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1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2)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I. 본문해설

부모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됩니다.



II.부부, 부모와 자식


A. 부부 : 가정의 기본 단위


B. 부모와 자식 : 인류의 보존 방식
부부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은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III. 부모 공경의 표현 : 들음


A. 자녀들은 부르심
"자녀"는 부모를 둔 모든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세상 살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B. 부모에게 순종함
발 아래에 엎드려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며 순종할 마음으로 들어야합니다.
훌륭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종교, 도덕은 어린 아이일 때 반드시 필요한 교육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가지를 만나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정의를 가르쳐줄 국가
둘째, 참된 길을 걷는 좋은 부모
셋째, 학문적 지식으로 삶을 가르쳐 줄 스승
넷째, 이러한 부모와 스승을 따르는 친구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이런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도록 망가졌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이 죄인된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자녀와 부부 사랑보다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에는 상급이 없지만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는 '잘되고 장수한다'는 상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녀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참된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변함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은 부모뿐이다." 
(일본의 어느 작가)


"상처"는 대부분 많은 기대를 가진 사람에게 받게 됩니다.
자식답지 못한 녀석이 부모에게 기대를 크게 갖게 됩니다.
성경은 가정과 교회의 완전한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가족만큼 사과에 인색한 집단은 없습니다.


자식은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 것 만큼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찾지 못해서 핍절한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가족,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로와 힘을 얻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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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1)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골3:21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투옥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이단을 주의시키며, 교회와 신자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심이 되셔야하는지를 설명하며 나아가서 우주적 기독론으로 시작된 이 편지는 신자들의 세세한 삶까지 가르쳐줍니다.


1. 아내가 남편에게의 덕목은 복종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격적이고 주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입니다.


2. 남편의 아내에 대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3. 자녀의 부모에대한 덕목은 공경으로 나타납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등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공경입니다.


4. 그리고 오늘, 아비들의 자녀에 대한 덕목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미도 아비도 모두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지만 아비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크므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A. 가정을 주신 경륜.


흙으로 아담, 그의 갈비뼈에서 하와, 그 다음으로는 그 둘의 생식으로 사람이 생산되어지게 하셨습니다. 결국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것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서로에게 할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온전한 사랑을 간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타락한 후에 세우신 기관이지만 가정은 타락 이전부터 있던 기관이고, 이 두가지가 신적인 기원을 둔 기관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십니다.

타락 이전에는 가정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게 하셨고, 타락한 이후에는 교회를 세우셔서 가정과 교회, 두 기관을 통해서 참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주신 목적은,


첫째, 바르게 알게 하시려고 가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이 무엇인지,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가정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알수 없고 믿음, 신앙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조건은 온전한 지식과 이성뿐만 아니라 믿음, 신앙이 온전하여 그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자녀는 불행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둘째, 바르게 아는 것뿐만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맺게 하시려고 가정을 주셨습니다.

부모를 통해 공경받는 하나님을 보고 배우고,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야하는지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과 신앙을 가진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빠르게 해주지만 영혼을 아름답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덕은 영혼이 가진 힘이고,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상대방을 이롭게 하고, 덕의 원인은 사랑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가져오게하고 정신을 선하게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기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덕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의 낙심케 말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낙심"(아듀모신-열정을 갖는 것이 없어지다, 열정이 사라지다, 정신이 없어지다, 낙심하다)


자녀를 노엽게하면, 분노하게 하면 열정이 사라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게하는 열정이 없어지게되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비이성적이고 야수적인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죄의 광기와 무모함, 맹렬함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사랑을 자녀에게 확대하여 자신도 올라가보지 못한 곳에 자식을 올려 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길 바라시지, 목숨을 걸고, 그 사람에게 내 인생이 달린 것처럼 사랑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든, 욕망이든 천국이든...

특히 어린시절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는 것은 더우기 안될 일입니다.

폭력과 폭언으로 인해서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상실되면 그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게 되든지간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하고, 사랑하는 대신 관계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여러분 부모에게 달린 것입니다.


