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창 28:10-22, 35:1


I. 족장 시대의 배경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의 아들들. 족장시대.


야곱은 사기꾼같은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족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본문의 "사닥다리"는 원문으로 보면 "왕의 대로"같은 큰 길을 말합니다.



II.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최상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헌신, 결단, 작정같은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그냥 사랑하셨습니다.


A. 세가지 조건과 헌신의 약속.


지켜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십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도 장사꾼같은 계산으로 조건과 헌신을 약속합니다.


B. 귀환할 때 성숙해진 신앙.


천사와의 씨름은 '믿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기록을 보면 자신의 혈기로 하나님을 이기려는 사기꾼의 본성입니다. 씨름에 졌다는 것은 야곱의 자기 깨어짐이며, 야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에서와 화해 후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중간에 세겜에서 들르며 그곳에서 오랜기간 거주하게 되고 처음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성숙한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거주 기간이 늘어나면서 신앙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 야곱처럼 세겜에서 주저앉은 사람이 아닐까요?


III. 다시 벧엘로 부르심.


A. 디나의 강간 사건.


딸의 강간사건은 야곱의 큰 괴로움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들들 마저 아버지인 야곱을 따르지 않으며 멋대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여 집안 전체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야곱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없는 형통함은 폭풍우 전의 고요함인 것입니다. 


B. 다시 벧엘로 부르심.


하나님은 세겜에서의 야곱의 죄를 따지시지 않으시고, "에서"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세가지 조건을 그 이상으로 풍족하게 채워주셨지만 야곱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배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베푸시고 건지시도 우리는 늘 변함이 없고 늘 잊어버리기만 합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은 어디입니까?


"단"을 쌓으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서라, 하나님을 향해 살아라, 하나님을 등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위기가 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내어주신 분이 무엇이 아까와서 다른 것을 내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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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지금과 같은 천일염이 아니라 당시의 "암염"은 그 안의 소금 성분이 공기나 습기와 접촉하여 녹아나오고 나면 불순물만 남게되고 그렇게 되면 짠 맛은 없어지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기때문에 버려질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고나면 소금의 역할을 할수 없고 다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버림받는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가치"에 대한 것입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어 흐린 맛, 변질된 맛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소금이라고 부르신 그 "가치"를 잃어버린 다는 뜻입니다.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지만 그것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배반의 인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중생과 회심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라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그 맛을 잃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다시 그 맛을 회복시켜 소금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세상을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팔복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들중에 어떤 사람들은 연약하거나 혹은 죄때문에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팔복의 사람에서 멀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자신들을 가치있게 만드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서 팔복의 사람으로 회복되고 소금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것을 유지하기위해 기도하고 애쓰며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치있게 하셨는지도 잊지말고 소금으로 부르신 삶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평생 처음 경험해본 사경회.

 5일간 저녁시간을 드린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오히려 더 깨닫고 받은게 많아서 내가 드렸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시간과 경험과 말씀들.

"인격적인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예배 드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예수님 발앞에 앉아서 말씀듣기를 다른 모든 일들보다 귀하게 여겼던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 알게되고, 말씀은 비록 초등학생일 지라도 깊은 영혼까지 이르러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인식할 만큼의 변화를 충분히 일으키신다는 것까지 깨닫게 하신다.

 

예배에 나아가고 말씀을 대하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나 중심" 이었는지. . .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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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소금이다 라고 현재적인 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고침받고 위로받아서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기 때문에 장차 소금이 되라고 하신게 아니라 '지금' 소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소금이셨고 앞에 말씀하신 팔복의 사람의 삶을 직접 살아 보이시면서 소금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팔복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소금의 삶은 신앙의 오랜 경륜이나 지식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어린이 사경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크게 울며 회개하는 이 아이는 동생을 괴롭힌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괴롭힘 당한 동생을 불쌍히 여기고 앞으로 사랑하겠다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죄를 깨닫고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하며 죄씻음받기 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갈망하고 사이좋게 지내려는 화평의 마음, 온유한 마음까지 모두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금의 삶을 사는 팔복의 성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상태가 주님의 것과는 크기가 다를 수 있지만 동질의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이 맛을 알게되지만 이 맛을 다시 약하게 잃기도하고 다시 그 맛을 찾기도합니다.
또한 세상의 맛에 미각이 무뎌지면 주님의 소금의 맛을 좋게 느끼지못하기도 하고 세상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그 맛이 싫어서 핍박하기도합니다.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서 소금이신 주님께서 맛있게 만드신 세상을 경험하게되었고 맛을 안 그들을 주님께서는 "너희는 소금이라"고 부르신.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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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 있는 소금,

세상을 위한 소금입니다.

