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2월 09일  팔복의 사람 12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김남준 목사


마 5:7   

 

팔복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성품입니다.

인간의 덕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주체라면, 


1.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


불변하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지금 완전하시다면, 예전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므로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전에 가지신것을 지금은 안가지고 계시다는 것도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특정한 상황이나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만 사랑을 나타내신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신자에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야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때문에 우리가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시기 이전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구원의 은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우리에게 그런 죄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입니다.


요즘의 세상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뭔가 모자라게 보이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비참한 처지에 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도록 그리스도인을 부르셨습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자들의 행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부른 노래(창세기)는 자신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와 해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 라멕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포악과 무자비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받은 것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매일매일 이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누구든지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긍휼을 입으며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나는, 눈물없이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위한 기도가 막힌듯한 느낌일때, 나보다 비참한 사람을 기억하며,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로 시작해보십시오. 그때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긍휼이 필요없을 정도로 비참하지 않은 영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우리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은,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도저히 보실 수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 길에

길 잃은 양 한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여러분들이 주님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살아서 무자비한 이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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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2.주일 팔복의 사람 1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I. 본문해설


세상의 정의 추구 방식은 긍휼을 배제합니다.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어서 이 "긍휼"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의의 실행 방식을 보여주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공의"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긍휼의 사랑"인 것입니다. 


II. 긍휼히 여기는 자


A."긍휼히 여기다"의 의미

1) 하나님께, 긍휼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동기입니다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디도서)"

    긍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근거 입니다. 

2) 인간에게는 이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로서 인간 상호간에 긍휼을 가지고 대하도록 요구하십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와 100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 "...너도 불쌍하게 여기는게 마땅하지 아니하냐..")


B. 사랑의 속성 중의 하나(그렇다고 해서 이 세가지로 사상이 구성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1) 오래 참음 - 원하지 않는 그 질서를 고통 속에서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비 - 남에게 베푸는 친절과 호의입니다.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라며 베푸는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긍휼 - 타인의 현재적 비참을 공감하는 것이며, 그의 그 고통이 속히 제거되길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은 "엄마"입니다. 

고통의 원인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 고통이 그에게서 제거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III.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그의 질병의 원인이나 죄의 근원을 중요하게 보지 않으시고 그의 "비참"을 보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오고 돌로 치기 위해 모인 자들에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살아있는 자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죄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 희미한 긍휼의 그림자를 "엄마"에게 주셨고, 이것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탕자의 아버지 입니다.

슬픔을 동반한 사랑, 눈물을 머금은 사랑, 마음 속에 피눈물이 절절히 흐르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냥 서로 마냥 좋고 즐거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두가지 질문.

1) 최근에 내 잘못으로 겪는 고통과 비참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2) 주변에 그런 고통과 비참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내 고통처럼 여겨서 내 품에 쉬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과 긍휼을 하거나 베풀어 본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늘 이 마음에 새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무한히 빚진 자이며, 이것을 베풀며 사는 것이 빚진 자의 삶입니다.


사람이 외로운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랑을 하지 않아서 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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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9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의 사람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1)


I. 본문해설


주리고 목마른 상황은 복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해지라고 가르칩니다. 더 소유하고더 성취하여 행복해지라고 합니다. 



II.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A."의"란 무엇인가?


의는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를 가진 단어 중 하나입니다. 

마6:1에서는 경건함으로,

행24장에서는 심판의 정의로,

갈 2장에서는 바깥에서 덕을 입어 올바르게 됨으로

마 27장에서는 책망받을 것없는 무죄, 순결의 상태 등으로 표현됩니다. 


1.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상태의 의(성경>모세오경>십계명)

율법은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규울하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율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이런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은총에 덧 입힌 상태의 의(율법에 충족되지 못하는 의 때문에 필요합니다)

시32편의 죄의 사함을 받고 허물에 가리움을 받은 자의 복이라고 표현 됩니다.


3. 대속에 덧 입혀진 상태의 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긴 율법을 인해 받은 죄 값을 십자가에서 치루셨습니다.


