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07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6).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욥 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I. 본문해설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신자들의 복된 삶의 절정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존 오웬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사는 성도의 인격. 이 두 가지를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II.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A.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기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어보려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것, 이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은 바꾸시지만 뜻을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 우리의 소원을 사용하십니다.


요 15:7 너희가 내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에 주목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하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 생명이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관심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주님이 하실 일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주님이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네 원하는대로 될 것이다'라고 속이지말고 속지 마십시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나쁜 건강상태에서 

WRTS 개교, 두 권의 책이 중국에 출판, 기념으로 독자들과 만남을 위한 중국 방문.

어렵게 ISBN(국제서적번호)을 받고, 정부 출판국(시중에는 유통가능하나 국가 설립기관에는 못들어가는 것)의 허가까지 받아서 출판됨. 이미 책을 읽고 온 100여명의 독자들과 질문과 토론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심.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믿음을 가장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자기의 뜻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B.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길" 일반적인 길도 의미하지만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시력도, 좋은 길도 필요없게 됩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길은 복수입니다. 즉, "네 인생길들 위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생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수많은 갈래길들을 지나오게 됩니다.


요동치는 삶의 한 복판에서 불변하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빛"은 등불과 함께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이 진리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III.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거기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언제나 겸손하며 언제난 하나님을 갈망하며 동행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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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1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5)  네 기도를 들으실 때


욥기 22:27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최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다면 활발히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II.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을 기뻐할 때


이 기쁨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기쁨의 하나님 이십니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람은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활동이 활발할 때 기도하기 쉽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며, 영혼이 하등한 기능에 활발하면 고등한 기능인 기도가 방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만나던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 기도를 들으실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련, 고통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문이 닫힌 사람입니다.



III. 서원을 갚게 함


침체된 영혼의 기도에는 자기 사랑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의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이 가장 크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원의 이행은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번잡한 일상 생활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유지하십시오.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예수님은 분주한 삶 속에서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자녀들에게 부어주십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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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0.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김남준 목사님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는데에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A.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지음을 받다" 티바네, 바나 동사의 수동형. '세움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번역됩니다. 

마음과 삶, 내면의 세계, 이것들이 무너진 삶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삶은 다른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레쥬.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가 제정신일때 투신하여 죽은 사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상태가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


무너진 삶으로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중심에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플라톤이 꼽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네 가지는,

지혜, 용기, 욕망,정의였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했습니다. 회개나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할것을 분별하는 것,

용기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 있는 것,

정의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욕망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지하며 가치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억제하는 것입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무너진 삶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킴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서 이탈했는지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전하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를 찾고자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A. 전능자에게 돌아감


'전능자'는 히브리말로 '샷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의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쳐부수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을 큰 힘으로 쳐부순다로 봅니다.

둘째는 '충족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

셋째는 가장 가능성이 큰, '모든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본다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한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불의를 멀리함


'아벨라'는 '불의, 사악함, 불결,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이 불의를 버려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며 불의를 멀리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은혜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런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 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에도 뭔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어서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위기를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칡뿌리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벼랑에 떨어졌는데, 운좋게 칡뿌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칡뿌리를 위에서 쥐 두마리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꿀송이가 있어서 꿀이 한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꿀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위기를 잊고 살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왜 설교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느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번 눈물을 흘리면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겠느냐"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울지 않겠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부르짖는 사람 가까이로 하나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 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걸어가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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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2)  하나님과 화목함



욥기 22: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I. 본문해설


행복해지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바램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행복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II.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A. 교훈을 받음


"제발 너는 그분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취하라"라고 번역됩니다.

토라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욥기는 모세 이전에 쓰여졌기때문에,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라는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믿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그것인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그 말씀의 지혜,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붙들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삶의 사태를 바꿔서 행복해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때려서라도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세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사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와 화목하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때 이미 하나님 없는 행복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또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몸부림 쳐 온 우리의 인생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의 복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복의 근원인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훌륭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B. 말씀을 마음에 둠


"그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 이라고 해석됩니다.


말은 소리로 발화된 말(다바르)과, 

     생각 속까지의 말(에메르, 창1:1에서 사용된 말)로 나뉩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사랑을 동반하고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참 신앙은 "하라, 하지말라"에 그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드리려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

"내 말이 너희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대로라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주셔서 그것을 이루게 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그 지식의 섭취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져오게 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랴..."(중국 선교의 힘든 일을 겪으실때..)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

하나님은 마음을 당신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 일을 기쁘게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보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보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아우구스티누스)



"마음에 둠"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은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양을 버렸다고 해서 내 안에 세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담배끊으신 이야기)

말씀을 깨닫기만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심겨져야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여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먼  여행길은 바로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숙고와 적용'이 없기 때문입니다.(존 오웬)

듣고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적용해서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을 17번째 읽고 계신 목사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 읽으시는 목사님)


마음에 말씀이 심기우고, 그것이 열매를 맺고, 그것을 붙잡고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나에게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두어지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빛 앞에서 여러분의 삶의 질서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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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6.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1)  하나님과의 평화를 생각함  김남준 목사님


욥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I. 본문해설


"욥"은 히브리 발음으로 해석하면 "미움을 받는 자"이고,

아랍어 발음으로 해석하면 "회개하는 자"인데, 당시의 배경으로 보아서는 아랍어 발음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추측합니다.


