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4. 새벽. 열 처녀의 비유. 오우진 목사님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에 나타난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으로 볼때, 이 "기름"은 "참된 행위"라고 생각해야 맞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중요한 점은 "기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핵심이 다른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은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은 신랑이 늦게 온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지 않았습니다.

처녀들은 신랑을 기뻐하지 않거나 반겨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기다리다 지쳐 모두 졸며 자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혼인 잔치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올바른 지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련한 자'라고 일컬음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어있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뜹니다. 육체의 눈을 뜹니다.

그렇다고 영혼의 눈까지 번쩍 뜨는 것은 아닙니다.

안으로는 영혼의 연약함, 밖으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영혼이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배워서 알고 기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있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방치한다면

이들처럼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깨우지 못한 것은 단순한 질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중의 다섯은 들어가고 다섯은 못들어간 것,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교회안의 반은 들어가고 반은 못들어간다는 것을 여기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입니다.

카지노에는 시계와 창문이 없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모르게 하고

잠든 영혼을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계와 창문이 없는 이 세계에서 말씀을 통해서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 내 영혼을 깨어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내 영혼이 깨어있지 않은 것을 안일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위로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모른 것도 아니고

  신랑을 만나고 싶지 않거나 반가와 하지 않은 것도 아닌 '미련한' 다섯 처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도 기다리다가 함께 졸며 자기도 했지만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깨어있지 못한(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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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총신대 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십자가와 신학함. 김남준 목사님


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신학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신학의 중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무엇인가?'가 아닌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

고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혼란 두가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는 것이었고, 이

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할 자라면 저주받을리가 없을텐데, 예수

님은 부활하셨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저주받은 죽음이 당신의 죄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때문

임을 깨닫고 이 혼란에서 큰 빛을 보고 벗어나게 되었고, 그의 모든 신학적 시

야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이 놀라운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과 세계와 인류에 대한 시양, 지성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에서의 변화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체험에서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목회는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같은 진리가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에서 시작

되는 것이고, 교회의 불행은 이렇게 외칠 것이 없는 사람이 매주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를 시킨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공부에 헌신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가하면, 

7년정도, 건강한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해야합니다.

교회의 재앙은 가르칠 내용이 없는 목사가 매주일 예배당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의 기록은 22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에세이를 쓴 것입니다. 책상에 물과 빵을 놓고 

말입니다.

또 한번은 17시간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여러번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공부하다가 죽으면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비하다가 죽는게 내 분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다가 죽고자 했습니다.


목숨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무지한, 무책임한 설교가 강단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설교단은 힐링캠프같은 것이 아닙니다.

설교단은 일생에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선포하다가 죽는 곳입니다.


공부하지않는 친구들과는 사귀지 말고 배울만한 친구들과 교제하십시오.

한 학기에 자기 키만큼의 책을 읽어내십시오.


공부는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다 할수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지성의 깊이와 관련이 적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실

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려고 하는 진지한 고민과 몸부림이 필요한 것

입니다. 마음을 주님께 쏟으며 주님을 알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훌륭한 청중이었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통성기도 인도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적이 없는 당회자. 

이런 것들은 직업적으로 해야하니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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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3. 고려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김남준 목사님


레 2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

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성막과 관련된 등잔불 규례입니다.

성막은 열두어평쯤 되고,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고, 물돼지 가죽으로 덮

여있어서 일체의 외부의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본문은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문이 없어서 자연채광이 불가능하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오직 등잔의 

불빛으로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교회에서 울려퍼져야 할 것은 오직 계시의 빛인 진리의 말

씀이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어야하고,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는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

다. 슐라이 마허 이전까지만해도 개신교의 전통은 신학은 목회자만 하는 학문

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신학을 공부의 의무가 있었고 목회자는 더 

깊은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마그넬리아데이, 그 책을 화란 사람들은 농부들이 밭갈러 갈

때 수레에 싣고 가서 새참시간에 읽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슐라이 마허 

이후에 신학교육이 전문화되면서 일반학문의 계몽주의 학습방법을 따라서 목회

자만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의 학문,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모였을때 설교를 듣거나 교훈을 받으면서 자기의 상식을 깨

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죽기까지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성막안의 등잔불인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것과 제도권안에서 안수를 받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터득하고 살아내고, 그 살아내는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성은 사상, 의지는 윤리. 이 두가지는 삼위일체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 두가지가 결합되어 힘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려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신

앙의 차원입니다. 최근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부활의 영광, 재림의 

소망으로 가슴이 벅차 본 적이 언제입니까?

