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8 주일    팔복 시리즈 6      애통하는 자(2) 마 5:4

애통함은 모든 일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 관련된 애통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은 소유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인 것인데, 이것은 그의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애통함과 은혜의 작용
팔복은 사람의 행위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속적인 성향과 마음가짐, 이것은 영혼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그것을 누리면서 더불어 그에 부합하지 못한 자신들의 속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때문에 "애통"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죄는 내가 행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능력은 없고 내 안의 천국을 파괴하기만 합니다. 또 세상을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음을 보고 "애통함"을 갖게됩니다. 
한 번 팔복의 사람이 된다고 해서 영원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도 작은 복음 하나에도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가난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오랜 신앙 생활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죄들이 있습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죄들이 가난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애통하는 마음에 이르는 길

A.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함.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편에 서있는 자신의 죄인됨을 직시 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순종하고 반항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어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나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늘 그자리에, 언제나 거기 계시고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떠나가신 적이 없습니다.
이 큰 사랑을 숙고할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됩니다. 처음 회심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형벌이 무서워서 회심한것이 아니라, 나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 무릎꿇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스스로 그 상황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거기 계셔서 기다리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행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주님이 안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에게 고통스런 상황이 있다면 우리때문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나간 자식을 노심초사 기다리는 부모처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돌아오라는 사랑의 회초리가 있을지언정, 우리에 대한 분노의 복수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들도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때,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나라를 숙고함.
창조의 선한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운행되는 세상과 사람을 보십시오.
자기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자기 없이 살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 나라가 이루어길 기도하지만, 반드시 그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주시므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애통하는 기도는 신음하는 소리라고 할지라도 충천하는 불꽃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오늘 울어야 할 상황 속에서 웃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눈물 흘리고 애통하게 되지만 지금 애통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애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하십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이 세상의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빛 아래에 살도록 애통하면 기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주셨을까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해야 할 때 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애통하는 은혜가 충만하게 넘쳐서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를 받고 천국의 소명을 따라사는 성도들이 되길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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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시리즈 5   애통하는자 (1) 마 5:4

애통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보이는 첫번째 반응입니다. 
"애통"은 고통받고 슬퍼하는 모든것 을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펜둔테스. 펜데오 에서 온 단어. 슬퍼하다, 죄를 확신하여 슬퍼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슬퍼하다)


A. 애통하는 이유 두 가지는,

1.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죄의 상태를 발견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주님의 통치아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그것을 대항하는 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싶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것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애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 마음이 가득하여 눈물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회개의 은혜는 언제나 죄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다윗은 범죄 후, 자신의 하나뿐인 소망인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경건의 죄에대한 회개로부터 나오고, 진실한 회개는 애통하게 만듭니다.
'애통'은 자신을 향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희망'을 갖게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름답게 보시는 두번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때,
두번째는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하게 뉘우치는 때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해서 나의 허물과 죄가 크다는 이유때문에 진실하게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한 사람이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가는 좋은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탁월하게 좋은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언제나 생명에 이르는 문입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분의 생애는 애통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신 기록은 없지만 우신 기록은 세번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고 꿈꾸는 세상과, 현실의 세상사이에서의 갈등이 느껴지셨고 그것이 애통으로 나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의 기록은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길 바라셨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때문에 애통하셨습니다.

'시편119:139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에서도 시인은 같은 이유로 애통합니다.

이 눈물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그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이 눈물이 그치고 위로가 되겠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령한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은혜와 은총만이 아니라, 그 은혜를 따라 살아야할 그 무엇이 따릅니다. "소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무위도식하며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무위도식할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이웃을 위해서 어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며 울부짖는 기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삶은 기도의 초점과 일치할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게 되고(그 삶을 살게 되고)
기도는 삶과 초점이 맞을 때에 열렬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불꽃처럼 기도하게됩니다)

"평탄하고 그저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의미가 적은 인생을 살것이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가 사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라도 의미가 큰 삶을 택할 것이냐.."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정을소중하게 생각하라"

무엇에도 도전받지 않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목표도 없고, 불타는 마음도 없는 것은 사실상 영적인 식물인간의 상태입니다.

아직도 애통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나같은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어디에 쓰시려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드셨나요,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B.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 위로.
"호티" 왜냐하면, 반드신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파라 칼레오)는 "옆에서 부르다"라는 의미로 '보혜사'(파라 클레이토스, 옆에 있어서 스승처럼 가르치시고 부모처럼 도와주시고 변호사처럼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성령님)와 같은 어원입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옆에 계셔서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변호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처럼 중보자적인 일 하십니다.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 앞에서 어쩔줄 모를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로의 은총'이 베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언제나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고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질때,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지 않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도우시고 가르치시고 변호하시는 것' 이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강하게 나아가는 데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이 두 가지가 그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인함과 연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이 두가지는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런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의무"를 달콤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
    예수 나의 힘되니 겁낼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후)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을 어찌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이 있기때문에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가능성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지켜주시니)

주님의 사랑이 내 맘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기쁜 일 만날 때 주님께 감사하고
슬픈 일 당할 때도 주님을 찬양해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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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7)  하나님이 낮추실 때    


욥기 22: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I.본문해설


29,30절은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충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버려야하고 떠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II. 낮추시는 하나님


"understand" 는 낮은 자리에서 서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낮추시는 이유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쉽고, 부패하면 반드시 그 자리,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리를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끊임없이 낮추시는 역사가 없으면 인간은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때로는 마음을 때리기시기까지 하십니다. 