며칠전, 엄마 혹은 아빠가 없는 교회 아이들 수십명에게 만약 엄마, 아빠가 계셨다면 사달라고 졸랐을 선물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서 편지를 쓰고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이야기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가정이지요? 그런데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폭언, 폭력하여서 참다운 인간의 삶을 살수 없도록 낙심케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참된 인문주의,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주체성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이 되고, 기술보다 덕의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자녀들은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했는지를 기억하십시오.그 사랑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라도록 자녀들을 돕고 섬기는 부모들이 되기를 예수이름으로 빕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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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창 35:6~15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I. 본문해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처음부터 야곱이 떠날때, 함께 보내졌다는 주석과, 세겜에 왔을 때, 야곱을 맞으려고 보냈다는 주석이 있지만, 어찌되었든지 드보라는 야곱을 사랑하고 정신적으로 큰 역할을 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야곱의 마음은 더 가난해졌을 것입니다.


9절에서는 10년이상 머무른 세겜에서의 시간을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가나안으로 오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보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II.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A. 이름을 기억하게 하심.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망으로 말미암는 사기꾼의 대명사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호세아 12:3,4 에서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의 눈물의 회개와 돌이킴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야곱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에게 이기었다고 표현하신 것을 알 수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인 것입니다. 

야곱의 회개로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되고 그 은총으로 야곱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여러분의 이름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믿은 것을 후회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은총으로 우리의 결점을 "이기신" 것을 후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B. 전능하신 하나님("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가지로 모든것을 가지신 분, 세상을 심판하신 힘을 가지신 분, 지존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인데, 이 모든 의미를 다 통합하여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믿음에 금이 간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에 세겜에서 불순종하며 있었던 이유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불행은 이 세상의 자원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주님을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고전10장에 보면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셔서 힘을 주시든지, 피할 길을 주시든지 하십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잘못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적의크기와 수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느냐, 그들은 나에게 붙이셨는가 인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일을 바꾸길 바라지 말고 나를 바꾸시려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고 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음,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아빠,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안되요?"(가족예배 후, 온 가족이 집안의 문제로 깊이 고민하는 얘기를 들은 아이가 아빠에게...)



III.다시 복주시는 하나님


A. 큰 민족을 이루리라.


배신, 사기, 불순종한 야곱의 "자격"을 따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B. 약속의 땅을 주리라.


세겜에서 돈벌고, 그곳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지고, 잘 지내게되었지만 야곱의 "나그네"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생각한 그런 방법으로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그네가 와서 쉼을 얻고, 하나님이 나를 이스라엘로 부르신 것을 알게 되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의 죄와 결함에서 승리한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언제까지 야곱처럼 하나님을 불신하고 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하시겠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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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창 35:4~5   영적 부흥을 위한 조짐


I. 본문배경


영적각성 후, 비로서 객관적인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서 미끄러지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나 그 길을 모르는 사람, 그 길을 알지만 갈 힘이 없는 사람은 열린교회로 오세요" - 초창기 열린교회 전도지 문구. 이것을 보고 눈물흘리면 온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의지가 결합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먼저 예수믿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딸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르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면 그들도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시려고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믿음이 좋고, 이삭은 너무 온유하면, 요셉은 너무 순결합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피할 수 있을데까지 피해보고 도망갈 수 있는 만큼 도망가고, 속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바로 우리와 너무 닮은 모습입니다.


II. 영적 부흥과 변화의 조짐


A. 이방신상들을 제거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결단에 따르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야곱의 '권위'때문에 따랐습니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권위주의'는 이러한 근거와 기반이 없이 사람을 지배할 목적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앎이 중요한 것입니다.

'권위'에 불복종, 불순종하는 것도 죄이며,

'권위주의'에 맹종하는 것도 또한 죄입니다.


죄의 주관화는 그 죄가 드러나고 자기가 알게되고 알고 있더라도 그 죄를 직면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게되기 때문에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B. 단장품들을 버림.(출33 에도 동일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놀라운 적용력입니다. 야곱은 단장품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한 자들은 그것을 행하였습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만 앙망하는 신앙으로 되돌아감을 말합니다.


"하나님때문에 기쁘십니까?"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으십니까?"


