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이나 가능성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27.


기독교는 짧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쁜 짓 해야 좋아하시고 복 준다는 그런 샤머니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그런 데 있지 않습니다.   52


이방종교의 샤머니즘처럼 하나님께 예쁜 짓을 해서 복을 타 내려는 행위는 참되고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186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사람 하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은혜가 구원입니다. 이런 영광이 우리 속에 있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잘되고 ,병들면 낫고 , 내 자식, 손자 손녀까지 잘되는 것이 복음이고 기독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샤머니즘이고 세상 종교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201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죄송하지만 아직 성도가 아닙니다.  207


기독교의 생명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기독교의 모든 영광이 들어이 있습니다.  214


고난없는 성도의 삶은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301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미쳐야 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드려도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의 공동체입니다.   302


그동안 조국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싶어했습니다. 에수를 믿어서 돈 벌고 병 낫고, 명성이 높아지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347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령하다” 혹은 “신앙이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은사 체험이나 신비 체험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가에 의해 판별되고 드러납니다.  406


사랑하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종이 되지 않으면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410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속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죄를 지은 인생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426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주님 안에서 이미 우리의 삶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430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평가하십니다.  431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게 뭘까?’라고 고민을 하니까? 어떤 성도가 조언합니다. “체험을 하면 돼, 방언이 터지는 체험을 하면 돼.”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486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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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그레고리.K 비일 지음, 김재영, 성기문 옮김.  새물결플러스 )

 

 

우리는 창조주를 반영하든지, 아니면 피조 세계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반영하든지 한다.   24

 

예를 들어 우상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눈과 귀를 가졌다고 묘사될 때,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 역시 눈과 귀를 가졌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그려진다.  32

 

만일 우상을 숭배하면 우리는 그 우상처럼 될 것이고, 우상과 닮은 점이 우리를 무너뜨릴 것이다.    68

 

우리는 멸망당하는 쪽으로든 회복되는 쪽으로든,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닮아간다.  72

 

그들은  하나님의형상을 지닌 자로서 이런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으며,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동산과 같은 그들의 땅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적 임재로부터 떠나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74

 

죄는 자기(자아)를 중심으로 신존을 재정립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자기가 자신의 창조주와 치료자와 유지자가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죄에는 우상숭배가 포함되어 있다.   201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아니라 성전에 거하는 그분의 임재로 복을 받는다고 믿는 것은 우상숭배였다.   276

 

호세아서는 우상과 관계하는 이스라엘을 "창녀"라고 묘사한다.   342"입맞춤"은 사랑의 헌신을 상징하는 제스처이며 하나 됨을 암시한다. 우상숭배자에게 입맞춤하는 것은 사실상 그 우상에게 입맞추는 것이며 그와 일치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349

 

"들을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듣지 않는"    357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어 짐승과 동일시되고, 짐승의 속임수를 분별하고 막을 수 없으며, 짐승과 함께 영벌을 받을 것이다. 짐승과의 동일시는 현세에서는 일시적인 번영을 주지만, 결국 그들은 영원한 죽음이라는 징계를 받는다.   371

 

재미있는 것은, 토기장이 비유가 담긴 모든 텍스트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점은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그들의(그의 혹은 사람들의) 손으로 한 일"이라는 구절이 이스라엘과 열방을 섬겼던 사람이 만든 우상을가리킬 때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399

 

나무나 돌, 쇠로 만든 형상을 섬긴다는 구약성경의 사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11

 

롯의 아내는 세상에 속한 자였다. 롯에게 소돔을 떠나라고 말하면서 천사는 "돌아보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유황불"을 내리실 때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소금으로 변한 것 처럼 말이다. "돌아보았다"는 말은 롯의 아내가 자신의 궁극적 안락을 하나님보다는 소돔에 두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13

 

"땅의 것들에 마음을 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꿈꾼다. 이들은 세상이 주는 안전의 일면만을 신뢰하며,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의 것을볼 수 없다. "그 마침은 멸망"이다.  419

 

