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0.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김남준 목사님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는데에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A.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지음을 받다" 티바네, 바나 동사의 수동형. '세움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번역됩니다.
마음과 삶, 내면의 세계, 이것들이 무너진 삶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삶은 다른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레쥬.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가 제정신일때 투신하여 죽은 사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상태가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
무너진 삶으로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중심에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플라톤이 꼽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네 가지는,
지혜, 용기, 욕망,정의였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했습니다. 회개나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할것을 분별하는 것,
용기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 있는 것,
정의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욕망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지하며 가치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억제하는 것입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무너진 삶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킴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서 이탈했는지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전하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를 찾고자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A. 전능자에게 돌아감
'전능자'는 히브리말로 '샷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의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쳐부수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을 큰 힘으로 쳐부순다로 봅니다.
둘째는 '충족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
셋째는 가장 가능성이 큰, '모든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본다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한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불의를 멀리함
'아벨라'는 '불의, 사악함, 불결,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이 불의를 버려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며 불의를 멀리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은혜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런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 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에도 뭔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어서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위기를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칡뿌리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벼랑에 떨어졌는데, 운좋게 칡뿌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칡뿌리를 위에서 쥐 두마리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꿀송이가 있어서 꿀이 한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꿀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위기를 잊고 살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왜 설교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느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번 눈물을 흘리면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겠느냐"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울지 않겠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부르짖는 사람 가까이로 하나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 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걸어가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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