길을 잃은 채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III. 고난 당한 후의 삶 : 말씀을 지킴


여기에서 "말씀"은 히브리어에는 단수로 나타납니다.

여러가지 규칙과 교훈을 하나님은 주시지만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처럼 '하나'인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살인같은 하나씩의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그것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와 자신을 향해서 가지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지키다'는 (샤마르) '성을 지키다', '말씀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것', '높은 망대에서 적을 탐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믿음의 규칙(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입니다.

둘째, 생활의 교훈(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되어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 말씀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그의 사람됨을 펼치면 그 사람의 삶이 되고,

그의 삶을 접으면 그의 사람됨이 되는 것입니다.



IV. 고난과 영혼의 변화


고난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는 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편안한 환경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낍니다.


짐승은 고통을 받으면서 그 의미를 물을 수 없지만 

인간은 그것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행복은 '항구적'인 특성을 가져야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잠시 즐겁더라도 내일부터 괴롭게 된다면 오늘의 잠시라도 진정한 행복일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은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 의미를 묻고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이기며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고생은 상처만 남기지만

고난은 연단을 줍니다.


진리의 빛을 통해서 나를 객관적을 보며 삶의 사태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인과응보의 고통도 있고, 

죄와는 상관없는 고통도 있을 것이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묻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의미를 알고 받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잘 나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는 듯 보이지만 길 잃은 상태로 사는 것이 행복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한 대 때리시더라도 정신차려 제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징계하신다고(히) 하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사생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성적으로 교통하길 원하시지만 그 지성이 눈 멀때, 환경적으로 말씀하셔서 그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릇 행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삶의 처지에 있던지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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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 주일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1)  나의 믿음 순금같이 되어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I. 본문해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본문은 엘리바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욥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II. 연단하시는 하나님


A. 나의 인생길이 있음


원문에는 '나의 길'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한 (인생)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마다 있는 개별적인 인생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질문'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잘 하고 있는가?"

"사회는 무엇인가? 사회는 잘 하고 있는가?"

나와 관계맺은 것들에 대한 질문은 곧 '나'의 행복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과 지식들을 어디서 얻으십니까?

세상의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그런 지식을 얻어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대치되거나 대신 살아질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 가치가 있기에 '나'는 존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연적인 껍질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한 가슴떨림이 있습니까?

이 떨림이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물어보게 됩니다.


B. 나를 아시는 하나님("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야다' 시제(과거,현재,미래)는 없고 시상(완료, 진행)만 있는데, 이것은 '완료'의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식에서 '내'가 배제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아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앎, 부모처럼 돕고 사랑하시기 위한 앎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C. 단련받을 때가 있다.


"단련"은 "제련"의 의미입니다. 

금에서 불순물을 분리해내는 반복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연단을 반복하고, 이때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이 분리되고 

인식하게 되고 회개하고 자기부인을 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인 마음에서 불순물이 분리되고 순전한 마음이 되게 하십니다. 


D. 나를 순금같게 하심


순금(지하브)은 '정제된 금'을 말합니다. 

이것은 '태도'만이 아니라 '본성' 자체에 도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연단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살 인생인 우리들이

순금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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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새벽십자가 사경회5. 사랑으로 함께 하심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하셨습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경건과 신앙 속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통해 마음에서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성도이고, 이 성도는 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삽니다.


2. 서로 사랑하게 하시려고 이름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형제도 모두 그렇게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우리안에 그 사랑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 사랑충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그분의 분신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부활의 기쁨은 죽으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속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죽으시고 이 일을 위해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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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7  새벽십자가 사경회4.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예수님의 소원은,

1. 당신과 함께 있게 하는 것과, 

2.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는것이었습니다.