둘째는 그 이후에 진리에 대한 골격이 서게 됩니다.


첫째,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하고 어린아이처럼 성경을 읽어야합

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합니다.


20년간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이번주는 무슨 설교를 하지? 라고 한적은 한번

도 없었고, 오히려 이걸 또 설교해야하는데 왜 일주일 후에 모일까? 했습니다.

19년동안 5215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하고 원어 공부를 하십시오. 

원어 공부를 안하는 것은 육군이 되서 바지에 흙묻히지 않겠다는 것이고 해군

이 되서 바지에 물 안묻히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학 공부를 하십시오.

성경만 읽은 학생은 성경은 안읽은 학생과 비슷하게 위험합니다.


신학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기억하고 공부하십시오.


설교는 "불붙은 논리"(로이드 존스 목사님)입니다.

누가 들어도 좋은 소리를 하는게 설교가 아닙니다.


외국에 나가서 숙소에 가면 티비에 조엘 오스틴이 나옵니다. 

리모콘을 끌 수가 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분명히 '개소리'라는 것이 분명한데, 원고없고, 유창하고, 외모 잘생겼고, 목

소리 좋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웃겼다 울렸다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가 그

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그사람과 나는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을 것입

니다. 이것을 분별도 못하고 은혜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금의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 마메섹의 요한, 

존 오웬은 십대때에 신학을 공부하다가 헤친 건강을 평생 십자가처럼 지고 살

다가 죽었습니다.


존 칼빈이 22세에 파리 꼴레쥬 있을때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뽑힌 것은 어마어

마한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라틴과 그릭의 교부들의 문헌을 거의 암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앞두고 스위스 로잔에서 카톨릭과 공개 토

론이 있을때 칼빈은 완벽하게 암기된 상태에서 카톨릭이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가지고 카톨릭의 견해를 반박해서 거기 모인 수십명의 수도사들이 칼빈의 강연

을 들으며 개신교로 넘어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전체가 카톨

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돌아왔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도하기 싫은 것, 하나님 사랑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것입니다.



'감람을 찧어낸 기름'은

성령(기름)이 목회사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진리의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월터 발로우라는 사람은 선교사이자 신학자인 엔드류 머레이를 만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갔을때, 그분은 무릎위에 손을 얹고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가 우리를 위해 형제들이여 기도합시다 할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고, 그 분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27세 때,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러 올라올때 성도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방금 만나고 온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광채가 난다면 정말 그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분이고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일까하며 말입니다.


죠지 길레스피라고 하는 청교도는 어느날 신앙 고백을 작성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스코틀랜드에 모였을때, 길레스피 목사의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기도 서두에 고백하면서 기도를 시작했고 기도가 마치자 어떤 사람이 긴급동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오늘 이 길레스피 목사님의 기도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목사님의 기도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눈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찧어낸" 기름은 프레스로 눌러 짠 기름이 아니라 불순물이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얻은 순수한 기름입니다.

이 기름의 불은 그을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름이 성령의 역사라면 찧어진 열매는 자기깨어짐을 말합니다.

"자기 의", "자기 사랑"에 대한 깨어짐을 말합니다.


테르툴리아니우스는 "나는 회개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지금 교회의 추문들은 목회자가 한 가지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눈물있는 회개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뭔가 모자라는게 아니라 나쁜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에 몇번씩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던 사람이 6일동안 살다가 올라가서 온 마음을 다해서 증언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는 설교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라

성령의 사람이 되라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이 되라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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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 주일 요 6:16:29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이성호 목사님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장은 크게 세 등분으로 나뉩니다.

지난번 오병이어 기적과 떠나신 예수님이 나타난 앞부분과,

본문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

그리고 세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리키는 바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오병이어 표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요한은 이것을 연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떡"이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그 뜻을 이해하고 예수님은 찾은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26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죄인들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죄인들의 구원자"로 보질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배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주실 것을 더 기대하고 있습니까?

기쁨과 감사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엇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하고 계십니까?


다윗의 시편 3,4편.

4편에서는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뇨"라고 말합니다.

"네가 아무리 신앙을 지켰어도 지금 네 형편을 보니 하나님이 선하신 것같지 않구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시편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진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을 간직한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을 보십시오.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가 희생을 치뤘을까요?

아닙니다. 그 보화만 있으면 모든 것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보화를 소유한 사람의 기쁨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나의 가장 소중한 보화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 보화임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떡 때문에 예수님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나는 아무 문제될게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주님께서 우리 눈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난 가운데 처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양처럼 말입니다.


