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6. 주일 팔복시리즈 17.  박해 받는 자의 복(1)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I. 본문해설 


팔복의 첫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와 마지막 여덟번째 복인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동일한 복은 -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팔복은 무엇을 하거나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입니다.



II.  박해 받는 팔복의 사람 


- 화평케 하는 것은 팔복의 적극적 측면이요  의를 위해 박해 받는 것은 팔복의 소극적 측면
- 마르투스(증언, 증거하는 증인/순교자)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 20세기 동안, 예수를 증언하다 3천만 명이 순교했습니다.
( 핍박의 불가피성 )
* 나를 따라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져야 하리..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하나님)
* 세상의 정신과기독교의 정신은 달라야 한다
(윤리가 아닌 다른 평판을 얻도록 하심)
* 기독교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던 시대는 없다.(윤리를 강조하던 시대에도 윤리적인 시대는 없었다-기독교인을 죽여도 죄가 아닌 시대)
- 박해를 받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박해로 인해서 당신의 백성임을 입증해주십니다.
* "때리면 맞고 찌르면 찔리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 자체가 증거이며 증인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순교하게 합니다.



III. "의"를 위한 박해

A. "의"란

- 율법에 부합한 상태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상태
- 그리스도의 은혜에 덕입은 상태
(중세의 암흑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적 배경)

B. 윤리적인 것이 아님

* 윤리적인 꼬투리를 잡히고 비난 받는 것은 기독교인의 문제이기에 고쳐서 옳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비난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그저 기독교가 싫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기독교인이 윤리적인 삶을 살면 이 세상 사람들이 흡족할까? 그것이 가능할까?)
* 믿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 대로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알키비아데스는,

"난 자네가 싫어, 자네가 없을 때는 괜찮지만 자네가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자꾸 생각이 나거든.."


로이든 존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지 못하게 하시기때문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자신이 꺾여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C. 죄와 허물로 인함이 아님

- 기독인이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지않도록 사는 것은 마땅합니다.

어디까지가 당연한 대우를 받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인 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 귀의 - 세상의 것을 버리고 진리에 입문하는 것
* 잘못된 복음에 익숙해지면 참된 복음이 올 때 참된 것을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단지 윤리적임을 자랑하기 위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다)
* 진리의 빛을 받아야 오류가 무엇인지를 안다
(거룩함이 없으니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선에 있다는 것이다(박해 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 자신의 존재의 무게에 허덕이는 인생들이여 깰지어다~~!


"여러분은 어떤 점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계십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

2014.03.09 주일 팔복의 사람 16.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2)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


- 까리따스는 변화된 내면의 발로입니다.



2. 평화 -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말입니다.


- 인간의 이성적인 요소가 동물적인 요소를 지배하는 상태(아우구스티누스)

- 지성,감성,의지의 질서적 조화

* 예를 들어 원전의 폐해는 "에너지에 대한 인간의 탐욕"입니다.


  A. 세상 나라 - 각자가 자기를 주인삼으며 살아가는 자기 사랑의 투쟁입니다.


    - 평화는 다툼과 분쟁이 없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가 흘러야 합니다.


  B. 하나님의 나라 - 신적 사랑의 질서

    - 이 질서 안에서의 안식이 평화입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 그 질서를 생각하십시오.

    - 회개의 구원 없이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평화를 훼손하고자 하는 잔존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

    - 신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평화의 관계를 추구하고 온화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잠잠하고 온유하면 평화로운 가정이 될텐데, 순간적인 시원함을 위해서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면 그런가보다 하다가도 자기의 인생관에 충돌하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를 느낀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인생관에 편입된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에 관한 사항이 아닌 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됨(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A. "하나님의 아들"

    소유격인 "~의"는 단순히 소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나의 생각, 말, 행동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


  B. "일컬음을 받으리라"


    법적인 상속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의무는 세상의 아들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 봉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른 모든 것으로 섬길 지라도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참 신자가 아닙니다.

    "너나 믿어라", "너 같이 될까봐 못 믿겠다"라고 들어서야...

    사소한 것은 다 양보하고 중요한 것 하나만 양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믿지않는 가족들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분쟁과 불화는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보다는 이기심과 편견, 자기만 옳다는 오만의 문제가 대부분 입니다.