너무나 많은 교회가 오늘날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며, 우상숭배적인 자아실현을 위한 소비자들의 욕구라는 필요를 채워주려고 한다.   425

 

거기에는 섹스와 흥분, 음악, 환락, 춤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대단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보답으로 무엇을 주어야 했는가? 말씀이다.    426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당신은 더 나아지고 강해지며,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을 좋아할 것이며, 더 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아를 더 크게 만들 뿐이다. 대신에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예수를 바라볼 수있도록 해주고 싶다.   427

 

우리는 우리가 존귀히 여기는 것을 닮아간다. 그 결과가 멸망이든 회복이든 말이다.  433

 

이런 우상은 교묘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성경의 진리르 반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으로 교회의 삶과 실천에서 그 진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435

 

우리는 무엇에 헌신하는가? 우리는 무엇에 복종하는가? 우리는 세상의 무엇을 닮아가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닮아가는가?   441

 

때때로 우상숭배라는 죄도 잇몸병과 비슷하다. 아주 심각힌 피해를 입기 전까지는 우리가 당한 영적인 피해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눈이 있지만 우리 안에 나타나는 파멸을 볼 수 없는 것이다.   446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모방하며,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적인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세상의 우상에 복종하거나 하나님께 복종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447

 

우리가 스스로 우상숭배자인지 아닌지, 혹은 부분적인 우상숭배자인지 분별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니의 말씀을계속적으로읽고 듣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부분이어디인가?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인가? 우리의 결혼 관계인가? 우리 자녀와의 관계인가? 가족이 모여서 구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가지고 있는가? 주일 예배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며 성실하게 그 모임에 참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면, 이는 우리가 우상숭배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알려주는 잣대가 된다.   448

 

우리는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닮는다. 그것이 멸명으로 이끌든지 회복으로 이끌든지 말이다.    449

 

- 구약에 나타난 유명한 우상숭배인 출애굽 후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시작하여 구약 다른 부분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말씀들과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을 지나 요한계시록에까지 나타난 우상숭배의 모습, 그리고 그 우상숭배자들의 결말에 대해서 차분히, 그러나 시종 강한 어조로 성경을 통하여 논증해낸다. 

풀어내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진지하고 많은 부분에서 두려움과 경각심을 갖게 한다.

읽는 내내 관심이 가는 부분은 '우상이 있는 자리'였는데, 금송아지(또는 다른 모형의 우상들)는 바깥에 있었지만, 이 우상들은 점점 사람에게 가까이오고 결국 사람의 마음과 '사람 자신'이 우상이 되어버리도록 했다. 심지어는 '교회'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우상 자신의 세력을 지키고 있으며 우상을 따르는 자들(비록 교인이라고 할 지라도)을 우상 자신의 결말인 멸망으로 함께 이끌어간다.

대표적인 우상의 특징인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상과 그 숭배자들에게 똑같이 나타나고, 그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로 인해서 함께 멸망하는데, 이미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은 '멸망'의 진행형인 듯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멸망당하는 쪽으로든 회복되는 쪽으로든,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닮아간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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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새물결플러스)

What Shall We Say? Evil, Suffering, and the Crisis of Faith


'신정론'은 '하나님의 옮음을 인정하는 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보았을만한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물결플러스 김요한 목사님 덕분에 읽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들(악, 고난, 신앙의 위기까지)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닥친 어려움(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서는 절망, 또는 삶을 포기하게까지 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서 저자는 오래 수 백년 전부터 있어왔던 대답들과 세월을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답변들, 그리고 당연히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까지 가지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것인지, 늘 옳으신 것인지, 전능하시다는게 사실인지, 혹시 수많은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컨트롤할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신지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얼마전부터 교리학교 강의가 진행 중이라서 '신론'에 대해서도 듣고 배우고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불분명하고 희미하게(한편으로는 어느정도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 인용한 다른 사람들의 신정론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들은 또 다른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그려보게 하였다.