고난의 때에 잊지 말아야 할것 두가지,

첫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든지 고난은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 종교의 힘을 빌어 그 고난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현세상에서의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살전 1:10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난의 대부분은 돈이고, 그 다음은 질병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죄와 심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많은 복을 받는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단과 기독교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단은 복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을 세웁니다.


본문 16절~21절,

6장 전체는 오병이어 기적에 관해 설명하고 있고,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그 중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기적은 누구를 위해 행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열두 제자와 열두 광주리의 남은 음식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려고 했지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섬길 수 없는 한계의 상황에 부딪혔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기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섬김에서 스스로 떡이 되어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50절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큰 풍랑과 파도로 인해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예수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요한은 기록하지 않았지만(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된)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다스릴 권세가 있으신 분이고,

창조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요한은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들에게 오신 것, 주시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떡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떡이 되기위해서 온 것이다.

너희에게 나를 주러 온 것이다.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노동하지말라, 일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일한 것 이상의 댓가를 바라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자기 손으로 땀흘려 일하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하라고 합니다.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하는 일입니다.


마 6:21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땅의 보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사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사는 사람이십니까?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한 번 뿐인 인생, 나그네요, 외국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게 하소서.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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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1:15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4. 3. 2. 1 '

4.   네 번의 "엔 푸뉴마티" - "성령 안에서"
  1:10 일곱교회의 환상
  4:  2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의 환상
17:  3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상
21:  7  천상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영화로움

3. 세 가지 심판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

2. 두 개의 성
     큰 성 바벨론 성과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
 "바벨론 성" -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 "큰 것" 그러나 그 멸망은 "한 시간", 순식간에 멸망한다.
 "예루살렘 성" -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 교회가 추구할 것. 성도가 추구할 것.

1.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
    왕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말씀

- 요한 계시록을 보고 싶게 만드는 한 번의 말씀.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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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1.  오후. 섬김의 본이 된 디모데.  김성구 목사님


빌립보서 2:19~24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빌립보 교회를 지극히 사랑한 바울은 직접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대신 보내고자 합니다.


본문을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읽게 되면,


왜냐하면, 너희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왜냐하면,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그러므로... 이 디모데를 보내기를 바라고..


이렇게 됩니다.


진실로 성도들을 생각한 바울.


20절 - 뜻을같이하여

21절 - 자기 일을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구한..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라.

22절 - 연단받은 디모데


연약하고 심약하고 이단이 많은 곳에서 어렵게 목회한 디모데,

'연단'(도키메)은 "시험을 통과하여 입증한, 증거" 라는 뜻입니다.


시련과 환란으로 단련되어 입증이 된 디모데는,

1)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교회, 목자, 성도.

2) 복음을 위해 '수고'했다.

   - '수고'는 '종이 되어 섬기다'는 '둘로스'의 뜻입니다.

      즉 자기의 것이아닌 주인의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지고 가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 내 기억속에서 잊혀져도 주님의 기억에서는 한번도 잊혀진 적이 없는.. 아웃리치..

주님께서는 아웃 리치에, 디모데와 같은 이런 사람을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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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01일  주일.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이성호 목사님


요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떡, 음식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먹고 즐기고 만족하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음식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을 얻을 때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합니다.


본문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배부르게 하시려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단지 허기를 충족시켜주시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삼으려는 사람들을 떠나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본질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일들에 관해서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등은 예수님의 말씀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표적을 보고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그 놀라운 일이 가리키는 의미를 수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영적인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쁨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이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은 떠나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뭔가 잘 보이면, 지금은 힘들지만 뭔가 하나님 앞에 잘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섬기고 따른다면 그들과 예수님은 함께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보지 못하는 세 가지.

1. 예수님의 능력은 죄인들을 위해 사용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2. 예수님 자신이 그들의 떡 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신 것과, 예수님 자신이 떡 이신 것을 연결시켜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영혼에 만족함을 주시기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시기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것에 사로잡힌 욕망을 정복하러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우리의 필요를 따라 간절히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복음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길 소원합니다.

부, 건강, 명예, 권력보다 더 좋은 것,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좋은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쁨을 누리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영원한 기쁨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떡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떡이 되어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빌립을 시험하신(6절)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과연 제대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어떤 혜택을 받으셨습니까?

건강을 얻으셨습니까?

재산을 얻으셨습니까?