세상이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부조화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여서 "맛"이 없기 때문에 소금 역할의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조화되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은 
선악을 분별하는 선명한 정신,
그 깨달은 선을 행할 용기있는 가슴,
세상에서 살아갈 적당한 욕망(의욕)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녹아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의 맛을 살려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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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마 5:13

소금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사람들은 4장에서 병고침받은 자들처럼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갈 맛을 느끼지못하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받고 위로받음으로 세상 살아갈 맛을 회복한 자들 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였고 그런 삶이 "그 소금"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살 맛 안나는 세상에 그 맛을 내게하는삶, 맛을 느끼게 해주는 삶...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주님으로인해 맛을 느끼게되고 이제 주님은 그들이 맛보았던 것처럼 세상의 맛을 느끼지못하는 사람들로하여금 "맛"을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소금이십니다.

진리의 빛보다 먼저 소금의 삶으로 세상 사람들이 맛을 알게하고, 그 이유와 소망을 묻는자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 오직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어린이들도 다른 장소에서 똑같이 사경회. 불을 바라는게 아니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 한 시간 넘는 말씀을 듣고나서도 기도하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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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주일. 주 계신 곳에 이르게 하소서.  김남준 목사님


시편 43:2~3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편과 42편은 쌍둥이 시편으로 불리워집니다.

저자가 같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고라의 자손의 마스길

'마스길' 지혜롭게 하다, 교훈, 지혜를 주는 내용


고라. '고라당'

모세가 이끌던 광야시절, 모세에게 반역했던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땅이 그들을 삼키는 심판을 받았었지만, 다윗의 건국 때에 고라의 자손들이 다윗을 돕습니다. 다윗을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들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시를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썼다고 보는 견해와, 

다윗이 지은 시를 고라의 자손이 보관하였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두 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영혼의 목마름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만나주시지만, 일반적으로 당신을 만나고자하는 영혼의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혼의 고독.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당신은 나의 성채가 되신 분이신데, 어찌하여 나를 거절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성채'는 큰 성은 아니어도 탄탄하여 왠만한 공격에는 끄떡없는 피난처와 같은 곳을 의미합니다. 이 성채에서 쫓겨나서 닫혀진 문 앞에서 울부짖으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은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련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이 시련과 환란은 사람들을 통해서 옵니다.

위로와 은총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다윗은 시련과 환란의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고독감은 경건에 도움을 주지만,

은혜 밖에 있을 때의 고독감은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고독을 이겨보려고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감을 느끼는 것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거절감이 없다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외로움을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련이나 환란을 통해서, 거절감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2. 원수에 억합당하는 현실, 슬픔.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임을 보여줍니다.(어찌하여... 어찌하여...)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여주지만 이 시편은 우리와 똑같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나는,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시편을 읽는 목소리에 다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시인의 간구.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거룩한 산'이 '주께서 계시는 곳'과 동격입니다. 이 곳이 '시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왕권이 시행된 곳을 말합니다. 그 땅 자체는 대단한 땅이 아니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율법과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친 영혼이 돌아오는 곳, 피난처, 그곳이 바로 '시온'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만 주일 예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온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나아올때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에 간절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4.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빛'과 '진리'는 동격입니다. 즉, '빛 곧 진리를 보내셔서 나를 인도하시고'입니다.


환란과 침체 속에 있는 영적 특징은 '어두움'입니다.

객관적인 어두움은 안배워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워야 해결됩니다.

주관적인 어두움은 잘못된 것을 사랑하거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탈되어서 찾아온 어두움입니다. (충청도 쪽의 구원파 성도 몇이 김남준 목사님의 테잎을 듣고 회심한 이야기.

 "저 목사는 구원받은 사람이 확실하다...")


이 어두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진리를 깨닫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개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둘째, 간절한 기도입니다. 무념무상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셋째,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영혼의 침체에서 우리를 일으켜세우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곳은 사람마다 달라도 일어나는 곳은 똑같습니다.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무엇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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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4. 새벽. 열 처녀의 비유. 오우진 목사님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에 나타난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으로 볼때, 이 "기름"은 "참된 행위"라고 생각해야 맞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중요한 점은 "기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핵심이 다른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은 신랑이 늦게 온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지 않았습니다.

처녀들은 신랑을 기뻐하지 않거나 반겨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기다리다 지쳐 모두 졸며 자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혼인 잔치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올바른 지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련한 자'라고 일컬음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어있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뜹니다. 육체의 눈을 뜹니다.

그렇다고 영혼의 눈까지 번쩍 뜨는 것은 아닙니다.

안으로는 영혼의 연약함, 밖으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영혼이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배워서 알고 기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있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방치한다면

이들처럼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깨우지 못한 것은 단순한 질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중의 다섯은 들어가고 다섯은 못들어간 것,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교회안의 반은 들어가고 반은 못들어간다는 것을 여기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입니다.

