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0.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김남준 목사님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는데에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A.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지음을 받다" 티바네, 바나 동사의 수동형. '세움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번역됩니다. 

마음과 삶, 내면의 세계, 이것들이 무너진 삶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삶은 다른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레쥬.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가 제정신일때 투신하여 죽은 사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상태가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


무너진 삶으로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중심에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플라톤이 꼽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네 가지는,

지혜, 용기, 욕망,정의였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했습니다. 회개나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할것을 분별하는 것,

용기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 있는 것,

정의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욕망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지하며 가치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억제하는 것입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무너진 삶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킴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서 이탈했는지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전하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를 찾고자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A. 전능자에게 돌아감


'전능자'는 히브리말로 '샷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의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쳐부수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을 큰 힘으로 쳐부순다로 봅니다.

둘째는 '충족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

셋째는 가장 가능성이 큰, '모든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본다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한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불의를 멀리함


'아벨라'는 '불의, 사악함, 불결,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이 불의를 버려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며 불의를 멀리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은혜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런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 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에도 뭔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어서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위기를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칡뿌리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벼랑에 떨어졌는데, 운좋게 칡뿌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칡뿌리를 위에서 쥐 두마리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꿀송이가 있어서 꿀이 한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꿀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위기를 잊고 살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왜 설교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느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번 눈물을 흘리면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겠느냐"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울지 않겠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부르짖는 사람 가까이로 하나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 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걸어가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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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2)  하나님과 화목함



욥기 22: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I. 본문해설


행복해지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바램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행복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II.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A. 교훈을 받음


"제발 너는 그분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취하라"라고 번역됩니다.

토라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욥기는 모세 이전에 쓰여졌기때문에,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라는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믿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그것인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그 말씀의 지혜,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붙들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삶의 사태를 바꿔서 행복해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때려서라도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세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사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와 화목하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때 이미 하나님 없는 행복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또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몸부림 쳐 온 우리의 인생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의 복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복의 근원인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훌륭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B. 말씀을 마음에 둠


"그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 이라고 해석됩니다.


말은 소리로 발화된 말(다바르)과, 

     생각 속까지의 말(에메르, 창1:1에서 사용된 말)로 나뉩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사랑을 동반하고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참 신앙은 "하라, 하지말라"에 그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드리려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

"내 말이 너희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대로라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주셔서 그것을 이루게 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그 지식의 섭취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져오게 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랴..."(중국 선교의 힘든 일을 겪으실때..)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

하나님은 마음을 당신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 일을 기쁘게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보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보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아우구스티누스)



"마음에 둠"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은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양을 버렸다고 해서 내 안에 세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담배끊으신 이야기)

말씀을 깨닫기만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심겨져야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여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먼  여행길은 바로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숙고와 적용'이 없기 때문입니다.(존 오웬)

듣고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적용해서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을 17번째 읽고 계신 목사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 읽으시는 목사님)


마음에 말씀이 심기우고, 그것이 열매를 맺고, 그것을 붙잡고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나에게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두어지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빛 앞에서 여러분의 삶의 질서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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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6.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1)  하나님과의 평화를 생각함  김남준 목사님


욥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I. 본문해설


"욥"은 히브리 발음으로 해석하면 "미움을 받는 자"이고,

아랍어 발음으로 해석하면 "회개하는 자"인데, 당시의 배경으로 보아서는 아랍어 발음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추측합니다.


시기는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족장시대 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은 욥의 세 친구 중 엘리바스의 발언인데, 이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욥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발언했기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이 욥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됩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한 사람 실제로 적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지금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도록 영원한 행복이 아니므로 참 행복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A.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기서 '화목'은 히브리어로 '샤캄'으로 유용하다, 쓸모있다, 누구누구와 잘 지내다로 해석되는데, 이것을 적용하고 생략된 말('나'-제발)을 넣어서 다시 해석하자면 "제발, 너 자신을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28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불순종을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의 침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서 더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낯선 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는 낯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1) 회개하고(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슬픈 마음으로)

  2) 순종의 삶을 살고(단순히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3) 하나님 앞에서 사귐,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성찬 등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B. 평안하라


"샬롬"은 '평안한 상태가 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이웃 모두와 평화롭게 사는 것이며, 이웃이 나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지만 일반적인 섭리의 복들은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이것은 삶의 총체적인 회복(누군가 미워하는 사람과 화해), 

속사람이 변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방법으로 복 받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III. 복이 네게 임하리라


"복"은 남성형으로는 '토브'(좋음, 선함)이고, 여성형으로는 '토바'(유익,복락, 이익)을 뜻합니다.