자녀가 잘 되셨습니까?

문제들이 해결되셨습니까?


필요를 따라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영혼의 해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고 계십니까?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계십니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아 아십시오.

그분 한분만이 여러분의 영원한 만족이 되십니다.


____

이렇게 말씀을 듣고, 이런 진리가 있어도,

"그럼, 예수님만 쳐다보고 살고, 밥 굶고 망해도 좋으냐.." 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하게 되면,

당연히 머리를 흔들것이다.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은 '돈'이고 '번영'이라고...

예수님도 그걸 기뻐하신다고,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다고, 결국 돈이라고..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삯꾼 목자의 강단에서 하는 말을 직접 들은 것)


예수님을 잘못 보고 있고, 그래서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 단지 돈과 필요들을 채워줄  "임금"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은 지금도 떠나신다.


나는 예수님은 어떻게 보고 있고 왜 따르고 있는가...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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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오후 마태복음 8:18~22   박현철 목사님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이 나타납니다.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나고 그 후에 "그 무엇"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나고 "그 무엇"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세번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그 무엇"은 바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입니다.


1. 서기관


본문에 나타난 서기관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으면 사람들에게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은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2. 제자 한 사람


제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제자의 복입니다.



국내, 해외 아웃리치를 앞두고,

서기관처럼 "준비"없이 그저 끌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제자처럼 자기를 부인한 없이 제자같지 않게 하지는 않습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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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금요.   십자가로 돌아온 사람.   요 19:34   김남준 목사님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상세하게 확대해서 보여주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십자가에서의 세번째 말씀, 이 말씀은 요한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베드로는 멀찌기 뒤따라가며 보는 기록들이 나오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거기서 세 번 부인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때에는 요한이 홀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길로 갈수만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존재로서 충성스러울때도 있지만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 조차도 이렇게 미끄러질 수 있었다면 우리가 미끄러지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요한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두려워서 도망갔지만,이 때는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누군가 요한을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라고 신고하면 그도 잡혔을지도 모르지만

요한은 그런 두려움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한은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죄인의 괴수라고 인정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당시에 요한은 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했는지, 지금의 여러분들 보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요한이 부활의 소망을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그 십자가 아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도 모르고, 의미도 몰랐지만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에 주님을 홀로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없이, 그리스도의 용서 없이 견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끄러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예고하시면서도 그 일 때문에 상처받으시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요한을 기쁘게 받으셨고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세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금도 서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십자가에는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계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난 때문에 당신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위에서 떨어지는 피를 맞으며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주님보다는 목숨을 더 사랑하여, 혹은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다면 속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시 주님을 버리기 전에 이미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여러분이 돌아올때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십자가앞에 돌아와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성 금요은 Good Friday 인데, 이것이 예수님께 good 이 아니라 우리에게 good 인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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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금요일 김의현목사님. 막 1:1 시작되는 복음.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 정말 십자가의 피가 뚝뚝 흐르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그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 세상사람들이 날마다 부르짖는 성공이나 비전보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이나 희생이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나 예수님따라 살리라", 날마다 예수 닮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태도, 내 인생 전체가 예수님께 달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내 부끄러운 과거를 주님앞에 내어놓고 더러운 피가 흐르는 유출병걸린 성경의 여인처럼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나를 만져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몸에 더러운 피가 흐릅니다,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길 원합니다"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영적 무지와 교만한 것들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자기의를 붙드는 사람들을 오늘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서운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 바깥에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잘못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잖아요,
정말 잘 살려고, 예수님 처럼 살려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고 포기하며 살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셨으니까 나도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데도 어느순간 언뜻언뜻 돌아보면 십자가가 없고 자기 죽음이 없고 자기 부인이 없는 그래서 복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고얼마나 마음 아플때가 많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를 열심히 죽이다보면 죄를 죽이는게 쉽다"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짜증나는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되는지 몰라도 나는 잘 안되요. 너무 어려워요.아내한테 자존심 꺾는게 어렵구요, 자녀를 위해서 시간을 쓰고, 아버지답게 살아가는게 어렵구요,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본이되게 살아가는게 어렵구요, 내안에 문득문득 일어나는 내 욕망을 죽이는게 너무나도 어려울때가 많아요.
그럴때마다 어디로 돌아가야됩니까? 어디서 출발해야 됩니까? 복음으로 돌아가고 십자가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도와 눈물과 희생과 고난가운데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복음과 주님의 십자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 설교 뒷부분만 그대로 받아쓴 것..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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