위의 세 가지 의에 대해서 갈망을 가지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B.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그 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덧입혀진 상태에 모든 사람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것은 위의 1번에대한 해결이 되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이 새로 태어나서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껍질만 하나님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내용까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의롭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특히 복음전파에 대해서 그 "의"에 대한 갈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에서 어그러진 세상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거나 눈물흘리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거룩해지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바쳐서라도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길 원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만족을 얻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라고 기도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쳐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누룩과 소금과 빛이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이 살아있는냐 그 말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빛보다 어두움이 크고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을 살려두신 것은 이 세상을 티끌만큼이라도 나를 통해서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마음속의 "욕망"으로 입증됩니다. 여려분의 마음에는 어떤 "욕망"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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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3 주일 팔복시리즈 2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가르치신예수님
육신의 배고픔과 병고침으로 끝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인 영혼의 필요를 채우시고 고치시기위해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자원으로는 하늘로부터의 것을 대신하거나 채울 수 없습니다.

2. 입을 열어 
진리이신 예수님은 입을 열때마다 그 진리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진리가 가득 차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진리가 있다면 완전하진 못해도 그렇게 진리가 입을 통해 전달될 수 있어야합니다.

3. 말씀
진리를 전하는 불변의 수단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드라마, 영화 등의 다른 것으로 설교가 대신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입의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진리의 전달 방법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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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9일 주일   마 5:5 


1. 온유한 자의 인격적 특성.


A. 하나님에 대한 온유함

온유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긴 성품적 특성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어떤 뜻이 있음을 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와 섭리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데, 

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낸 하나님의 뜻입니다.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섭리'는 요셉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에 대해서와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계시적 비전이 섭리적으로 이뤄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의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신 온유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체의 온유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맘에 내키면 순종하고, 그렇지 못하면 거부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이 온유함이 결핍되었다는 뜻입니다.



B. 사람에 대한 온유함

빌 4:5 '관용',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관계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히 여자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 범죄하지 말라"하시며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죄에 대한 미움 때문에 사람까지 미워하거나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까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어울리며, 관계를 맺으며 교제하여 옳은데에까지 나아가기를 기뻐하지만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과 맞는 사람과만 어울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죄는 미워하며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일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 매일매일 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이 가득한 이 시대에 온유한 사람은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깨어진 가족관계, 주변의 사람들 관계 가운데, 그들의 아픔은 작게 여기고 여러분의 아픔은 크게 여기며 관계를 단절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시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화목한 관계가 되도록 희생을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가득한 사람은 그 온유함이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나위없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땅을 기업으로 주심


'천성이 너그러운 사람은 부동산을 많이 얻게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아람어 겐, 히브리어 에렛츠)은 땅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땅에 사는 거주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온 세계를 무에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창조하신 땅에서 흙을 취해서 만드셨습니다. 흙과 인간은 운명공동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면 이 땅을 고치리라" 말씀하신 것도 땅과 사람의 연결됨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신 후에,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로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무력으로 정복되는 육적인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갖게되는 영적인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보이는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바로 이 영적인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는 방법도 육적인 방법인 전쟁이 아니라 다른 방법입니다.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밥벌어 먹고 살기위해서 직장다니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과 부당한 경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뜻하시는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 은총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펼치심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행하려는 것이고 그들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나타내고 우리는 그것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평의 땅도 없으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순교하기까지 헌신한 사도들도 역시 영토라는 땅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계셔서 당신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땅에 땅 한 평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펼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인격적 변화가 이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드리는 기꺼운 복종과 순종,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는 것,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온유한 사람들이 하여야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부흥을 만나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고 매일매일 위로부터 베풀어지는 신령한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은혜안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소금으로 빛으로 이 세상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 오직 신령한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에 의지할 뿐..

날마다 순간마다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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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주일 팔복시리즈 7  온유한 자의 복(1)

온유함은 '줏대없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온유는 자기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일들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온유였습니다.
온유는 타고나거나 환경에 의해 되어지는 성품이 아닙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온유하셨지만 때로는 무섭게 책망도 하셨습니다. 
온유는 신령한 성품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의 성품인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성화의 결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은 온유보다 전투, 투쟁, 호전적인 성품을 요구합니다. 
자녀들에게 경쟁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친절하고 여유로운 태도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거룩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죄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의 복음으로 온유하게 된 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온유함, 
칼보다 피와 눈물을 택하신 주님의 온유함을 기억하십시오.