4장과 5장 사이이의 '간주곡(울부짖음, 욥과 폭풍우)'에서,


욥과 친구들 간의 차이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종교적 체계를 사랑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친구들과 달리 욥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신학을 버릴 용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69 


"주님, 왜 저입니까?"에 대해 이 책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대신 욥기는 더욱 심오한 질문, 결국은 더욱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 인간의 고통이 불굥평하다는 판단을내리기 위해 도덕적 질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도식, 즉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 도식을 하나님과 맞바꾸기를 원하는가?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인간으로 기꺼이 나아가겠는가?" 바로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무게에 준하는 결단이다.   175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 주신다면 자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178


신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가 실제 겪는 일들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다른 면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재'또는 '오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상황에 맞는 다른 하나님의 이미지로 '수정'하는 일을 통해서 역시 다른(옳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계속 생겨나게 되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나 하나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쉽게 다가가게 한다.


'이성'으로 이해한 후에 '신앙'을 갖는 것보다, '신앙'으로 걸음을 떼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겨자씨'로 인한 큰 나무와 '한 줌 누룩'으로 인해 부풀은 반죽 덩어리를 보는 길이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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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적 군사입니까(김남준, 솔로몬)


사탄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치가 떨리도록 싫어합니다. 그의 졸개 마귀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죽기까지라도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헌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때가 있어도, 그들은 쉬지 않습니다.   49


엄밀히 말해서,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댜수의 그리스도인들이이러한 영적인 전쟁의 실상이 심각하다는 것에 눈 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마귀와 그의졸개들은 오직 이 영적 전쟁 하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62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세월은 악하고 세상은 우리의 영적 싸움을 응원해 주지 않습니다.   109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안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115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손 안에 붙들어 주시는 때에만 영적인 군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27


방만하고 나태한 삶을 은밀히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이런 허리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을 속박하는 이러한 허리띠는 싸움에나 편리하지, 죄악의 낙을 즐기며 살아가는 방탕한 삶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31


그는 가끔 입술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다시 영적인 군사로 무장시켜 달라고 구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된 기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속사람은 이미 불 같은 정욕의 화살을 맞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술은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를 구하나, 그의 육체는 이미 세상의 일락을 위하여 살기를 기뻐함으로써 자신의 기도가 말뿐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205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206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개인적인 확신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사상이나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지 않는 수많은 사상과 생각들은 개념과 생각의 혼란만을 더할 뿐입니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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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이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

영적 전쟁은 마귀와 싸워서 무언가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무엇을 대부분 '재물'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배웠다.

사업이 잘되는 것도 영적 전쟁이고, 

교회 못나가게 하는 남편, 가족들과도 영적전쟁이라서 절대 지면 안되고

불화하는 것도 불사해야하는 것이었고,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마귀'이고 '귀신'이라고 했다.

오히려, 본문의 앞 부분에서 말하는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 부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 후에 영적 전쟁을 말한 사도 바울은 영적전쟁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으며, 그 전쟁에 이런 군사로서의 무장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적 전쟁을 생각한다면 태도와 마음, 삶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된다.

정신차리고 배워야 할 이유이다.


2014.10월부터 구역공과 교재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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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그 오해와 진실(이민규 지음, 새물결플러스)

한국 교회가 제대로 알아야 할 신약성경의 26가지 키워드

 

 

성경의 진리는 사람들의 삶을 결정하는 참되고 신실하며 변함없고 진실한 성품이다.   21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진실하게)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진실한 성품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22

 

안일한 믿음주의란 쉽게 말해서 복음의 기초적인 진리,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거나 동의만 하면 누구나 단박에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즉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107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근거다.   111

 

요즘에도 일부 목회자들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저주와 축복을 남발하여 헌금을 억지로 빼앗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성장이라는 허울을 내세우지만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일 뿐,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는 없다.    120

 

벌을 받을까 봐 ,손해를 볼까 봐, 혹은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드리는 봉헌은 잘못된 봉헌이다. 봉헌을 드리면서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사실, 봉헌을 할 때 생색을 내거나 분위기를 따르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아닌가?  128

 

그리스도인의 복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풍성함에 있다.  131

 