원어 그대로 다시 해석하면,

"그것들로써 즉,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평화로써 복락은 너희에게 들어온다"가 됩니다.


인간은 진정한 좋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지식과 함께 옵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아는 것, 하나님으로 인해 복 될 수 있다고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오는 것이 복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끊임없는 자기 집착으로 그것의 노예가 됨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좋은 것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나빠보이는 것으로도 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오게 하셔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으로 모든 불행의 상황을 이기고 희망으로 돌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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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기쁨을 맛보라 (존 파이퍼, 좋은씨앗)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내지'말라고 명하십니다. '탐심'의 반대편에는 '만족'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원망을 품은 마음 그 반대편에 자리한 긍정적인 감정은 '마음으로부터'나오는 용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불만을 품지 않기로 결단하라느 게 아닙니다. 성경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보다 강렬한 것을 명령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감정이야말로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바인 것입니다.  48,49


인간의 교만에 담긴 본성과 그 깊이는 '자랑'과 '자기 연민'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다 교만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자랑은 '성공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기 연민은 '고난을 겪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랑은 "나는 많은 성공을 이루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랑은 강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기 연민은 약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랑은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를 희생시켰다고 말합니다.  56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다는 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너무 쉽게'기뻐한다는 게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82


예배의 핵심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라면, 예배는 결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주님 안에서 만족을 찾기 원합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겠죠." 이런 말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모금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일꾼들을 모으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재능있는 음악가들에게 그들의 소명을 이루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예배'를 드립니다. 자녀들에게 의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건강한 결혼 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도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배를 멍들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92,93


여러분의 배우자가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참된 모습을 닮아가는 결혼 생활을 만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100


하나님은 우리가 자동차를 중형에서 더 고급형으로 바꾸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또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굶주림에서 한 걸음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검소하고 단출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시(wartime)를 살아가는 데 정말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11,112


삶은 전쟁입니다. 전시 상황이 분명하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왕의 자녀로서' 화려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투를 위해 의복을 벗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114


부하게 되려 하지 말고 전시를 살아가는 필수품으로 만족하십시오.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십시오. 교만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기쁨이 이 잃어버린 궁핍한 세상으로 부요하게 흘러넘치게 합시다.   115


"사람들은 제가 삶의 대부분을 아프리케에서 보내면서 치른 희생에 대해 얘기합니다.  ... 그러나 이런 관점이나 생각으로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머무는 동안 일반적인 안락함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때때로 맞게 되는 불안, 질병, 고통, 위험 같은 것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영혼을 흔들리게 하고, 심령을 낙담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롬 8:18) 저는 결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1857년 12월 4일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케임브리지 대학 간증설교 중)  121


이슬람의 사도로 유명한 새뮤얼 츠베머 선교사는, 1904년 여름에는 네 살과 일곱 살이던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연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50년이 흘러 이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의 순전한 기쁨이 되살아납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모든 일을 기쁘게 감당하겠습니다."   123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에콰도르 선교사 짐 엘리엇)   125


우리가 고난을 선택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그것을 영원한 기쁨에 이르는 길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28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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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존 파이퍼 지음, 서경의 옮김,  엔크리스토)


이 책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일곱 가지 이유    10


첫째, 룻기는 성경 가운데 한 권이다.

둘째, 룻기는 사랑 이야기이다.

셋째, 룻기는 아름답고도 고결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넷째, 룻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인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과 화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섯째, 룻기의 가장 두르러진 목적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재앙이나 슬픔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아래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선하시다는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분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질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로 얻게 된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

일곱째, 룻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역사는, 심지어 가장어두운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호소    145.

1.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2.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십시오.

3. 성숙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추구하십시오.

4. 다양한 민족들을 껴안으십시오.

5.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6. 사랑의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7.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고 노래하십시오.