1. 제자들과는 몸으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함께 하셨지만 지금은 시간, 공간을 넘어서 누구든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밀함이 있고 이것은 육적 친밀함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더 깊이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구약시대에는 기적과 이적을 보이셔서 영광을 보여주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개인적인 부흥을 통해서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흥이 개인, 교회, 세계에 나타나고 임하고 경험되길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고 반드시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흥을 보는 은혜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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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새벽 십자가 사경회3.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됨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시는 모본과, 사람은 온전하게 사랑하시는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성도가 온전한 사람이 되며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힘은 사상과 윤리인데, 이것을 묶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이 은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안에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사랑, 그 사랑이 바로 성령입니다.이것이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은혜로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인데, 

1. 우리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교회가 온전한 지식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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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5. 새벽 십자가 사경회.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상


요 17:20~21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 인생의 커다란 실수 두가지는 첫째는 목사가 된 것이고 둘째는 결혼한 것입니다."

로이 클레멘스라는 영국의 1000명이상의 목회를 하고 책을 여러권 쓴 영향력있는 목사가 어느날 갑자기 남자 정부(게이)와 도망가면서 남긴 유서와 같은 편지. 그는 대학시절 게이였지만 예수를 믿고 은혜받고 목회자가 되었지만 은혜가 떨어지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치유"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중심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술 주정뱅이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가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리깡(심리학자) "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하는 곳에는 내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모순에 가득찬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는 것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참된 나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이렇게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세계를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죄와 상관없는 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랑은 세상 사람이 믿음을 갖는 원인이 됩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먼저 보여주시고, 우리안에 그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를 꺾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최고의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이 사랑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사랑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인 것입니다.


누구도 이 세상의 자원으로 사랑할 수 없고, 은혜만이 그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는 "사랑으로 하나되겠습니다"라는 서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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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새벽 십자가 사경회.  아버지와 아들처럼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기도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기도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 하나됨

같은 것을 믿고 아는 지식의 하나됨과,

사랑에 있어서의 하나됨입니다.


5절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에서 말씀하시듯이 삼위일체안에서 가졌던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2) 신적 보전

삼위일체의 사랑은 분쟁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서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된 상태를 보전해 주시기를 구하시고, 악한 세력으로부터도 보전해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교제처럼, 우리도 불완전하지만 교회안에서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살아 영광을 돌리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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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9  주일.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7)  네 가족을 돌아보라. 김남준 목사님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I. 본문해설.


디모데 후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목회서신으로 바울이 두번째 투옥되었을 때 쓴 편지입니다. 이 디모데 전서는 그 전에 빌립보교회에서 쓴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성도들의 가족 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II. 친족과 가족.


친족은 가족보다 넓은 의미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가족은 함께 사는 가까운 고유 의미의 "가족"을 지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세 기관으로 국가, 교회, 가정이 있습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세우신게 아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의 바램에 대한 허락으로 소극적인 허락속에 세워진 것입니다. 국가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었느냐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관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가정이 교회였지만 타락 이후에는 분리되었습니다. 

모든 가정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의를 통해서 사랑으로 갑니다.

교회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관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정의로 갑니다.

이에 비해서 

가정은, 정의와 사랑을 골고루 가르쳐주어서 이 두 가지의 조화를 도모하여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사랑을 나누며 사는지를 어릴때부터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돼지우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때의 그 의도대로의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은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이용하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나에게 해준게 무엇이 있냐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족은 운명공동체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실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경건한 신앙이 보이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체화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돌아보라"는 '여호와 이레'와 같은 뿌리를 가진 말입니다. 즉 미리 준비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돌아보아야 할까요?


1.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영혼의 곤고한 상태를 돌아보고 그들의 영혼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가족을 영혼으로 보기 시작하면 사랑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가족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은혜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가족의 곤고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그 사람을 위해서 대신 눈물을 흘려줘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먼저 주신 것은 가족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가족이 주었다는 상처때문에 무관심으로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2. 가족들의 육체의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가 깨어졌다면 대부분 이기심 때문입니다.

키케로라는 로마의 철학자는 '의무론'이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으로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할면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것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물질로 가족을 도와주면서 그 도움으로 인해서 가족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도와주었다는 사실까지 잊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식으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터키 지진때의 구호물품과 성경을 함께 보낸 후 오히려 선교에 역효과가 난 일)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지 '거래관계'로 도와서는 안됩니다.


3. 이 일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십시오.

매일 가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익의 문제로 분란이 생길 수 없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우리에게 배신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 그렇게 가족을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힘이 하늘로부터 오는 줄로 믿고 그렇게 가족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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