카지노에는 시계와 창문이 없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모르게 하고

잠든 영혼을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계와 창문이 없는 이 세계에서 말씀을 통해서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 내 영혼을 깨어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내 영혼이 깨어있지 않은 것을 안일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위로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모른 것도 아니고

  신랑을 만나고 싶지 않거나 반가와 하지 않은 것도 아닌 '미련한' 다섯 처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도 기다리다가 함께 졸며 자기도 했지만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깨어있지 못한(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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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총신대 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십자가와 신학함. 김남준 목사님


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신학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신학의 중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무엇인가?'가 아닌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

고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혼란 두가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는 것이었고, 이

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할 자라면 저주받을리가 없을텐데, 예수

님은 부활하셨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저주받은 죽음이 당신의 죄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때문

임을 깨닫고 이 혼란에서 큰 빛을 보고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모든 신학적 시

야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이 놀라운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과 세계와 인류에 대한 시양,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에서의 변화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체험에서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목회는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같은 진리가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에서 시작

되는 것이고, 교회의 불행은 이렇게 외칠 것이 없는 사람이 매주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를 시킨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공부에 헌신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가하면, 

7년정도, 건강한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해야합니다.

교회의 재앙은 가르칠 내용이 없는 목사가 매주일 예배당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의 기록은 22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에세이를 쓴 것입니다. 책상에 물과 빵을 놓고 

말입니다.

또 한번은 17시간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여러번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공부하다가 죽으면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비하다가 죽는게 내 분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다가 죽고자 했습니다.


목숨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무지한, 무책임한 설교가 강단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설교단은 힐링캠프같은 것이 아닙니다.

설교단은 일생에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선포하다가 죽는 곳입니다.


공부하지않는 친구들과는 사귀지 말고 배울만한 친구들과 교제하십시오.

한 학기에 자기 키만큼의 책을 읽어내십시오.


공부는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다 할수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지성의 깊이와 관련이 적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실

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려고 하는 진지한 고민과 몸부림이 필요한 것

입니다. 마음을 주님께 쏟으며 주님을 알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훌륭한 청중이었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통성기도 인도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적이 없는 당회자. 

이런 것들은 직업적으로 해야하니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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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3. 고려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김남준 목사님


레 2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

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성막과 관련된 등잔불 규례입니다.

성막은 열두어평쯤 되고,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고, 물돼지 가죽으로 덮

여있어서 일체의 외부의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본문은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문이 없어서 자연채광이 불가능하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오직 등잔의 

불빛으로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교회에서 울려퍼져야 할 것은 오직 계시의 빛인 진리의 말

씀이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어야하고,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는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

다. 슐라이 마허 이전까지만해도 개신교의 전통은 신학은 목회자만 하는 학문

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신학을 공부의 의무가 있었고 목회자는 더 

깊은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마그넬리아데이, 그 책을 화란 사람들은 농부들이 밭갈러 갈

때 수레에 싣고 가서 새참시간에 읽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슐라이 마허 

이후에 신학교육이 전문화되면서 일반학문의 계몽주의 학습방법을 따라서 목회

자만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의 학문,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모였을때 설교를 듣거나 교훈을 받으면서 자기의 상식을 깨

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죽기까지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성막안의 등잔불인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것과 제도권안에서 안수를 받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터득하고 살아내고, 그 살아내는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사상, 의지는 윤리. 이 두가지는 삼위일체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 두가지가 결합되어 힘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려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신

앙의 차원입니다. 최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부활의 영광, 재림의 

소망으로 가슴이 벅차 본 적이 언제입니까?

둘째는 그 이후에 진리에 대한 골격이 서게 됩니다.


첫째,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하고 어린아이처럼 성경을 읽어야합

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합니다.


20년간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이번주는 무슨 설교를 하지? 라고 한적은 한번

도 없었고, 오히려 이걸 또 설교해야하는데 왜 일주일 후에 모일까? 했습니다.

19년동안 5215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원어 공부를 하십시오. 

원어 공부를 안하는 것은 육군이 되서 바지에 흙묻히지 않겠다는 것이고 해군

이 되서 바지에 물 안묻히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학 공부를 하십시오.

성경만 읽은 학생은 성경은 안읽은 학생과 비슷하게 위험합니다.


신학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기억하고 공부하십시오.


설교는 "불붙은 논리"(로이드 존스 목사님)입니다.

누가 들어도 좋은 소리를 하는게 설교가 아닙니다.


외국에 나가서 숙소에 가면 티비에 조엘 오스틴이 나옵니다. 