이 삶에서 지옥을 맛봄으로써,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 더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전신마비야말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입니다.   138

(17세에 자동차 사고로 목 아래 전신 거의 완전히 마비되는 일을 당한 조니 이어렉슨 타다 의 인터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 네 장 뿐인 룻기를 한 장씩 나누어 풀어낸 책.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와닿은 곳은 세 번째 장.

       '전략적인 의로움'


세상을 닮지 말라. 보아스를 닮으라, 룻을 본받으라. 심오한 사랑, 의미심장하고도 세심한 소통, 강인한 자기절제, 전략적인 의로움에 대한 헌신의 모습으로 삼으라.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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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김남준  열린교회출판부


시인은 여러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편애로 외톨이처럼 살았습니다. 형들로부터 이해나 관심을 받지 못하였고, 양들을 친구 삼으며 자랐습니다. 어른이 되어 맞이한 아내는 자기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의 아버지, 장인어른은 시기심과 질투에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사위를 시기하여 자객을 풀어서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결국 그는 장인 사울왕을 피해 적국에까지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자 수염에 침을 바르며 미치광이 흉내를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나 그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그 여자를 얻기 위해 그 여자의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그가 치른 대가는 참으로 처절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는 죽었고, 집안에 피바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 강간범은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다른 아들은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빼앗고자 반란을 일켰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 왕위 다툼은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희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였기에 본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처럼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상처투성이의 인생도 없습니다. 이 모든 상처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다윗은 8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들의 압도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83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그러면 예배 중에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예배 속에 공연을 도입하여 우리가 즐겁고 만족함으로써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두 손을 들고 찬양함으로써 여럽ㄴ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주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간단히 표현하자면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하고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95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매가 문제가 있어서 못 만나는 것이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거라. 자매는 앞으로 한 달만 교회에 나오도록 해라, 수요 예배나 금요 예배, 주일 오후예배는 안 나와도 되니 주일 오전 예배 네번만 나와서 드려라. 형제는 자매에게 한 달 동안은 절대로 예수님 똑바로 믿으라고 하든지 교회 가자고 조르지 말아라. 그리고 예배 시간에 잔다고 옆구리 찌르지도 말고 서로 떨어져서 예배드려라. 대신 자매는 일주일 동안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거라. 예배시간에는 다른 생각도 하지 말고 다른데도 보지 말고, 오직 설교자만 똑바로 쳐다보고 집중해서 예배드려라." 제 기억에 그 자매는 둘째 주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죄로 인하여 통곡하였습니다.   102


어린 아이들은 날씨가 좋은 봄철이면 부모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동물원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아이는 주위의 풍경에 이끌리고 신기한 동물을 보고 즐거워하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에게서 멀어져서 주위를 돌아보아도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때 손에 들었던 아이스크림과 풍선은 모두 다 던져 버리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서 엄마를 부릅니다. 좋은 날씨도 신기한 동물도,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더 이상 이 아이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엄마 아빠만을 찾습니다. 이것이 '찾는다'의 의미입니다. 우리도 가난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105


여러분의 가장 큰 문제는 꺾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꺾임이 없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도 바뀔 줄 모르는 편견과 아집, 굳어진 마음의 감정, 하나님이 뭐라고 하셔도 자기 좋을 대로 살겠다는 꿋꿋한 완고함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서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누구를 위해서 예배당에 남아서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깨어짐과 꺾임이 없는 고집스러운 삶을 사고 있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예배당을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자기 꺾임이 없는 마음은 모든 예배를 허위로 만들어 버립니다.   112


-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내가 누구인지, 내 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30편으로 된 고린도전서 13정 설교를 들려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설교 시리즈를 열세 번째 설교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의 방종한 예배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리즈<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한 마음, 태만한 예배 생활, 뜻없이 드리는 예배 태도.... 많이 아파하고 깊이 기도하면서, 한없는 분노와 눈물 속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저자서문 중)


- 지난 봄, 주일 말씀을 전하시다가 성도들의 나쁜 예배태도를 보시고 엄하게 호통하시면서 이 시리즈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셨고, 시리즈를 듣는 내내 큰 충격을 받으며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구역모임 교재로 문답까지 포함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실제 시리지 설교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편집된 내용이지만 읽는 중간중간마다 설교 때의 엄한 호통이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소홀하기 쉬운 일, 바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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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부패 (김남준, 열린교회 출판부 2004 GBS)


로마서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제1장 첫 회심의 축복과 회심경험


첫 회심의 중요성


첫 회심의 축복

  1. 사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남

  2.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남

  3. 영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남


첫 회심과 이후의 회심

  1. 공통점 : 성령의 역사

  2. 차이점 : 첫 회심은 1) 중생의 결과로 일어나며 일회적이다.