"나눔의 복을 누리고 있었다면 이런 일로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낸 만큼 돌려받으려고 하니... 많은 헌금이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그 돈으로 크게 짓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도 복 받아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했고...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의 헌금을 부정하자니 그간 해온 신앙이 의미가 없고, 계속하지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없고 목사만 잘사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진 것이지요. 만일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체계였다면 우리는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열심히 하라고 해놓고 나눔의 기쁨은 목사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라 했으니..."  133

 

주님의 날이 아닌 날은 없고 주일만 거룩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날을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을 금한 의도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151

 

"그리스도인은 주일날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날에 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일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양용의 교수)    152

 

기도는 우리의 책임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진심을 담아 간절히 기도할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혹은 재림 때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본문이 요구하는 바다.  202

 

사실 반복해서 하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203

 

어떤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살다가 실패한 후, 이제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통해 또다시 자기 욕심을 이루려 한다. 세상에서 교회로 배경만 바뀌었을 뿐 욕망을 채우려는 간절함이나 태도는 똑같다. 그런 방식이라면 기도는 마술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바로 기도에 대한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이 아니시며, 성경에는 알라딘의 램프같은 요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210

 

기도는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화다.    211

 

기도에 대한 정말 큰 착각은 기도ㅗ로 내 소원을 관철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밤낮없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이방인 추구하는 기도방식에나 어울린다.    213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관철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214

 

구원의 선물 또는 은혜란 공짜가 아니라 일종의 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22

 

우리에게 은혜는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받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다.   231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맡았는가, 즉 얼마큼 재능이 있는가는 상관이 없다. 오직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가 관건이다.    286

 

그럼 누가 염소로 판정되면 영벌에 처하게 되는가? 그들은 특별하게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했다. (마 25)    29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293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끊임없는 훈련이다. 훈련은 연습이고, 연습이란 완성될 때까지 실수하는 행위다. 행위심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삶의 갈등이요, 몸부림이다.   304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뿐이다. 하나님으 뜻이 세상에 얼마만큼 구현될 것인가는 우리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즉 순종은 우리 몫이고 실현은 하나님의 몫이다.  314

 

종말론은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고 그 목적은 반드시 완성된다는 신학이다. 따라서 종말론은 미래에 관한 실마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320

 

성경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들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세부적이고 체계적인 관심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있는 삶, 늘 충성스러운 삶이다.   324

 

지식의 목적과 완성은 사랑이다.   333

 

(330  다섯째 줄   "아라"  -->  "아니라" 오타.)

 

 

 

차례

 

말씀만이 살길이다

 

1부 성경에 대한 오해와 진실    (진리, 베드로, 지옥, 아가페...)

2부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와 진실    (헌금, 주일, 안식일, 술, 성탄절, 여자, 기도...)

3부 교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공짜 은혜, 율법, 믿음, 예정, 구원, 최후심판, 부활, 종말...)

 

말씀으로 돌아가자

 

-- 이민규 교수님과 김요한 목사님(새물결출판사) 덕분에 관심갖고 읽게 된 책.

   시작부터 "진리"에 대한 언급으로 눈이 뜨였고,  읽다보니 제목에서 느껴지는 편안함(나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보다는  실제로 경험했던 잘못된, "오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구체적으로 또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나는 어떠했었고 지금은 여전히 어떤지를 생각해보면 한탄과 두려움이 먼저 나온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살아가기 쉬운 사람들에게 오직 "성경" 한 권을 주시고  이끌어 오신 하나님은 놀라울 뿐이다.

 

   단순하게 '오해'를 지적하고 '진실'을 알려주는 것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 진실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바른 신앙생활'까지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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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성경을 믿는가  (존 맥아더 지음, 유자화 옮김, 도서출판NCD) 2014.9.25.