- 나도 이 온유함을 갖도록, 주님의 온유함을 알게 하소서.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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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8 주일    팔복 시리즈 6      애통하는 자(2) 마 5:4

애통함은 모든 일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 관련된 애통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은 소유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인 것인데, 이것은 그의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애통함과 은혜의 작용
팔복은 사람의 행위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속적인 성향과 마음가짐, 이것은 영혼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그것을 누리면서 더불어 그에 부합하지 못한 자신들의 속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때문에 "애통"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죄는 내가 행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능력은 없고 내 안의 천국을 파괴하기만 합니다. 또 세상을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음을 보고 "애통함"을 갖게됩니다. 
한 번 팔복의 사람이 된다고 해서 영원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도 작은 복음 하나에도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가난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오랜 신앙 생활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죄들이 있습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죄들이 가난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애통하는 마음에 이르는 길

A.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함.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편에 서있는 자신의 죄인됨을 직시 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순종하고 반항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어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나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늘 그자리에, 언제나 거기 계시고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떠나가신 적이 없습니다.
이 큰 사랑을 숙고할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됩니다. 처음 회심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형벌이 무서워서 회심한것이 아니라, 나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 무릎꿇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스스로 그 상황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거기 계셔서 기다리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행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주님이 안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에게 고통스런 상황이 있다면 우리때문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나간 자식을 노심초사 기다리는 부모처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돌아오라는 사랑의 회초리가 있을지언정, 우리에 대한 분노의 복수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들도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때,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나라를 숙고함.
창조의 선한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운행되는 세상과 사람을 보십시오.
자기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자기 없이 살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 나라가 이루어길 기도하지만, 반드시 그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주시므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애통하는 기도는 신음하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충천하는 불꽃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오늘 울어야 할 상황 속에서 웃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눈물 흘리고 애통하게 되지만 지금 애통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애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이 세상의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빛 아래에 살도록 애통하면 기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주셨을까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해야 할 때 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애통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넘쳐서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를 받고 천국의 소명을 따라사는 성도들이 되길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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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시리즈 5   애통하는자 (1) 마 5:4

애통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보이는 첫번째 반응입니다. 
"애통"은 고통받고 슬퍼하는 모든것 을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펜둔테스. 펜데오 에서 온 단어. 슬퍼하다, 죄를 확신하여 슬퍼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슬퍼하다)


A. 애통하는 이유 두 가지는,

1.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죄의 상태를 발견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주님의 통치아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그것을 대항하는 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싶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것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애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 마음이 가득하여 눈물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회개의 은혜는 언제나 죄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다윗은 범죄 후, 자신의 하나뿐인 소망인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경건의 죄에대한 회개로부터 나오고, 진실한 회개는 애통하게 만듭니다.
'애통'은 자신을 향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희망'을 갖게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름답게 보시는 두번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때,
두번째는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하게 뉘우치는 때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해서 나의 허물과 죄가 크다는 이유때문에 진실하게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한 사람이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가는 좋은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탁월하게 좋은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언제나 생명에 이르는 문입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분의 생애는 애통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신 기록은 없지만 우신 기록은 세번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고 꿈꾸는 세상과, 현실의 세상사이에서의 갈등이 느껴지셨고 그것이 애통으로 나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의 기록은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길 바라셨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때문에 애통하셨습니다.

'시편119:139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에서도 시인은 같은 이유로 애통합니다.

이 눈물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그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이 눈물이 그치고 위로가 되겠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령한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은혜와 은총만이 아니라, 그 은혜를 따라 살아야할 그 무엇이 따릅니다. "소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무위도식할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이웃을 위해서 어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며 울부짖는 기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삶은 기도의 초점과 일치할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게 되고(그 삶을 살게 되고)
기도는 삶과 초점이 맞을 때에 열렬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불꽃처럼 기도하게됩니다)

"평탄하고 그저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의미가 적은 인생을 살것이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가 사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라도 의미가 큰 삶을 택할 것이냐.."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정을소중하게 생각하라"

무엇에도 도전받지 않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목표도 없고, 불타는 마음도 없는 것은 사실상 영적인 식물인간의 상태입니다.