                        2) 회심 즉시 은혜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후의 회심은 1) 반복적이며, 첫 회심의 갱신이다.

                            2) 회심만으로는 은혜의 상태로 들어갈 수 없다


  3. 중생과 이후의 회심의 효과

    1) 중생 : 은혜를 주입하심, 새생명의 원리를 심으심

    2) 이후의 회심 :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경우는 남아있는 죄의 영향 아래

                              다시 은혜를회복하고 건강한 상태를 찾게 한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경우는 신자 안에 융성해진 죄를 

                               죽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한다.


구도자의 눈빛을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가 아무리 슬피 울부짖고 곤고한 영혼으로 몸부림쳐도 

   우리가 받는 고통만으로 주님의 시선을 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기의 행위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어디에서 미끄러졌는지 생각하고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광야에 홀로 서 하나님만 바라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30



> 제2장 지성적 혼란과 은혜의 샘을 막는 죄


회심에 관한 원리적 혼란

  1) 원인 : 중생없는 회심 추구

  2) 처방 : 죄죽임이 아닌 거듭남을 구하라


회심에 관한 개별적 혼란

  1) 이후의 회심과 관련된 개별적 혼란

       왜 첫 회심보다 강력하지 않은가?

       왜 뚜렷하게 죄에서 돌이켜지지 않는가?

       왜 확실한 사죄의 경험이 없는가?

  2) 개별적 혼란에 대한 처방

       교리(첫 회심과 이후 회심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라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알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라



죄가 은혜의 샘을 막는 방법


  1.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1) 인간은 신령한 일에 싫증내기 좋아함

     2) 싫증의 발전 : 새로운 즐거움(정욕)을 추구함

 

  2. 마음의 부패와 은혜의 틀의 파괴

     1) 마음의 부패 : 부패함이 융성해져서 은혜를 내쫓은 상태

                      막는 방법은, 지속적인 말씀의 영향력 아래 살라


  3.거짓된 평화

     1)죄가 거짓된 평화를 가져오는 수단

         어려움이 사라지고 번영이 찾아오는 화경

         그릇된 가르침에 빠짐 - 신앙의 선배들의 태만하고 그릇된 모범, 

                                다수에 영합하는 교리를 가르침, 

                                목회자와의 개이적인 친분 때문에 

                                         분명한 가르침을 외면함

         속이는 영의 역사

         그릇된 적용

         

 

  4.복음을 떠난 가르침에 빠짐

    1) 지각없는 견해를 신앙으로 받아들임

        영혼의 싫증을 지성이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에 순종치 않는 불신앙 때문

    2) 복음을 떠난 가르침에 빠진 결과 

        은혜의 샘이 막힘으로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남



> 제3장 은혜 상태로부터의 부패(1)


  1. 영혼이 죄를 경계치 않음

    1) 생각의 태만으로 죄가 들어옴

         생각의 이탈

         생각이 이탈되면 개별적인 상황에서 의무를 저버리게 함

    2) 죄를 가볍게 여김

         죄의 속임 : 죄를 축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시킴

         죄를 가볍게 여기고 범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부부의 정의를 버리는 것

    3) 죄에서 기쁨을 맛봄

         죄에도 즐거움이 있다

         계속 범죄함으로 부패한 정욕의 허기짐을 채움     


  2. 세상 사랑으로 총명을 잃음

    1) 영혼의 총명 : 영혼을 지도하고 선악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능력

    2) 총명의 가변성

         총명의 발전 : 바르게 사용할 때 발전함

         총명의 부패 : 영혼이 죄 가운데 거할 때

         총명의 쇄신 :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 쇄신됨

    3) 영혼의 총명을 구하라



> 제4장 은혜 상태로부터의 부패(2)


  3. 개별적인 정욕에 이끌림

    1) 죄는 은밀하고 개별적인 정욕으로 역사함

    2) 특정한 정욕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갖게 함

        죄의 크기와 결과를 속임

        다른 정욕으로 보상하려는 심리를 갖게 됨   

    3) 총체적인 순종으로 죄를 이길 수 있음

         성화에 필요한 자세 : 성화의 목표를 삶의 모든 방면에서의 총제적인 순종으로 삼으라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의 자세로 행하라

         총제적인 순종이 필요한 이유


  4. 진리에 대해 실천이 없는 개념적 지식의 증가

    1) 진리를 아는 두 가지 방식

        개념적 이해 -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아는 경우.