성령 없이는 성경은 그저 한 권의책일 뿐이다. 우리 가슴에 성령이 살아 숨쉴 때 성경은 유일한 책이 된다.    26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 사람의 마음에만 열려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진정한 지혜에 관해 두 가지를 지적했다 .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와 그것이 어떻게 밝혀지느냐다.   36


영감, 계시, 조명(성령이 참된 지혜를 밝히시면서 구별된 세 가지)  40


자연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를 읽을 수 있지만, 성령의 조명 없이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인간은 '정의의 아들'을 보지 못한다.   42


계시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이나 그분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이고, 영감은 하나님이 그분을 드러내 보이시는 방식이다.   46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 삶의 주인입니까?"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통치권(Lordship)에 복종하는가?"여야한다.   103


우리 의문에 답을 주시기를 간구하면서도 순결하지 못한 생활을 하거나 하나님이 이미 밝혀 놓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답을 주시겠는가?  124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가지치기 해내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경과 고통, 곤란한 문제를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거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치기를 당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경우에서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정 부분을 정화하도록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주신다.   157


그러면 왜 하나님은 다른 그리스도인은 가볍게 쳐내는 정도면서 내게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가지를 치시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다.   157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을 가지치기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다."   159


성공은 열매가 아니다. 성경 그 어디서도 열매가 성공과 동의어르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이 되었건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큰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160

인기는 열매가 아니다.

자극은 열매가 아니다.   161


에베소서 6장에 나타는 '성령의 검'은 '롬파이아(자유자재로 휘두르기 어려운 1m 가량의 육중한 양날 검)'가 아니라 '마카라이(작고 간편한 15cm의 단도부터 50cm정도의 검을 포괄) '이다.  172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그리스도인의 세 유형.

나비     - 이 설교, 저 설교 야단법석만 떨고 다니거나, 

           여기저기서 성경공부를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

식물학자 - 듣고 살피지만 학문적인 것만 얻을 뿐이다.

벌       - 성경의 모든 책, 모든 페이지에 다가가 지혜와 진리를 그리고 

           그들 주변에 축복이 되는 생명을 뽑아낸다.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성경읽기   200

구약은 이야기 읽기 방식으로 건너뛰지 말고 읽어 나가라.

신약은 흐름을 이해하고 진리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위해 30일 동안 매일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라. 2년 반이 지나면 전과 다르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 례


Part 1. 성경이 진리인 5가지 근거


1장 성경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2장 성경이 진리임을 누가 증명하는가?

3장 하나님은 어떻게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으셨는가?

4장 예수님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5장 성경을 우리가 수정할 수 있을까?


Part 2. 


6장 성경은진리와 자유를 가져다 준다.

7장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8장 성경은 영적 성장으로 인도한다.

9장 성경은 가지를 쳐내는 전지가위다.

10장 성경은 시험을 이기는 최고 무기다.


Part 3. 


11장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12장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깨닫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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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기쁨을 맛보라 (존 파이퍼, 좋은씨앗)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내지'말라고 명하십니다. '탐심'의 반대편에는 '만족'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원망을 품은 마음 그 반대편에 자리한 긍정적인 감정은 '마음으로부터'나오는 용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불만을 품지 않기로 결단하라느 게 아닙니다. 성경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보다 강렬한 것을 명령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감정이야말로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바인 것입니다.  48,49


인간의 교만에 담긴 본성과 그 깊이는 '자랑'과 '자기 연민'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다 교만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자랑은 '성공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기 연민은 '고난을 겪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랑은 "나는 많은 성공을 이루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랑은 강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기 연민은 약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랑은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를 희생시켰다고 말합니다.  56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다는 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너무 쉽게'기뻐한다는 게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82


예배의 핵심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라면, 예배는 결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주님 안에서 만족을 찾기 원합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겠죠." 이런 말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모금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일꾼들을 모으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재능있는 음악가들에게 그들의 소명을 이루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예배'를 드립니다. 자녀들에게 의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건강한 결혼 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도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배를 멍들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92,93


여러분의 배우자가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참된 모습을 닮아가는 결혼 생활을 만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100


하나님은 우리가 자동차를 중형에서 더 고급형으로 바꾸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또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굶주림에서 한 걸음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검소하고 단출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시(wartime)를 살아가는 데 정말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11,112