같은 기도를 오래하는데 응답이 없다면, 그 기도에 합당한 삶을 내가 살고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으신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 삶이 바뀌길 원하시는 것이고, 그 삶에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바로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겜에서의 성공과 번영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요셉에 이어져 큰 민족을 이루는 연결고리로 야곱을 부르시며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요즘의 자랑과 보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수많은 "단장품"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신자는 부패하는 것입니다.  


C. 상수리나무 아래 묻음.


이것은 우상과 단장품들을 하나님 앞에서 "장사지낸"것, 잊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선물은 내가 사랑하는 세상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에 익숙해져 체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고 시련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않고 자기의 방법으로 잔머리를 굴린다면 그 시련으로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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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창 35:2,3



I. 본문배경.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고만 하셨지만, 야곱은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 말씀도 받을 만한 마음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면 기도의 제목이 사라집니다. 죽은 자와 다름없고 마귀도 신경쓰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목표를 세우라고 했더니, 도리어 하나님께 목표를 세워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II. 벧엘로 올라가는 자의 결단.


A. 이방 신상을 버림.


조나단 탈굼에서는 세겜의 우상의 집에서 가져온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되어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의존이 반복되면 사랑이 됩니다. 

먼저 내 안에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합니다.

그것을 떼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신상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의 우리가 가장 행복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B. 자신을 정결케 함. 


정결은 도덕적, 의식적 불결에서 깨끗해짐을 말합니다. 이 불결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없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해 남은 것이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되어도 하나님은 그것때문에 여러분을  미워하시거나 복수하려고하지 않으십니다.


C. 의복을 바꿔 입음.


본문에서의 "의복"은 세겜을 떠나기위해 여행하기 좋은 옷을 말하지만, 성도의 마땅한 행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불신앙하는 행실은 그것으로 나타나고, 경외하고 순종하면 그 행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삶에 대한 개혁이 없이는 영혼에의 변화는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 옳은 길로 가고자 할 때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야 합니다. 

삶을 개혁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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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리라.  창 35:2,3



각성은 이제껏 보지 못하던것을 보게 만들어 새로운느낌,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뜻은,

첫째, 자기 자시을 객관적으로 실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둘째, 삶에 일어난 사태, 상황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관지어 생각할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이것이 신앙입니다. 


좋은 일에는 헤헤거리고 나쁜 일들에는 미움과 원망을하는 것은 깨어있지 못한 것이고 이런것이 짐승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실 그때에만, 위대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망가지고 미끄러지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에 익숙한 것이 인간입니다. 

익숙해져서 그것이 불편하고 불행인 것도 모르고 그렇게 그냥 사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견딜 수 있는 만큼 참고 견기는 끈기는 죄의 영향이며, 무모함과 나쁜 담대함입니다.


나에게 발생한 사태들이 하나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시는가?


자살하는 사람들은 지금과 너무너무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 내 힘으로 그렇게 못할때 선택한 것이 자살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최대의 방해물은 죄가 아니라 "부요한 마음"입니다.

회개는 무엇을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가난하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세겜의 번영에 눈이 멀어 동물적인 삶을 산 야곱은 족장의 권위마저 잃어버리고 영적 권위까지 잃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각성시키셨습니다.


야곱 한 사람으로 인해 집안 사람, 함께 한 자들까지 깨우셨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들이 그 순간에 좋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깨워서 가정과 또 함께 한 사람들은 변화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최고의 증거는 설교이기도하지만 그 설교로 변화된 삶을 사는 여러분입니다. 

환란날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소망한 야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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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창 28:10-22, 35:1


I. 족장 시대의 배경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의 아들들. 족장시대.


야곱은 사기꾼같은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족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본문의 "사닥다리"는 원문으로 보면 "왕의 대로"같은 큰 길을 말합니다.



II.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최상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헌신, 결단, 작정같은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그냥 사랑하셨습니다.


A. 세가지 조건과 헌신의 약속.


지켜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집이 되고

  십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도 장사꾼같은 계산으로 조건과 헌신을 약속합니다.


B. 귀환할 때 성숙해진 신앙.


천사와의 씨름은 '믿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기록을 보면 자신의 혈기로 하나님을 이기려는 사기꾼의 본성입니다. 씨름에 졌다는 것은 야곱의 자기 깨어짐이며, 야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에서와 화해 후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중간에 세겜에서 들르며 그곳에서 오랜기간 거주하게 되고 처음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성숙한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거주 기간이 늘어나면서 신앙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 야곱처럼 세겜에서 주저앉은 사람이 아닐까요?