시기는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족장시대 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은 욥의 세 친구 중 엘리바스의 발언인데, 이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욥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발언했기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이 욥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됩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한 사람 실제로 적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지금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도록 영원한 행복이 아니므로 참 행복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A.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기서 '화목'은 히브리어로 '샤캄'으로 유용하다, 쓸모있다, 누구누구와 잘 지내다로 해석되는데, 이것을 적용하고 생략된 말('나'-제발)을 넣어서 다시 해석하자면 "제발, 너 자신을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28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불순종을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의 침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서 더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낯선 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는 낯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1) 회개하고(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슬픈 마음으로)

  2) 순종의 삶을 살고(단순히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3) 하나님 앞에서 사귐,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성찬 등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B. 평안하라


"샬롬"은 '평안한 상태가 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이웃 모두와 평화롭게 사는 것이며, 이웃이 나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지만 일반적인 섭리의 복들은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이것은 삶의 총체적인 회복(누군가 미워하는 사람과 화해), 

속사람이 변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방법으로 복 받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III. 복이 네게 임하리라


"복"은 남성형으로는 '토브'(좋음, 선함)이고, 여성형으로는 '토바'(유익,복락, 이익)을 뜻합니다.


원어 그대로 다시 해석하면,

"그것들로써 즉,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평화로써 복락은 너희에게 들어온다"가 됩니다.


인간은 진정한 좋음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지식과 함께 옵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아는 것, 하나님으로 인해 복 될 수 있다고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오는 것이 복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끊임없는 자기 집착으로 그것의 노예가 됨으로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좋은 것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나빠보이는 것으로도 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오게 하셔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으로 모든 불행의 상황을 이기고 희망으로 돌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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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기쁨을 맛보라 (존 파이퍼, 좋은씨앗)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내지'말라고 명하십니다. '탐심'의 반대편에는 '만족'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원망을 품은 마음 그 반대편에 자리한 긍정적인 감정은 '마음으로부터'나오는 용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불만을 품지 않기로 결단하라느 게 아닙니다. 성경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보다 강렬한 것을 명령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감정이야말로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바인 것입니다.  48,49


인간의 교만에 담긴 본성과 그 깊이는 '자랑'과 '자기 연민'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다 교만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자랑은 '성공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기 연민은 '고난을 겪었다'는 교만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랑은 "나는 많은 성공을 이루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칭찬 받아 마땅해"라고 말합니다. 자랑은 강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기 연민은 약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교만의 음성입니다. 자랑은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를 희생시켰다고 말합니다.  56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다는 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너무 쉽게'기뻐한다는 게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82


예배의 핵심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라면, 예배는 결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주님 안에서 만족을 찾기 원합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겠죠." 이런 말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모금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일꾼들을 모으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재능있는 음악가들에게 그들의 소명을 이루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예배'를 드립니다. 자녀들에게 의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건강한 결혼 생활을 돕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도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배를 멍들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92,93


여러분의 배우자가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참된 모습을 닮아가는 결혼 생활을 만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100


하나님은 우리가 자동차를 중형에서 더 고급형으로 바꾸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또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굶주림에서 한 걸음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사업을 번창시키십니다.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검소하고 단출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시(wartime)를 살아가는 데 정말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11,112


삶은 전쟁입니다. 전시 상황이 분명하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왕의 자녀로서' 화려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투를 위해 의복을 벗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114


부하게 되려 하지 말고 전시를 살아가는 필수품으로 만족하십시오.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십시오. 교만을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기쁨이 이 잃어버린 궁핍한 세상으로 부요하게 흘러넘치게 합시다.   115


"사람들은 제가 삶의 대부분을 아프리케에서 보내면서 치른 희생에 대해 얘기합니다.  ... 그러나 이런 관점이나 생각으로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머무는 동안 일반적인 안락함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때때로 맞게 되는 불안, 질병, 고통, 위험 같은 것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영혼을 흔들리게 하고, 심령을 낙담케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롬 8:18) 저는 결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1857년 12월 4일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케임브리지 대학 간증설교 중)  121


이슬람의 사도로 유명한 새뮤얼 츠베머 선교사는, 1904년 여름에는 네 살과 일곱 살이던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연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50년이 흘러 이 시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의 순전한 기쁨이 되살아납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모든 일을 기쁘게 감당하겠습니다."   123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에콰도르 선교사 짐 엘리엇)   125


우리가 고난을 선택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그것을 영원한 기쁨에 이르는 길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28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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