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6월 22일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6)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마 19:3~6   김남준 목사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I. 본문해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묻고자 함이 아니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버리라"는 대답을 하신다면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안된다"라고 대답을 하신다면 모세가 허락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에 관한 본래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II. 사람을 지으심


A. 세계와 사회의 계획

혼인의 원리에서 출발하는 인류 사회, 그리고 세계.



B. 혼인의 원리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결합.



III. 이혼, 관계들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당히 파괴된 상태입니다.


상대방이 인내하고 견뎌준다고해서 일평생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편, 아내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실"이어도 배우자에 관해 좋지 않은 얘기를 자꾸 하지 마십시오.

서로 존귀히 여기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침체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결혼은 관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애와의 다른 점입니다.


이혼 후 받는 자녀들의 충격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자신의 행복뿐아니라 관계 속에 들어오는 자녀의 행복도 존중해 주어야합니다.


C. 자신과의 관계


이혼을 결심할 때 40일 금식하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모든 힘을 상실하고 결정하는 것이 이혼인 것입니다.


결혼은 "꿀덩이"가 아닙니다.

용서와 인내를 위해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프지 않은 관계는 없습니다.


가족은 나에게 뭔가를 해주어서 "가족"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족"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은혜를 구하며 관계를 이어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십니다. 은혜로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만남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생각하며 은혜로써 이겨내야 합니다.

상대의 성품과 기질을 인정하고 부족할 지라도 사랑할 이유를 생각하며 살야하 합니다.


--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말씀을 들으며 오히려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혼은 "꿀덩이"가 아니라는 것....

아프지 않은 관계는 없다는 것....  

한참만에 알게된 "진리"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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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8.  주일. 아내와 남편(5)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시리즈. 김남준 목사님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를 향한 남편의 덕목 두번째는 "괴롭게 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은 격분하게 하다, 쓰라리게 하다, 맛이 쓰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데, 남편으로 인해 아내가 당하는 괴로움은 일반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당하는 그런 고난,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성격이나 태도, 행동때문에 아내가 받는 괴로움입니다.


- 평생을 부부싸움 없이 살아온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한번도 부부싸움을 안하고 살 수 있었는지를 묻자, 큰 일은 남편이 결정하고 작은 일들은 아내가 결정하고 그런 결정을 서로가 존중하며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들을 아내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 따랐느냐고 했더니 남편은 그랬다고 했고, 큰 일들에 대해서 남편이 결정한 것을 아내가 따랐느냐고 묻자, 남편은 

"아직 한번도 큰 일을 결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 어떤 아내에게 쥐어 살던 남편이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는 서점에 가서 아내를 길들이는 법에 관한 책을 찾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점원에게 물었더니, 그 점원의 대답,

"공상과학 소설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세요."


- 어떤 남편이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다. 자신이 기도할때 마음이 뜨거워져서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해야겠다는 소명을 받아서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아내는 못하겠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소명을 따라야 하는지, 아내를 따라야하는지 상담을 했다. 목사님의 대답은,

"아내의 말을 들으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소명을 주시려면 당신과 아내 모두에게 같은 마음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 하세요."


아내를 힘과 권위로 억눌러서 복종시키려는 것은 성경에서 나타난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여러분에게 그렇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 지갑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남편, 힘들때마다 그 사진을 꺼내어 보고 힘은 낸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가 감동을 받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힘을 내냐고 묻자 남편의 대답은,

"내가 이런 여자와도 사는데 무슨 힘든 일이라고 못하겠는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세상은 부부가 그저 같이 살면 끝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부부의 소명이 있습니다. 서로 희생하며 사는 것이 주를 섬기는 과정인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랑없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실존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된다고, 상대에게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Sorry for what I am.

내가 "나"이기 때문에 미안하고 죄송한 것입니다.


아내의 결점때문에 사랑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지 못하는 나의 결함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아름다움과 좋은 점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사랑하십시오.

아내는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 남편을 "평화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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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4).  아내와 남편(2)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I. 본문해설


다시 오실 때까지 가정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


왜 앞절은 한 주만 하고, 오늘 이 구절은 두 주간 하는지 

남편들이 불평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 마음입니다.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1. 사랑함("아가페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A. 로마사회와 아내


에로스-남녀 연인간의 사랑, 

필리아-동료간의 사랑, 

스톨게-부모,자식간의 사랑, 

"아가페"-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로마시대는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아내는 당시 남성들에게 "아가페"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는 

'아쿠오'(무조건적인 복종,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때)이 아니라 

'휘포타오'(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 복종함)입니다.