    평화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웃들에게 관용과 긍휼과 사랑으로 끌어 안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이 엔조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이 평화의 최고의 소비자요 수혜자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

2014.03.02  주일. 마태복음 5:9 팔복의 사람(15)  화평하게 하는 사람의 복(1)


I. 본문해설


빛은 비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빛이 아니라 빛이기 때문에 비추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소금도 마찬가지로 짠맛을 내기 때문에 소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기 때문에 그 맛을 낼 수 밖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II.화평하게 하는 자


"에이레네" 평화, "포이오스" 무엇을 만드는 사람 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복수명사.

성경에는 한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로써, 정의롭고 자신을 지킬만한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쉽게 그런 사람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A. 평화란 무엇인가?


로마에서는 전쟁과 다툼이 없는 것을 평화로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왕국의 신적 질서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함락 후에 이런 생각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분쟁이 없는 것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이레네"는 "샬롬"과 동치어입니다.

"샬롬"은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 관계적 모든 면에서 온전한 것을 말합니다. 

'텐리 하찌' 절반을 자른 빵, '텐리 샬롬' 온전한, 자르지 않은 빵.


B. 평화실현의 영역


1) 자신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성, 감정, 의지의 순서대로 알고 이해하고 판단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질서가 흐트러지면 거기에서 평화가 깨어지고 죄를 짓게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내면의 질서를 온전히 회복하고 싶지만 이 일은 내 힘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게 될때 가능한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처음 마음, 선교적 구국의 마음과 타락.

오늘 드려지는 예배, 일주일에 한두번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마음의 질서가 올바르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서 평화가 회복되어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교회와 가정에 대해서 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원래 하나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은 손해를 보아야하고, 자신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합니다.

 이웃에게 대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나서서 지적하며 고치려는 용기입니다. 일본사람들을 욕하지만 내가 그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다문화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태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장벽을 가지고 있다면 갈등과 보복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바보"라는 한국이름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지어준 한국 직원들..

영혼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교회 분란의 원인이 됩니다.


모든 평화 중에 가장 우선되어져야 할 일은 "복음전파"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Posted by 지윤이네
,

2014.2.23 주일 마태복음 5:8 팔복시리즈(14)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2


I. 본문해설

율법을 지키는 정결로써의 청결만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마음의 청결"을 말씀하신 예수님.



II. "하나님을 보다"의 의미


A."보다"의 뜻은 물리적인,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안, 어떤 일이나 사태를 직면한다는 뜻입니다.


B. 물리적 의미가 아닙니다. 이 개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영혼과 정신의 작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III.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A.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져집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모든 것이 어두워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최고의 축복은 초월적인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B. 만물 안에서 주의 영광을 봄

  모든 피조물에는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낙인(!)이 찍혀있지만 지식이 없으면 그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식(망원경과 같은 기계)과 청결한 마음(렌즈), 이 두 가지가 있어야 만물 가운데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하게 되면 인생의 고난의 의미들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회심도 마음이 청결한자가 하나님을 보는 방식입니다.


C. 하나님 앞에 사는 행복을 누림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인데, 이렇게 서로를 아는 것은 "친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범죄 후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고 악신이 그를 장악했을 때의 모습을 보았기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최고의 찬송의 제목은 "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주 앞에 영원히 나를 세우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통과 지식의 행복 속에서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의 환경이나 사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과 사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삶의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은 삶 가운데 있는 파도를 멈추게하고 잔잔하게 하는 게 아니라 파도가 있더라도 그 파도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곳을 갈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이런 삶의 사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을 지라도 우리의 "불결함"을 보게 하십니다.


지난 주 교회의 화재에 대해서 기도할때, "모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한 부분을 불태워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온전케, 정결케 하시려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하나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까?

요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며 은혜를 생각할 때 마음이 물처럼 녹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빼앗을 수 있는 복은 복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을 복인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

2014년 2월 16일 팔복의 사람 13.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1)

마태복음 5:8



I. 본문해설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마음이 청결한 자


A. 청결한 자


원문에는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청결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 상태, 군인들이 전투에 적합하지않은 요소를 제거하여 전투에 적합하게 정비된 상태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오류없이 순전히 진리를 관조할 수 있는 상태를 나태내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크게 세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의식적인 정결, 도덕적인 정결, 심령의 청결을 의미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제의적인 청결과 삶과 마음의 순수함과 깨끗함을 의미했습니다. 균형잡힌 구약의 "청결"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가르침으로 이것이 외적인 문제(제의법과 결례)로만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내적 청결과 외적 청결의 균형이 깨어진 것을 지적하시며 "마음"을 붙여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혼의 상부적기능(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여 선과 악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과 하부적 기능(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오감으로 세상의 것을 감각하여 정보를 파악하는 것.)

