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7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시리즈 1.)

팔복산에 오르자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4장에서는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시고 5장에서는 사람들이 산에 모이지만, 그 산에서는 기적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의 무엇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보신다"는 것은 원어적으로보면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으로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시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환경이나 소유와 인간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에 있습니다.
팔복은 "지복(복 중의 최고의 복)"입니다.
팔복은 환경과 소유 지위를 말하지않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 앉으셨는데, 이것은 마치 왕이 왕좌에 앉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늘 낮은 자세로 섬기기만 하셨던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이 때에는 왕처럼, 천국의 자녀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앞에 나아온 무리들은 병고침 이상의 것을 바라고, 예수님 앞에 앉았으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왕은 예수님이십니까? 마음에 예수님께서 왕으로 앉으셔서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치 신하들과 백성들이 왕의 말을 듣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이나 번잡한 시장거리, 삶의 수많은 사연이 있는 집이 아니라 조용한  산에서 천국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병고침받고 고침받은 수많은 사람들 중 돌아간 사람도 있었겠지만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을 기대한 사람들은 마음을 구별하여 그 산으로 모여 앉은 것입니다.
흩어진 마음 조각난 파편으로는 주님을 만날수 없습니다.

이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팔복산"에 오르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A.W Tozer)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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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은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인데, 역설적으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할때 오히려 불행질 수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는데 왜냐하면(호티), 하늘 나라가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천국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과 힘을 입어 살지 못하는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가 두번 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을 사랑할때, 다른 한번은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리워 할 때 입니다.
인간의 범죄는 그 하나님을 떠날 때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은,
1. 표상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표상은 어떤 사물에 대한 해석인데,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비뚤어진 해석입니다.  표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죄의 지성에 관해서 속임과 의지에 관하여 강압을 받게 되어 그릇됫 희망, 잘못된 절망을 안겨줍니다. 그릇된 희망을 가질 경우에는 위험한 상황에 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희망을 갖게 되고, 잘못된 절망을 갖게 되면 비관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모든 사물을 비추어 올바른 해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진리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육체와 영혼 중 육체를 편애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우그스티누스.
이 진리의 밝은 빛이 나에게 비취어 지도록 허락하여야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이니 하나님의 진리의 밝은 빛으로 짐승같은 나를 비춰주옵소서"
나에게 왜 이런 여건과 환경을 주셨는지 진리의 빛 아래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진리의 참된 빛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이 잘못된 욕망적 표상을 고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구하며 눈물 흘려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깨닫지 못하기기 짐승과 같사옵고 내 마음의 욕망의 출렁거림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사오니 오, 주여 오늘 이시간에도 주의 말씀의 기이한 법을 나에게 깨닫게 하사 이 모든 거짓된 표상에 속지 않도록 나를 일깨우시옵소서"

2. 선행하는 은혜가 작용해야합니다.
   아름답고 추함은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때,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집착하는 삶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알게해주고, 표상이 영원에 비하면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하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임할 때는 '외로운 마음'이 먼저 찾아옵니다.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진 것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난한 마음이 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만 선행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 내가 가진 이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라도 하나님께 소유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안에 있는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나의 비참함과 대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을때 얼마나 큰 행복을 누렸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칠수록 불행해지고 자신의 행복을 아랑곳하지 않을때 행복해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회심은 다시는 하나님 밖에서는 행복을 찾지 않겠노라고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신을 떠난 사람들의 비참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4. 기도로써 그 마음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닥불을 붙이듯이, 작은 불씨로 시작하듯이 작은 은혜와 깨달음을 주셨을때, 그것을 불씨삼아서 간절히 집중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이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물같이 녹고, 자기를 신뢰한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고 죄와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요한일서)"
이때 자기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면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참한 고통속에 있던 딸을 위해 주님앞에 몸부림치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생각하십시오. 그녀의 비참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이 하늘을 누리며 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하늘에 사는 여러분이 되셔서 여러분이 이땅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죄로 비참한 이세상에 희망이 되도록 주님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모든 말씀을 다 새기고 잊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돌아서면 잊고 잊고 다시 듣고 보면 다시 새롭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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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본문의 말씀은 시편 1 편과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팔복의 모습은 오랜 성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팔복 가운데 이 "천국"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가지는 천국의 일부분의 성격의 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은 "천국" 그 자체입니다. 

"복" 은 구약에서는
1)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 복(베라카)과
2)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만 누릴 수 있는 신령한 복(에쉐르) 즉, 영혼에 직접 끼치는 복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데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가진 종교입니다.

"심령"은 마음의 작용의 근원으로 그 안에 사랑, 미움, 신앙, 불신앙 등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내 심령은 누구의 것인가?"
"내 심령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가난" 은 마음의 파산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1) 자기를 의존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기 중심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자기가 깨어지는 마음입니다.
            2)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자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국" 자체를 주십니다.

"많은 예배를 드려왔지만 이런 가난한 심령으로 드려진 적은 언제였는가?"
"찢어지는 마음으로 내 심령을 주의 것으로 삼아달라고 예배드린 적은 언제였는가?"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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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  주일 김남준 목사 (팔복시리즈 1.)

팔복산에 오르자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4장에서는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시고 5장에서는 사람들이 산에 모이지만, 그 산에서는 기적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의 무엇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보신다"는 것은 원어적으로보면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으로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시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환경이나 소유와 인간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에 있습니다.
팔복은 "지복(복 중의 최고의 복)"입니다.
팔복은 환경과 소유 지위를 말하지않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 앉으셨는데, 이것은 마치 왕이 왕좌에 앉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늘 낮은 자세로 섬기기만 하셨던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이 때에는 왕처럼, 천국의 자녀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앞에 나아온 무리들은 병고침 이상의 것을 바라고, 예수님 앞에 앉았으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왕은 예수님이십니까? 마음에 예수님께서 왕으로 앉으셔서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치 신하들과 백성들이 왕의 말을 듣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이나 번잡한 시장거리, 삶의 수많은 사연이 있는 집이 아니라 조용한  산에서 천국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병고침받고 고침받은 수많은 사람들 중 돌아간 사람도 있었겠지만 병고침과 기적 그 이상을 기대한 사람들은 마음을 구별하여 그 산으로 모여 앉은 것입니다.
흩어진 마음 조각난 파편으로는 주님을 만날수 없습니다.

이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팔복산"에 오르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A.W Tozer)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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