   B. 사랑 : 성향과 행위


본질적으로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유교에서는 4단(인의예지,이성에 속함)과 7정(희노애락수오욕,감정에 속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은 이성만의 작용도 아니고 감정만의 작용도 아닌 포괄적인 작용인 것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이고,

까리타스는 하나님의 그 사랑때문에 우리안에 생기는 사랑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남편도 이 말씀 앞에서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섬기기위해 보내어지심 같이, 

남편은 아내를 섬기기 위해 보내어진 것입니다.


이 여자의 모든 결점이 바로 내가 이 여자의 남편이 된 이유입니다.


내가 이 결함 많은 여자를 끝가지 사랑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대역의 죄를 지은 나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아내로 말미암아 경건의 기회를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연애할때는 사랑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없는데에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사랑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더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아내가 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아내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수"입니다. 

원한을 남기지 않고,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게하는 "복수"입니다.


악은 선으로 갚고, 허물을 용서로 갚겠다고 도장찍은 것이 "결혼"입니다.


한 사람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에 달린 것입니다.


아내의 결함이 완전하신 그리스도앞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결함보다는 작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셔서 어떤 자비하신 사랑으로 이곳까지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모자란 것이 많아보이는 여러분들의 아내가 바로 여러분들의 기업이고 그렇게 모자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채워서 여러분들의 아내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그 아내의 남편으로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생각해보면 한 인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 소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인지를 한번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게에서 못박혀 피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 그런 사랑을 충만히 받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의 일부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의 결함이 크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것은 여러분들의 기업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영원한 유업을 함께 누릴 연약한 그릇이 바로 여러분들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 없이는 여러분도 자신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의 작은 희생과 헌신, 그리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위해서 견디는 많은 인내들을 지금은 아내가 잘 몰라줄 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만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아가페의 사랑때문에 그 아내를 사랑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비록 많은 순간, 여러분의 이런 진지한 노력과 헌신이 아내에 의해 무시되거나 혹은 가볍게 평가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아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부모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우리 홀로 하나님 앞에 서게될 그때에 우리 앞에 서 계신 분은 우리의 아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오래 인내하며 모든 것을 참고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여자가 나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될 수 있다면 하나님,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그렇게 내 아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예배중에 들으면서도 불편하기 그지없고,

다시 들으면서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말씀..

한참 멀은 것 같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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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8.주일.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3)   아내와 남편(1)   김남준 목사님


골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명령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먼저 나온 것은 "질서"가 가족관계의 기초가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남편과 아내의 관계.


흙으로 만든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

흙은 구약에서 '존재의 미천함,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연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임을 알라는 의미이고, 인간의 위대함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갈비뼈에서 취하셨음은 원래 남녀가 한 몸이었음을 알아야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공통된 특성이 있으면서도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루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종교명령 -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한 명령,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먹지말라.

문화명령(노동명령) - '생육하고 번성하라,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여자들의 몸 안에는 생명의 터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정복'은 남성의 일입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왕이 덕으로서 나라를 통치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전쟁과 같은 남성성을 가진 일 뿐아니라, 백성의 깊은 고통을 세세히 살피는 여성성을 가진 일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을 처음부터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이기심이 없을때는 이 다름이 서로에게 만족과 즐거움을 주지만, 사랑이 부족하게 되면 서로에게 짐이 되고 갈등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타락한 이후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기심이 크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결점이 보일때, 내가 보고 그 결점을 보충하라고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필요한 것이 질서입니다.

이 두가지가 같이 있어야 가정에 진정한 행복이 오래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바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인 것입니다.



2. 복종하라.


뱀의 유혹으로 하와, 아담이 범죄한 일은 이 질서가 깨어진 모습입니다. 

질서가 깨어진 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보시기바랍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복종하라"는 명령은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복종은 노예적, 폭압적 완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교회의 여자 성도들에게, 그러한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기 전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먼저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남편이 눈여겨 보아야할 구절이 아닙니다. 


한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기 전에 아내를 불러서 유언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죽거든 수절하지 말고 얼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결혼은 000와 하세요.."