삶은 전쟁입니다. 전시 상황이 분명하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왕의 자녀로서' 화려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투를 위해 의복을 벗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114


부하게 되려 하지 말고 전시를 살아가는 필수품으로 만족하십시오.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십시오. 교만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기쁨이 이 잃어버린 궁핍한 세상으로 부요하게 흘러넘치게 합시다.   115


"사람들은 제가 삶의 대부분을 아프리케에서 보내면서 치른 희생에 대해 얘기합니다.  ... 그러나 이런 관점이나 생각으로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머무는 동안 일반적인 안락함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때때로 맞게 되는 불안, 질병, 고통, 위험 같은 것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영혼을 흔들리게 하고, 심령을 낙담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롬 8:18) 저는 결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1857년 12월 4일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케임브리지 대학 간증설교 중)  121


이슬람의 사도로 유명한 새뮤얼 츠베머 선교사는, 1904년 여름에는 네 살과 일곱 살이던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연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50년이 흘러 이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의 순전한 기쁨이 되살아납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모든 일을 기쁘게 감당하겠습니다."   123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에콰도르 선교사 짐 엘리엇)   125


우리가 고난을 선택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그것을 영원한 기쁨에 이르는 길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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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존 파이퍼 지음, 서경의 옮김,  엔크리스토)


이 책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일곱 가지 이유    10


첫째, 룻기는 성경 가운데 한 권이다.

둘째, 룻기는 사랑 이야기이다.

셋째, 룻기는 아름답고도 고결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넷째, 룻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인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과 화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섯째, 룻기의 가장 두르러진 목적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재앙이나 슬픔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아래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선하시다는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분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질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로 얻게 된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

일곱째, 룻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역사는, 심지어 가장어두운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호소    145.

1.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2.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십시오.

3. 성숙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추구하십시오.

4. 다양한 민족들을 껴안으십시오.

5.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6. 사랑의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7.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고 노래하십시오.


이 삶에서 지옥을 맛봄으로써,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 더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전신마비야말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입니다.   138

(17세에 자동차 사고로 목 아래 전신 거의 완전히 마비되는 일을 당한 조니 이어렉슨 타다 의 인터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 네 장 뿐인 룻기를 한 장씩 나누어 풀어낸 책.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와닿은 곳은 세 번째 장.

       '전략적인 의로움'


세상을 닮지 말라. 보아스를 닮으라, 룻을 본받으라. 심오한 사랑, 의미심장하고도 세심한 소통, 강인한 자기절제, 전략적인 의로움에 대한 헌신의 모습으로 삼으라.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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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김남준  열린교회출판부


시인은 여러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편애로 외톨이처럼 살았습니다. 형들로부터 이해나 관심을 받지 못하였고, 양들을 친구 삼으며 자랐습니다. 어른이 되어 맞이한 아내는 자기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의 아버지, 장인어른은 시기심과 질투에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사위를 시기하여 자객을 풀어서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결국 그는 장인 사울왕을 피해 적국에까지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자 수염에 침을 바르며 미치광이 흉내를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나 그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그 여자를 얻기 위해 그 여자의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그가 치른 대가는 참으로 처절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는 죽었고, 집안에 피바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 강간범은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다른 아들은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빼앗고자 반란을 일켰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 왕위 다툼은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희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였기에 본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처럼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상처투성이의 인생도 없습니다. 이 모든 상처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다윗은 8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들의 압도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83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그러면 예배 중에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예배 속에 공연을 도입하여 우리가 즐겁고 만족함으로써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두 손을 들고 찬양함으로써 여럽ㄴ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주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간단히 표현하자면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하고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95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매가 문제가 있어서 못 만나는 것이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거라. 자매는 앞으로 한 달만 교회에 나오도록 해라, 수요 예배나 금요 예배, 주일 오후예배는 안 나와도 되니 주일 오전 예배 네번만 나와서 드려라. 형제는 자매에게 한 달 동안은 절대로 예수님 똑바로 믿으라고 하든지 교회 가자고 조르지 말아라. 그리고 예배 시간에 잔다고 옆구리 찌르지도 말고 서로 떨어져서 예배드려라. 대신 자매는 일주일 동안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거라. 예배시간에는 다른 생각도 하지 말고 다른데도 보지 말고, 오직 설교자만 똑바로 쳐다보고 집중해서 예배드려라." 제 기억에 그 자매는 둘째 주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죄로 인하여 통곡하였습니다.   102