                      동기는 올발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이 개념적으로만 정리될 뿐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경우.

    2)개념적 지식의 특징

        생각에만 머물고 마음으로까지 내려오지 않음

        총명을 가져다주지 못함

        체험으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므로 진2정으로 아는 것이 아님

    3)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에는 능력이 있음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남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라남


> 제5장 은혜 상태로부터의 부패(3)


  5. 자기부인이 없는 삶

    1) 자기 부인의 필요성

         내적 부패성 때문

         일반적이고 특별한 외적 유혹 때문

    2)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의무에 대한 올곧은 인식이 필요함

         모든 상황 속에서 의무를 인식하라

         의무에 반하는 생각과 욕구를 의지로 통제하라

         순종과 의존의 마음을 가지라 : 믿음과 감사


  6. 기도생활의 태만함

    1)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

         기도가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

         은혜가 남은 만큼 기도의 의욕을 느낌

         상습적인 짧은 기도는 은혜의 가사 상태를 나타냄

    2) 마음의 깨어짐이 없는 기도생활에 만족함

         은혜를 보존하기 위한 기도의 요건 : 열렬함과 지속성

         자기의 육체를 호되게 다루는 자기 극기와 훈련이 필요함

         기도와 삶의 관계 : 전 삶으로 주님을 찾는 구도자만이 

                            열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음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 나아가라



1740년에 영국의 캠버슬랭이라는 지역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무명의 설교자가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을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는데, 그 중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지방에 있는 신학교의 교리학 교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이제껏 일평생 동안 교리학을 가르치며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왔지만, 저는 오늘 바로 그 속죄하신 옛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는 단지 개념적으로만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해했었고, 그때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90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여러분은 자신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자문해보십시오. 만약 구원받지 않았다면 주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가당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거듭나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매달리십시오.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진실한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거듭났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94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받으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은혜의 크기만큼 기도의 의욕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정직한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추고 꼼꼼하게 진단하는  '정사'의 삶을 사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단히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기도의 욕구를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까? 며칠동안 계속 기도하지 않고 지냈는데도 기도해야 할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면 그는 이미 신앙의 길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의 욕구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십시오. 삶의 자리에서 수시로 무릎을 꿇고 그 가운데 좋으신 주님을 대면하는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까?  113



- 변향근 집사님께서 주신 책들 중 하나.

이미 mp3로 서너번 들었지만, 책으로 정리된 것을 다시 보는 것도 여전히 새롭고 깊다.

그리고 어렵다. 이해가 어려운게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은혜에 더 의지하게 되나보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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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1.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9)  죄인을 건지심


욥기 22: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I.본문해설


인간의 불행은 대부분 그의 죄 때문이지만 모든 불행이 꼭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인간의 죄 때문에 불행하다고 확신했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욥처럼 의로운데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생각으로든 그 삶으로든) 삶.


선과 악의 인과응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방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간에, 우리는 이런 불행을 당하게 되고, 누구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 2절, 개정 전..)


처음 예수를 믿은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며 예수를 믿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어떤 원인으로든 간에 당하는 불행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II. 


A. 죄인을 건지신다.(죄없는 자가 아닐지라도 즉, 죄인이라도)


우리의 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각성'입니다.

빛이 환하게 들어올수록 방 안의 먼지들이 더 잘 보입니다.


세상의 사물은 우리의 힘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원인이 되는 죄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버려야합니다.

비록 지금 고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금같이 연단하실것을 믿어야합니다.


B. 깨끗한 손이 된다


"두 손"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현실적인 삶을 말합니다.(제유법)

지성으로 죄를 인식하고,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주님의 용서의 확신을 믿으며 정결한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태들을 만나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십니다.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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