"아니 여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000은 당신의 사업을 망하게 한 그런 사람이잖아요.."

"맞아요, 당신을 그 녀석과 맺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요.."


인간의 사랑으로서는 한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미움과 갈등이 생긴 다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비록 서로간에 잘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누가 먼저 그 질서로 돌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내가 먼저 돌아가야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없이 질서를 강요하는 것은 인성의 파괴를 가져오고

질서없는 사랑은 온전한 정신적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편의 아름다움이 끝나는 순간에서라도 남편을 사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한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복종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나 위대함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하게 하는 경향성" 입니다.


나는 오늘 아내인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도 많고 시련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남편의 슬픔이나 고독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내로서의 고독이나 외로움을 몰라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평행선을 허물고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남편에게 다가가 보십시오.

따뜻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섭섭하게 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 지났지만 사과한다고, 용서를 빈다고, 사랑한다고 한번 말해보십시오.

그것이 질서로 돌아가는 일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때, 그 질서를 따라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3.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하나님께서 가정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에 어울린다"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남편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하나님은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을 아내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들에게 지은 죄보다 더 큰 허물을 매일 매일 용서해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 그 안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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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2)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I. 본문해설

부모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됩니다.



II.부부, 부모와 자식


A. 부부 : 가정의 기본 단위


B. 부모와 자식 : 인류의 보존 방식
부부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은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III. 부모 공경의 표현 : 들음


A. 자녀들은 부르심
"자녀"는 부모를 둔 모든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세상 살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B. 부모에게 순종함
발 아래에 엎드려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며 순종할 마음으로 들어야합니다.
훌륭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종교, 도덕은 어린 아이일 때 반드시 필요한 교육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가지를 만나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정의를 가르쳐줄 국가
둘째, 참된 길을 걷는 좋은 부모
셋째, 학문적 지식으로 삶을 가르쳐 줄 스승
넷째, 이러한 부모와 스승을 따르는 친구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이런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도록 망가졌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이 죄인된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자녀와 부부 사랑보다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에는 상급이 없지만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는 '잘되고 장수한다'는 상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녀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참된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변함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은 부모뿐이다." 
(일본의 어느 작가)


"상처"는 대부분 많은 기대를 가진 사람에게 받게 됩니다.
자식답지 못한 녀석이 부모에게 기대를 크게 갖게 됩니다.
성경은 가정과 교회의 완전한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가족만큼 사과에 인색한 집단은 없습니다.


자식은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 것 만큼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찾지 못해서 핍절한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가족,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로와 힘을 얻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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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1)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골3:21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투옥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이단을 주의시키며, 교회와 신자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심이 되셔야하는지를 설명하며 나아가서 우주적 기독론으로 시작된 이 편지는 신자들의 세세한 삶까지 가르쳐줍니다.


1. 아내가 남편에게의 덕목은 복종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격적이고 주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입니다.


2. 남편의 아내에 대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3. 자녀의 부모에대한 덕목은 공경으로 나타납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등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공경입니다.


4. 그리고 오늘, 아비들의 자녀에 대한 덕목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미도 아비도 모두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지만 아비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크므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A. 가정을 주신 경륜.


흙으로 아담, 그의 갈비뼈에서 하와, 그 다음으로는 그 둘의 생식으로 사람이 생산되어지게 하셨습니다. 결국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것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서로에게 할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온전한 사랑을 간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타락한 후에 세우신 기관이지만 가정은 타락 이전부터 있던 기관이고, 이 두가지가 신적인 기원을 둔 기관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십니다.

타락 이전에는 가정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게 하셨고, 타락한 이후에는 교회를 세우셔서 가정과 교회, 두 기관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주신 목적은,


첫째, 바르게 알게 하시려고 가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이 무엇인지,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가정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알수 없고 믿음, 신앙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조건은 온전한 지식과 이성뿐만 아니라 믿음, 신앙이 온전하여 그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자녀는 불행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둘째, 바르게 아는 것뿐만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맺게 하시려고 가정을 주셨습니다.