죄로 인해서 상부적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마음 안에서 이 두가지 기능이 만나게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것이기도 합니다.


B. 청결한 마음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서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인간의 기능이 충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III. 마음 청결한 자의 나라


A. 청결함

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청결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회개하여 받아들일 때, 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청결함을 갖게 됩니다.


항구적인 청결함

순간적으로 도달한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반복되는 성화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B. 청결해 지는 길


1) 속죄의 씻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어 청결하게 됩니다. 


2) 은혜의 씻음

죄를 용서받았을 뿐이지 죄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제거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굴복으로 불결해지게 됩니다. 이때 다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죄와 불결을 발견하고 뉘우치며 은혜로 인해서 씻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청결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만 사랑하는 이기심, 이 두 가지 때문에 교회와 세상에서의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영원, 진리, 선,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보는 각도에 따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시간의 관점, 참과 거짓의 관점, 윤리적 관점, 미학적 관점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정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정보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최고의 선에 대해 알 수 없고, 최고의 선에 대한 사랑이 아닌 한 이웃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하나님께서 통채로 주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기서 뵐수 없다면 그곳이 어찌 천국이 될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곳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식적인 청결보다 내면의 변화, 내적인 청결이 일어나야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땅에 내려놓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고 청결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며 살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이미 내게 주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고 해도 아까운 것이 없는 진정한 헌신과 얽매임이 없는 완전한 자유,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천국 백성은 삶과 죽음의 동기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 복음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_ 오늘은 참.. 말씀이 너무나 안들린다.

이렇게, 금방 이렇게 되는구나. .



Posted by 지윤이네
,

2014년 02월 09일  팔복의 사람 12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김남준 목사


마 5:7   

 

팔복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성품입니다.

인간의 덕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주체라면, 


1.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


불변하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지금 완전하시다면, 예전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므로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전에 가지신것을 지금은 안가지고 계시다는 것도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특정한 상황이나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만 사랑을 나타내신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신자에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야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때문에 우리가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시기 이전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구원의 은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우리에게 그런 죄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입니다.


요즘의 세상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뭔가 모자라게 보이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비참한 처지에 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도록 그리스도인을 부르셨습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자들의 행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부른 노래(창세기)는 자신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와 해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 라멕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포악과 무자비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받은 것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매일매일 이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누구든지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긍휼을 입으며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나는, 눈물없이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위한 기도가 막힌듯한 느낌일때, 나보다 비참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로 시작해보십시오. 그때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긍휼이 필요없을 정도로 비참하지 않은 영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우리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은,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도저히 보실 수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 길에

길 잃은 양 한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여러분들이 주님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살아서 무자비한 이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

2014.02.02.주일 팔복의 사람 1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I. 본문해설


세상의 정의 추구 방식은 긍휼을 배제합니다.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어서 이 "긍휼"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의의 실행 방식을 보여주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공의"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긍휼의 사랑"인 것입니다. 


II. 긍휼히 여기는 자


A."긍휼히 여기다"의 의미

1) 하나님께, 긍휼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동기입니다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디도서)"

    긍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근거 입니다. 

2) 인간에게는 이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로서 인간 상호간에 긍휼을 가지고 대하도록 요구하십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와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 "...너도 불쌍하게 여기는게 마땅하지 아니하냐..")


B. 사랑의 속성 중의 하나(그렇다고 해서 이 세가지로 사상이 구성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1) 오래 참음 - 원하지 않는 그 질서를 고통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비 - 남에게 베푸는 친절과 호의입니다.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라며 베푸는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긍휼 - 타인의 현재적 비참을 공감하는 것이며, 그의 그 고통이 속히 제거되길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은 "엄마"입니다. 

고통의 원인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 고통이 그에게서 제거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III.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그의 질병의 원인이나 죄의 근원을 중요하게 보지 않으시고 그의 "비참"을 보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오고 돌로 치기 위해 모인 자들에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죄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희미한 긍휼의 그림자를 "엄마"에게 주셨고, 이것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탕자의 아버지 입니다.

슬픔을 동반한 사랑, 눈물을 머금은 사랑, 마음 속에 피눈물이 절절히 흐르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냥 서로 마냥 좋고 즐거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두가지 질문.