III. 다시 벧엘로 부르심.


A. 디나의 강간 사건.


딸의 강간사건은 야곱의 큰 괴로움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들들 마저 아버지인 야곱을 따르지 않으며 멋대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여 집안 전체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야곱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없는 형통함은 폭풍우 전의 고요함인 것입니다. 


B. 다시 벧엘로 부르심.


하나님은 세겜에서의 야곱의 죄를 따지시지 않으시고, "에서"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세가지 조건을 그 이상으로 풍족하게 채워주셨지만 야곱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배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베푸시고 건지시도 우리는 늘 변함이 없고 늘 잊어버리기만 합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은 어디입니까?


"단"을 쌓으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서라, 하나님을 향해 살아라, 하나님을 등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위기가 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내어주신 분이 무엇이 아까와서 다른 것을 내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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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지금과 같은 천일염이 아니라 당시의 "암염"은 그 안의 소금 성분이 공기나 습기와 접촉하여 녹아나오고 나면 불순물만 남게되고 그렇게 되면 짠 맛은 없어지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기때문에 버려질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고나면 소금의 역할을 할수 없고 다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버림받는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가치"에 대한 것입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어 흐린 맛, 변질된 맛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소금이라고 부르신 그 "가치"를 잃어버린 다는 뜻입니다.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지만 그것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배반의 인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중생과 회심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어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라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그 맛을 잃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다시 그 맛을 회복시켜 소금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세상을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팔복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들중에 어떤 사람들은 연약하거나 혹은 죄때문에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팔복의 사람에서 멀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자신들을 가치있게 만드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서 팔복의 사람으로 회복되고 소금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것을 유지하기위해 기도하고 애쓰며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치있게 하셨는지도 잊지말고 소금으로 부르신 삶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평생 처음 경험해본 사경회.

 5일간 저녁시간을 드린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오히려 더 깨닫고 받은게 많아서 내가 드렸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시간과 경험과 말씀들.

"인격적인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예배 드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예수님 발앞에 앉아서 말씀듣기를 다른 모든 일들보다 귀하게 여겼던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 알게되고, 말씀은 비록 초등학생일 지라도 깊은 영혼까지 이르러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인식할 만큼의 변화를 충분히 일으키신다는 것까지 깨닫게 하신다.

 

예배에 나아가고 말씀을 대하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나 중심" 이었는지. . .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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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소금이다 라고 현재적인 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고침받고 위로받아서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기 때문에 장차 소금이 되라고 하신게 아니라 '지금' 소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소금이셨고 앞에 말씀하신 팔복의 사람의 삶을 직접 살아 보이시면서 소금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팔복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소금의 삶은 신앙의 오랜 경륜이나 지식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어린이 사경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크게 울며 회개하는 이 아이는 동생을 괴롭힌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괴롭힘 당한 동생을 불쌍히 여기고 앞으로 사랑하겠다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죄를 깨닫고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하며 죄씻음받기 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갈망하고 사이좋게 지내려는 화평의 마음, 온유한 마음까지 모두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금의 삶을 사는 팔복의 성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상태가 주님의 것과는 크기가 다를 수 있지만 동질의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이 맛을 알게되지만 이 맛을 다시 약하게 잃기도하고 다시 그 맛을 찾기도합니다.
또한 세상의 맛에 미각이 무뎌지면 주님의 소금의 맛을 좋게 느끼지못하기도 하고 세상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그 맛이 싫어서 핍박하기도합니다.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서 소금이신 주님께서 맛있게 만드신 세상을 경험하게되었고 맛을 안 그들을 주님께서는 "너희는 소금이라"고 부르신.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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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에 있는 소금,

세상을 위한 소금입니다.

세상이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부조화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여서 "맛"이 없기 때문에 소금 역할의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조화되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은 
선악을 분별하는 선명한 정신,
그 깨달은 선을 행할 용기있는 가슴,
세상에서 살아갈 적당한 욕망(의욕)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녹아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의 맛을 살려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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