어린 아이들은 날씨가 좋은 봄철이면 부모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동물원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아이는 주위의 풍경에 이끌리고 신기한 동물을 보고 즐거워하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에게서 멀어져서 주위를 돌아보아도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때 손에 들었던 아이스크림과 풍선은 모두 다 던져 버리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서 엄마를 부릅니다. 좋은 날씨도 신기한 동물도,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더 이상 이 아이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엄마 아빠만을 찾습니다. 이것이 '찾는다'의 의미입니다. 우리도 가난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105


여러분의 가장 큰 문제는 꺾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꺾임이 없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도 바뀔 줄 모르는 편견과 아집, 굳어진 마음의 감정, 하나님이 뭐라고 하셔도 자기 좋을 대로 살겠다는 꿋꿋한 완고함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서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누구를 위해서 예배당에 남아서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깨어짐과 꺾임이 없는 고집스러운 삶을 사고 있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예배당을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자기 꺾임이 없는 마음은 모든 예배를 허위로 만들어 버립니다.   112


-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내가 누구인지, 내 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30편으로 된 고린도전서 13정 설교를 들려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설교 시리즈를 열세 번째 설교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의 방종한 예배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리즈<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한 마음, 태만한 예배 생활, 뜻없이 드리는 예배 태도.... 많이 아파하고 깊이 기도하면서, 한없는 분노와 눈물 속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저자서문 중)


- 지난 봄, 주일 말씀을 전하시다가 성도들의 나쁜 예배태도를 보시고 엄하게 호통하시면서 이 시리즈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셨고, 시리즈를 듣는 내내 큰 충격을 받으며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구역모임 교재로 문답까지 포함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실제 시리지 설교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편집된 내용이지만 읽는 중간중간마다 설교 때의 엄한 호통이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소홀하기 쉬운 일, 바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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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랄 수 없는 날의 믿음(김남준 저. 두란노)


신뢰하던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그러나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은 누구나 실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믿음의 사람이지,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한낱 죄인에 불과합니다.   12


'인간은 대체왜 이렇게 비루하고 졸렬한 것일까?', '나란 존재는 어쩌자고 이렇게 너절하고 후졌을까?', '사람은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고민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진실은 오직 하나님만이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존재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습니다.    13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그 어느 시대보다 해박하지만, 하나님께 안기는 기쁨이 무엇인지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 여정은 어떻습니까? 신앙 지식의 축적만 있을 뿐,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일상의 삶 갈피갈피에서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지식은 있으나 실천은 없고, 말은 번지르르하나 가슴은 빈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6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종교적 의미는 항상 도덕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28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경험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검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커다른 재앙이 찾아와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 듭니다. 그래서 환난이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되고, 커다란 시련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36


약속의 땅을 떠나서 누리는 번영은 약속의 땅에서 받는 고난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을 떠나서 누리는 부요함은 하나님 없는 부요함이지만, 약속의 땅에서 받는 시련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도 하나님이 안계시면 지옥이고 지옥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천국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이 비단길을 걷기보다는하나님과 함께 가시밭길을 걷는 것을 더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38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만 하나님의 사람다운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안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이 그 손을 놓으시면 그는 악하고 불결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39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속에서 끊임없이 깨어지며 조금씩 그분 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1


저는 개인적으로 상처받았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말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사고와 가치체계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43


부요한 사람에게도, 궁핍한 사람에게도 재물은 우리의 마음 둘 곳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드리기에 합당한 대상입니다.   47


사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난미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65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마음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67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간증은 엄청난 고난과 위기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겨 낸 간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흔들지 않으셨는데도 말씀 앞에 마음이 깨뜨려져서 변화된 간증입니다.   68


