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29. 주일.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8.  남은 고난에 참여함은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했을까요? 사도바울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II.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

"완전함"은 '다 자란, 어른이 된, 성숙한'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숙한 자로 내세우기 위함이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는 영화된 사람을 말하지만 이땅에서는 영화가 불가능하기에 '성숙'을 말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영화를 위해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숙'은 '지식의 성숙과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성도를 성숙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난을 채움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세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할까요?

'전파하고, 권하고 지혜로 가르침'은 분사형태로서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A. 그리스도를 선포함('전파하여'의 본 뜻)

누구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있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공중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포가 없이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한 때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과 밖에서 모두 계속 선포되어야 합니다.


B. 모든 사람을 권함(각 사람을 권하고)

'사람 사람마다 권하고'

'권하고'는 '권하다(누스)와 티데미'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은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하게 되기위해서 교회가 하는 중요한 섬김은

'사람들의 정신을 제 자리에 놓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도 한 주간 지내는 동안 은혜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정신'은 제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지킴)


어거스틴.

내 마음이 손,발에 명령하면 말을 듣지만

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말을 안듣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망가졌기(병들었기)때문입니다.


마음이 일단 움직이고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하지 못한다)

정신을 통해서 생각이 마음에 떨어지면 그것이 자라나 번성하면서 

힘을 가지고 활동하게 됩니다.


목양은 이탈하는 성도들의 정신을 수시로 선명한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회자 혼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생이 꼬였다는 것은,

내 뜻대로 일이 안됐다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일이 안된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잊지말라, 기억하라, 생각하라'를 강조합니다.

왜?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여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면 일주일 동안 경건생활, 특히 기도생활을 착념해야합니다.


인간에게 미래의 일을 안보여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교만해서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낙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르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C. 모든 사람을 가르침

성도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사는게 고달파서 배울 시간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배우지 않아서 고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지식과 교훈을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우기 싫어하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III. 적용


고난이 기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한 성도로 채울 수 있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줄로 알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예수사랑을 가진 희생으로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은혜안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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