부모를 통해 공경받는 하나님을 보고 배우고,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야하는지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과 신앙을 가진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빠르게 해주지만 영혼을 아름답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덕은 영혼이 가진 힘이고,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상대방을 이롭게 하고, 덕의 원인은 사랑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가져오게하고 정신을 선하게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기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덕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의 낙심케 말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낙심"(아듀모신-열정을 갖는 것이 없어지다, 열정이 사라지다, 정신이 없어지다, 낙심하다)


자녀를 노엽게하면, 분노하게 하면 열정이 사라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게하는 열정이 없어지게되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비이성적이고 야수적인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죄의 광기와 무모함, 맹렬함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사랑을 자녀에게 확대하여 자신도 올라가보지 못한 곳에 자식을 올려 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길 바라시지, 목숨을 걸고, 그 사람에게 내 인생이 달린 것처럼 사랑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든, 욕망이든 천국이든...

특히 어린시절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는 것은 더우기 안될 일입니다.

폭력과 폭언으로 인해서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상실되면 그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게 되든지간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하고, 사랑하는 대신 관계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여러분 부모에게 달린 것입니다.


며칠전, 엄마 혹은 아빠가 없는 교회 아이들 수십명에게 만약 엄마, 아빠가 계셨다면 사달라고 졸랐을 선물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서 편지를 쓰고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이야기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가정이지요? 그런데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폭언, 폭력하여서 참다운 인간의 삶을 살수 없도록 낙심케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참된 인문주의,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주체성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이 되고, 기술보다 덕의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자녀들은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했는지를 기억하십시오.그 사랑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라도록 자녀들을 돕고 섬기는 부모들이 되기를 예수이름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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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창 35:6~15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I. 본문해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처음부터 야곱이 떠날때, 함께 보내졌다는 주석과, 세겜에 왔을 때, 야곱을 맞으려고 보냈다는 주석이 있지만, 어찌되었든지 드보라는 야곱을 사랑하고 정신적으로 큰 역할을 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야곱의 마음은 더 가난해졌을 것입니다.


9절에서는 10년이상 머무른 세겜에서의 시간을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가나안으로 오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보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II.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A. 이름을 기억하게 하심.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망으로 말미암는 사기꾼의 대명사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호세아 12:3,4 에서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의 눈물의 회개와 돌이킴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야곱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에게 이기었다고 표현하신 것을 알 수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인 것입니다. 

야곱의 회개로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되고 그 은총으로 야곱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여러분의 이름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믿은 것을 후회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은총으로 우리의 결점을 "이기신" 것을 후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B. 전능하신 하나님("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가지로 모든것을 가지신 분, 세상을 심판하신 힘을 가지신 분, 지존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인데, 이 모든 의미를 다 통합하여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믿음에 금이 간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에 세겜에서 불순종하며 있었던 이유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불행은 이 세상의 자원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주님을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고전10장에 보면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셔서 힘을 주시든지, 피할 길을 주시든지 하십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잘못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적의크기와 수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느냐, 그들은 나에게 붙이셨는가 인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일을 바꾸길 바라지 말고 나를 바꾸시려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고 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음,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아빠,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안되요?"(가족예배 후, 온 가족이 집안의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얘기를 들은 아이가 아빠에게...)



III.다시 복주시는 하나님


A. 큰 민족을 이루리라.


배신, 사기, 불순종한 야곱의 "자격"을 따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B. 약속의 땅을 주리라.


세겜에서 돈벌고, 그곳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지고, 잘 지내게되었지만 야곱의 "나그네"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생각한 그런 방법으로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그네가 와서 쉼을 얻고, 하나님이 나를 이스라엘로 부르신 것을 알게 되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의 죄와 결함에서 승리한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언제까지 야곱처럼 하나님을 불신하고 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하시겠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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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창 35:4~5   영적 부흥을 위한 조짐


I. 본문배경


영적각성 후, 비로서 객관적인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서 미끄러지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나 그 길을 모르는 사람, 그 길을 알지만 갈 힘이 없는 사람은 열린교회로 오세요" - 초창기 열린교회 전도지 문구. 이것을 보고 눈물흘리면 온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의지가 결합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먼저 예수믿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딸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르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면 그들도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시려고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믿음이 좋고, 이삭은 너무 온유하면, 요셉은 너무 순결합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피할 수 있을데까지 피해보고 도망갈 수 있는 만큼 도망가고, 속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바로 우리와 너무 닮은 모습입니다.