아직도 애통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나같은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어디에 쓰시려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드셨나요,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B.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 위로.
"호티" 왜냐하면, 반드신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파라 칼레오)는 "옆에서 부르다"라는 의미로 '보혜사'(파라 클레이토스, 옆에 있어서 스승처럼 가르치시고 부모처럼 도와주시고 변호사처럼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성령님)와 같은 어원입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옆에 계셔서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변호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처럼 중보자적인 일 하십니다.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 앞에서 어쩔줄 모를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로의 은총'이 베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언제나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고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질때,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지 않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도우시고 가르치시고 변호하시는 것' 이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강하게 나아가는 데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이 두 가지가 그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인함과 연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이 두가지는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런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의무"를 달콤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되니 겁낼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후)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을 어찌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이 있기때문에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가능성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지켜주시니)

주님의 사랑이 내 맘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기쁜 일 만날 때 주님께 감사하고
슬픈 일 당할 때도 주님을 찬양해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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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4 주일    팔복 시리즈 4      심령이 가난한자 (2)

"행복" 은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인데, 역설적으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할때 오히려 불행질 수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호티), 하늘 나라가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천국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과 힘을 입어 살지 못하는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가 두번 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을 사랑할때, 다른 한번은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리워 할 때 입니다.
인간의 범죄는 그 하나님을 떠날 때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은,
1. 표상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표상은 어떤 사물에 대한 해석인데,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비뚤어진 해석입니다.  표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죄의 지성에 관해서 속임과 의지에 관하여 강압을 받게 되어 그릇됫 희망, 잘못된 절망을 안겨줍니다. 그릇된 희망을 가질 경우에는 위험한 상황에 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희망을 갖게 되고, 잘못된 절망을 갖게 되면 비관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모든 사물을 비추어 올바른 해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진리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육체와 영혼 중 육체를 편애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우그스티누스.
이 진리의 밝은 빛이 나에게 비취어 지도록 허락하여야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이니 하나님의 진리의 밝은 빛으로 짐승같은 나를 비춰주옵소서"
나에게 왜 이런 여건과 환경을 주셨는지 진리의 빛 아래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진리의 참된 빛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이 잘못된 욕망적 표상을 고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구하며 눈물 흘려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깨닫지 못하기기 짐승과 같사옵고 내 마음의 욕망의 출렁거림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사오니 오, 주여 오늘 이시간에도 주의 말씀의 기이한 법을 나에게 깨닫게 하사 이 모든 거짓된 표상에 속지 않도록 나를 일깨우시옵소서"

2. 선행하는 은혜가 작용해야합니다.
   아름답고 추함은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때,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집착하는 삶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알게해주고, 표상이 영원에 비하면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하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임할 때는 '외로운 마음'이 먼저 찾아옵니다.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진 것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난한 마음이 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만 선행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 내가 가진 이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라도 하나님께 소유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안에 있는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나의 비참함과 대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을때 얼마나 큰 행복을 누렸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칠수록 불행해지고 자신의 행복을 아랑곳하지 않을때 행복해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회심은 다시는 하나님 밖에서는 행복을 찾지 않겠노라고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신을 떠난 사람들의 비참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4. 기도로써 그 마음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닥불을 붙이듯이, 작은 불씨로 시작하듯이 작은 은혜와 깨달음을 주셨을때, 그것을 불씨삼아서 간절히 집중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이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물같이 녹고, 자기를 신뢰한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고 죄와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요한일서)"
이때 자기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면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참한 고통속에 있던 딸을 위해 주님앞에 몸부림치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생각하십시오. 그녀의 비참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이 하늘을 누리며 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하늘에 사는 여러분이 되셔서 여러분이 이땅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죄로 비참한 이세상에 희망이 되도록 주님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모든 말씀을 다 새기고 잊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돌아서면 잊고 잊고 다시 듣고 보면 다시 새롭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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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시리즈 3.)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본문의 말씀은 시편 1 편과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팔복의 모습은 오랜 성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팔복 가운데 이 "천국"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는 천국의 일부분의 성격의 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은 "천국" 그 자체입니다. 

"복" 은 구약에서는
1)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 복(베라카)과
2)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만 누릴 수 있는 신령한 복(에쉐르) 즉, 영혼에 직접 끼치는 복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데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가진 종교입니다.

"심령"은 마음의 작용의 근원으로 그 안에 사랑, 미움, 신앙, 불신앙 등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내 심령은 누구의 것인가?"
"내 심령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가난" 은 마음의 파산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1) 자기를 의존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기 중심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자기가 깨어지는 마음입니다.
            2)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자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국" 자체를 주십니다.

"많은 예배를 드려왔지만 이런 가난한 심령으로 드려진 적은 언제였는가?"
"찢어지는 마음으로 내 심령을 주의 것으로 삼아달라고 예배드린 적은 언제였는가?"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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