리모콘을 끌 수가 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분명히 '개소리'라는 것이 분명한데, 원고없고, 유창하고, 외모 잘생겼고, 목

소리 좋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웃겼다 울렸다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가 그

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그사람과 나는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을 것입

니다. 이것을 분별도 못하고 은혜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금의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 마메섹의 요한, 

존 오웬은 십대때에 신학을 공부하다가 헤친 건강을 평생 십자가처럼 지고 살

다가 죽었습니다.


존 칼빈이 22세에 파리 꼴레쥬 있을때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뽑힌 것은 어마어

마한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라틴과 그릭의 교부들의 문헌을 거의 암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앞두고 스위스 로잔에서 카톨릭과 공개 토

론이 있을때 칼빈은 완벽하게 암기된 상태에서 카톨릭이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가지고 카톨릭의 견해를 반박해서 거기 모인 수십명의 수도사들이 칼빈의 강연

을 들으며 개신교로 넘어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전체가 카톨

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돌아왔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도하기 싫은 것, 하나님 사랑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입니다.



'감람을 찧어낸 기름'은

성령(기름)이 목회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진리의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월터 발로우라는 사람은 선교사이자 신학자인 엔드류 머레이를 만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갔을때, 그분은 무릎위에 손을 얹고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가 우리를 위해 형제들이여 기도합시다 할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고, 그 분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27세 때,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러 올라올때 성도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방금 만나고 온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광채가 난다면 정말 그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분이고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일까하며 말입니다.


죠지 길레스피라고 하는 청교도는 어느날 신앙 고백을 작성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스코틀랜드에 모였을때, 길레스피 목사의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기도 서두에 고백하면서 기도를 시작했고 기도가 마치자 어떤 사람이 긴급동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오늘 이 길레스피 목사님의 기도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목사님의 기도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눈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찧어낸" 기름은 프레스로 눌러 짠 기름이 아니라 불순물이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얻은 순수한 기름입니다.

이 기름의 불은 그을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름이 성령의 역사라면 찧어진 열매는 자기깨어짐을 말합니다.

"자기 의", "자기 사랑"에 대한 깨어짐을 말합니다.


테르툴리아니우스는 "나는 회개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지금 교회의 추문들은 목회자가 한 가지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눈물있는 회개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뭔가 모자라는게 아니라 나쁜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에 몇번씩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던 사람이 6일동안 살다가 올라가서 온 마음을 다해서 증언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는 설교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라

성령의 사람이 되라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이 되라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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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 주일 요 6:16:29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이성호 목사님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장은 크게 세 등분으로 나뉩니다.

지난번 오병이어 기적과 떠나신 예수님이 나타난 앞부분과,

본문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

그리고 세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리키는 바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오병이어 표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요한은 이것을 연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떡"이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그 뜻을 이해하고 예수님은 찾은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26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죄인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죄인들의 구원자"로 보질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배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주실 것을 더 기대하고 있습니까?

기쁨과 감사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엇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하고 계십니까?


다윗의 시편 3,4편.

4편에서는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뇨"라고 말합니다.

"네가 아무리 신앙을 지켰어도 지금 네 형편을 보니 하나님이 선하신 것같지 않구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시편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진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을 간직한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을 보십시오.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가 희생을 치뤘을까요?

아닙니다. 그 보화만 있으면 모든 것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보화를 소유한 사람의 기쁨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나의 가장 소중한 보화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보화임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떡 때문에 예수님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나는 아무 문제될게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주님께서 우리 눈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난 가운데 처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양처럼 말입니다.


고난의 때에 잊지 말아야 할것 두가지,

첫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든지 고난은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 종교의 힘을 빌어 그 고난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현세상에서의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살전 1:10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난의 대부분은 돈이고, 그 다음은 질병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죄와 심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많은 복을 받는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단과 기독교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단은 복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을 세웁니다.


본문 16절~21절,

6장 전체는 오병이어 기적에 관해 설명하고 있고,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그 중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기적은 누구를 위해 행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열두 제자와 열두 광주리의 남은 음식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려고 했지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섬길 수 없는 한계의 상황에 부딪혔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기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섬김에서 스스로 떡이 되어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50절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큰 풍랑과 파도로 인해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예수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요한은 기록하지 않았지만(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된)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다스릴 권세가 있으신 분이고,

창조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요한은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들에게 오신 것, 주시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떡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떡이 되기위해서 온 것이다.

너희에게 나를 주러 온 것이다.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노동하지말라, 일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일한 것 이상의 댓가를 바라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자기 손으로 땀흘려 일하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하라고 합니다.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하는 일입니다.


마 6:21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땅의 보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사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사는 사람이십니까?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한 번 뿐인 인생, 나그네요, 외국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게 하소서.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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