II. 영적 부흥과 변화의 조짐


A. 이방신상들을 제거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결단에 따르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야곱의 '권위'때문에 따랐습니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권위주의'는 이러한 근거와 기반이 없이 사람을 지배할 목적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앎이 중요한 것입니다.

'권위'에 불복종, 불순종하는 것도 죄이며,

'권위주의'에 맹종하는 것도 또한 죄입니다.


죄의 주관화는 그 죄가 드러나고 자기가 알게되고 알고 있더라도 그 죄를 직면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게되기 때문에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B. 단장품들을 버림.(출33 에도 동일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놀라운 적용력입니다. 야곱은 단장품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한 자들은 그것을 행하였습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만 앙망하는 신앙으로 되돌아감을 말합니다.


"하나님때문에 기쁘십니까?"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으십니까?"


같은 기도를 오래하는데 응답이 없다면, 그 기도에 합당한 삶을 내가 살고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으신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 삶이 바뀌길 원하시는 것이고, 그 삶에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바로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겜에서의 성공과 번영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요셉에 이어져 큰 민족을 이루는 연결고리로 야곱을 부르시며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요즘의 자랑과 보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수많은 "단장품"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신자는 부패하는 것입니다.  


C. 상수리나무 아래 묻음.


이것은 우상과 단장품들을 하나님 앞에서 "장사지낸"것, 잊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선물은 내가 사랑하는 세상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에 익숙해져 체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고 시련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않고 자기의 방법으로 잔머리를 굴린다면 그 시련으로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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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창 35:2,3



I. 본문배경.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고만 하셨지만, 야곱은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 말씀도 받을 만한 마음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면 기도의 제목이 사라집니다. 죽은 자와 다름없고 마귀도 신경쓰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목표를 세우라고 했더니, 도리어 하나님께 목표를 세워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II. 벧엘로 올라가는 자의 결단.


A. 이방 신상을 버림.


조나단 탈굼에서는 세겜의 우상의 집에서 가져온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되어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의존이 반복되면 사랑이 됩니다. 

먼저 내 안에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합니다.

그것을 떼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신상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의 우리가 가장 행복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B. 자신을 정결케 함. 


정결은 도덕적, 의식적 불결에서 깨끗해짐을 말합니다. 이 불결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없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해 남은 것이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되어도 하나님은 그것때문에 여러분을  미워하시거나 복수하려고하지 않으십니다.


C. 의복을 바꿔 입음.


본문에서의 "의복"은 세겜을 떠나기위해 여행하기 좋은 옷을 말하지만, 성도의 마땅한 행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불신앙하는 행실은 그것으로 나타나고, 경외하고 순종하면 그 행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삶에 대한 개혁이 없이는 영혼에의 변화는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 옳은 길로 가고자 할 때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야 합니다. 

삶을 개혁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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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리라.  창 35:2,3



각성은 이제껏 보지 못하던것을 보게 만들어 새로운느낌,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뜻은,

첫째, 자기 자시을 객관적으로 실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둘째, 삶에 일어난 사태, 상황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관지어 생각할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이것이 신앙입니다. 


좋은 일에는 헤헤거리고 나쁜 일들에는 미움과 원망을하는 것은 깨어있지 못한 것이고 이런것이 짐승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실 그때에만, 위대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망가지고 미끄러지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에 익숙한 것이 인간입니다. 

익숙해져서 그것이 불편하고 불행인 것도 모르고 그렇게 그냥 사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견딜 수 있는 만큼 참고 견기는 끈기는 죄의 영향이며, 무모함과 나쁜 담대함입니다.


나에게 발생한 사태들이 하나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시는가?


자살하는 사람들은 지금과 너무너무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 내 힘으로 그렇게 못할때 선택한 것이 자살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최대의 방해물은 죄가 아니라 "부요한 마음"입니다.

회개는 무엇을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가난하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세겜의 번영에 눈이 멀어 동물적인 삶을 산 야곱은 족장의 권위마저 잃어버리고 영적 권위까지 잃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각성시키셨습니다.


야곱 한 사람으로 인해 집안 사람, 함께 한 자들까지 깨우셨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들이 그 순간에 좋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깨워서 가정과 또 함께 한 사람들은 변화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최고의 증거는 설교이기도하지만 그 설교로 변화된 삶을 사는 여러분입니다. 

환란날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소망한 야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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