믿음은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께만 온 마음이 꽂혀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71


그리고 그렇게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롬 8:32)   77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무시하다가 비로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깨닫습니다.(시편 1:1)  80


'신앙을 따라 선택한 일인가? 신앙을 따라 그 일을 하고 있는가?'하는 이 단순한 질문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갈라놓습니다.  92


이런 가장들은 위기가 찾아오면, 쉽게 신앙을 버리고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딸린 가족과 함께 오래도록 고난과 시련속에서 방황합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신앙 위에 견고하게 서 있지 못한 결과인데, 그들은 그것을 알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96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해야 할 가장 큰 은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군대, 풍족한 자원을 쏟아부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115


터널 끝에서 만나는 햇빛은 유난히 더 눈부십니다. 빛은 언제나 그 빛이지만, 긴 시간을 어두움 속에 있다 나온 사람에게는 특별히 더 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17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려고 허락하신 인생의 파도는 당신 자신이 제물이 되어 그 바다에 던져질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요나가 탄 배를 향해 큰 바람을 발사하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도 그 바람을 발사하셨기 때문입니다.(욘 1:4)  118


정말로 괴로운 인생의 밤은 하나님조차 버려두실 때입니다.  128


지금 우리가 행하는 불순종은 당장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것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을 일으켜 우리 삶의 질서들을 흩뜨려 놓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4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위대한 분입니다. 이 믿음을 잃으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삶 대신 인간의 잔재주로 살아가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45


주변의 상황이 변하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불안이 싹트고, 의심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한번 무너진 믿음은 돈이나 상황의 긍정적 변화나 사람들의 위로 따위로 일으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깨워져야 다시 굳게 세워집니다.  148


시험에 드셨습니까? 인생의 벼랑 끝까지 내몰리셨습니까? 당신이 잃어버린 것 중 제일 큰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사랑이나 명예나 건강이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로 애통해야 할 상실은 하나님의 임재 앞서 올리는 기도, 그분의 임재 앞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임재 앞에서 섬기는 섬김, 그분의 임재 앞에서 경험하는 평화입니다.  153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도덕적으로는 물론 모든 면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157


당신이 이런 시험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을 앙망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옳으시고 당신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167


내 것이 아닌 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것이 아닙니다.  185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죄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186


"하나님은 항상 옳고 저는 언제나 틀립니다."  187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의 제사를 기뻐 열납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도 최선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최선의 것은 감추고 최선의 것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저렇게 섬겼는데...'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까?  199


인간의 마음속에서 최종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200


회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던 것을 인정하고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최종적 사랑은 이삭이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적 사랑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뿌리 깊은 자기 사랑과 결별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201


방황의 종결자는 언제나 순종입니다.  205


그런데 인간의 못된 심보는 그것을 먼저 보여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경품 타려고 애쓰는 것이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순종으로 방황을 종결해야 합니다.  208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차고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차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대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입니다.   216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은 충동적인 연애 감정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은 날 이후로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셨습니다.  218


우리는 쉽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믿음은 다른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222



- 목차


서문


책을 열며


1. 어려움. 약속의 땅에도 궁핍은 오는가?

   약속의 땅을 덮친 기근

   궁핍한 날에 드러난 신앙


2. 외로움. 홀로 있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떠나는 조카, 롯

   홀로 남겨진 아프람

   위기 속에서 자라는 믿음


3. 두려움. 인생의 두려운 밤을 지날 때

   인생의 두려운 밤을 만났을 때

   밤중에 임하신 하나님


4. 영적 침체. 별빛도 사라진 영혼의 밤바다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말씀하신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시다


5. 순종과 회복. 눈부신 새 아침은 어떻게 열리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미리 예배하신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눈부신 아침


책을 닫으며



-- 2012년 열린교회 새해말씀사경회 말씀.

'인생의 벼랑끝에 선 그대에게' 세번째 시리즈를 책으로 내신 것.

하나님께서 피조물이고 사람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복을 주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사랑"을 구하셨다.

여전히 언제나 순간마다 나에게 물으시는 것 또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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