1) 최근에 내 잘못으로 겪는 고통과 비참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2) 주변에 그런 고통과 비참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내 고통처럼 여겨서 내 품에 쉬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과 긍휼을 하거나 베풀어 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늘 이 마음에 새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무한히 빚진 자이며, 이것을 베풀며 사는 것이 빚진 자의 삶입니다.


사람이 외로운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랑을 하지 않아서 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Posted by 지윤이네
,

2014년 01월 26일  팔복의 사람 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김남준 목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



1.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


2. 의를 추구하는 자의 만족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림과 목마름에 만족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우주적, 종말론적 만족


- 하나님의 뜻이 계속 펼쳐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주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인간과의 원수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일은 인간 세상에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인간과 짐승,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서도 화목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의의 완전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B. 국지적, 현재적 만족


- 오늘날에도 미래의 만족을 부분적으로 누리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마귀의 잔존하는 세력이 남아 있기에 세상을 이길 자원과 힘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살려두시고,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전하여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 그 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을 주십니다.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철저히 폐쇄적인 중국에 출판이 허가 된 "게으름"과 "새벽기도". CRTS 학생이 출간사를 차려서 심의에 신청하여 통과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주는 상처는 남지만, 하나님을 위한 상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의 위로와 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배부르지 못할 양식을 구함


-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의 욕망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고프고 목마르지만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도, 자아도 아닙니다.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렇지 못한 세상의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만족, 배부름을 주시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를 만족시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만족으로 얻은 힘으로 다시 세상에 항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주님과 평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 사람이 많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내게 없기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상처를 받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취한 욕망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의해 거절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세상에 아부했고, 자기 사랑을 꺾고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대신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번영의 길을 예수의 힘을 입어 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얼굴에 침뱉은 세상의 입에 어떻게 입맞출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신앙의 마지막 숙제는 어떻게 사랑을 올바르게 하느냐 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완전히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도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티끌같은 나를 통해 티끌만큼 하나님의 의라도 이 세상에 이루어지길 갈망할 때 우리는 이미 현재적으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채우심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만족, 그리고 이 초라한 인간을 그래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동시에 체험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복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

2014.1.19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의 사람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1)


I. 본문해설


주리고 목마른 상황은 복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해지라고 가르칩니다. 더 소유하고더 성취하여 행복해지라고 합니다. 



II.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A."의"란 무엇인가?


의는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를 가진 단어 중 하나입니다. 

마6:1에서는 경건함으로,

행24장에서는 심판의 정의로,

갈 2장에서는 바깥에서 덕을 입어 올바르게 됨으로

마 27장에서는 책망받을 것없는 무죄, 순결의 상태 등으로 표현됩니다. 


1.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상태의 의(성경>모세오경>십계명)

율법은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규울하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율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이런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은총에 덧 입힌 상태의 의(율법에 충족되지 못하는 의 때문에 필요합니다)

시32편의 죄의 사함을 받고 허물에 가리움을 받은 자의 복이라고 표현 됩니다.


3. 대속에 덧 입혀진 상태의 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긴 율법을 인해 받은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셨습니다.


위의 세 가지 의에 대해서 갈망을 가지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B.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그 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덧입혀진 상태에 모든 사람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위의 1번에대한 해결이 되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이 새로 태어나서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껍질만 하나님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내용까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의롭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특히 복음전파에 대해서 그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에서 어그러진 세상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거나 눈물흘리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거룩해지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바쳐서라도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만족을 얻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라고 기도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쳐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누룩과 소금과 빛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이 살아있는냐 그 말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빛보다 어두움이 크고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을 살려두신 것은 이 세상을 티끌만큼이라도 나를 통해서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마음속의 "욕망"으로 입증됩니다. 여려분의 마음에는 어떤 "욕망"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

2013.11.3 주일 팔복시리즈 2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가르치신예수님
육신의 배고픔과 병고침으로 끝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인 영혼의 필요를 채우시고 고치시기위해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자원으로는 하늘로부터의 것을 대신하거나 채울 수 없습니다.

2. 입을 열어 
진리이신 예수님은 입을 열때마다 그 진리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진리가 가득 차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진리가 있다면 완전하진 못해도 그렇게 진리가 입을 통해 전달될 수 있어야합니다.

3. 말씀
진리를 전하는 불변의 수단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드라마, 영화 등의 다른 것으로 설교가 대신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입의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진리의 전달 방법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