"말씀"에 집중하게 하시려고 상황을 흔드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B. 사람을 통함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모욕, 배신을 당할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III. 하나님이 낮추실 때.


A. 교만함을 고백함


삶의 태도를 고치며 성실하십시오.

일반적인 어려움에는 "자신"이 할 일을 하십시오.

일 자리가 없으면 일을 구하기 위해서 부지런하고 성실하십시오.

특별한 어려움의 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아무 때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게으름과 불성실함을 버리십시오.


낮춰야할 만큼 높아진 마음은 불행한 마음입니다.


B. 겸손한 자를 구원함


겸손은 거룩한 하나님을 의식하고 회복을 위해 낮아짐이지만

비굴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낮아짐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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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7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6).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욥 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I. 본문해설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신자들의 복된 삶의 절정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존 오웬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사는 성도의 인격. 이 두 가지를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II.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A.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기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어보려는 것은 올바른 기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것, 이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은 바꾸시지만 뜻을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 우리의 소원을 사용하십니다.


요 15:7 너희가 내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에 주목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하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 생명이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관심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주님이 하실 일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주님이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네 원하는대로 될 것이다'라고 속이지말고 속지 마십시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나쁜 건강상태에서 

WRTS 개교, 두 권의 책이 중국에 출판, 기념으로 독자들과 만남을 위한 중국 방문.

어렵게 ISBN(국제서적번호)을 받고, 정부 출판국(시중에는 유통가능하나 국가 설립기관에는 못들어가는 것)의 허가까지 받아서 출판됨. 이미 책을 읽고 온 100여명의 독자들과 질문과 토론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심.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믿음을 가장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자기의 뜻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B.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길" 일반적인 길도 의미하지만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시력도, 좋은 길도 필요없게 됩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길은 복수입니다. 즉, "네 인생길들 위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생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수많은 갈래길들을 지나오게 됩니다.


요동치는 삶의 한 복판에서 불변하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빛"은 등불과 함께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이 진리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III.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거기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언제나 겸손하며 언제난 하나님을 갈망하며 동행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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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1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5)  네 기도를 들으실 때


욥기 22:27



I.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최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다면 활발히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II.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을 기뻐할 때


이 기쁨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기쁨의 하나님 이십니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람은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활동이 활발할 때 기도하기 쉽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며, 영혼이 하등한 기능에 활발하면 고등한 기능인 기도가 방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만나던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 기도를 들으실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련, 고통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문이 닫힌 사람입니다.



III. 서원을 갚게 함


침체된 영혼의 기도에는 자기 사랑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의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이 가장 크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원의 이행은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번잡한 일상 생활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유지하십시오.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예수님은 분주한 삶 속에서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자녀들에게 부어주십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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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0.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김남준 목사님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는데에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A.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지음을 받다" 티바네, 바나 동사의 수동형. '세움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번역됩니다. 

마음과 삶, 내면의 세계, 이것들이 무너진 삶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삶은 다른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레쥬.

말년에 치매에 걸렸다가 제정신일때 투신하여 죽은 사람.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상태가 인생은 아닌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


무너진 삶으로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중심에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플라톤이 꼽은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하는 네 가지는,

지혜, 용기, 욕망,정의였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했습니다. 회개나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할것을 분별하는 것,

용기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 있는 것,

정의는 참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욕망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지하며 가치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억제하는 것입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


무너진 삶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가진 물질과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킴


성경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서 이탈했는지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온전하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를 찾고자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 안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A. 전능자에게 돌아감


'전능자'는 히브리말로 '샷다이'인데,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의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쳐부수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을 큰 힘으로 쳐부순다로 봅니다.

둘째는 '충족한 존재,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

셋째는 가장 가능성이 큰, '모든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본다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한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때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B. 불의를 멀리함


'아벨라'는 '불의, 사악함, 불결,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이 불의를 버려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며 불의를 멀리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은혜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런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 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에도 뭔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어서

자기 인생의 근원적인 위기를 방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칡뿌리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


'한 사람이 벼랑에 떨어졌는데, 운좋게 칡뿌리를 붙잡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칡뿌리를 위에서 쥐 두마리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꿀송이가 있어서 꿀이 한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꿀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의 위기를 잊고 살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력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왜 설교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느냐,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번 눈물을 흘리면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겠느냐"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울지 않겠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부르짖는 사람 가까이로 하나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과 하나님을 찾아 돌아가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 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걸어가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죽게 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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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2)  하나님과 화목함



욥기 22: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I. 본문해설


행복해지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바램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행복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II.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A. 교훈을 받음


"제발 너는 그분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취하라"라고 번역됩니다.

토라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욥기는 모세 이전에 쓰여졌기때문에,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라는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믿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그것인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그 말씀의 지혜,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붙들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삶의 사태를 바꿔서 행복해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때려서라도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세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사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와 화목하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때 이미 하나님 없는 행복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또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몸부림 쳐 온 우리의 인생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의 복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복의 근원인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훌륭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B. 말씀을 마음에 둠


"그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 이라고 해석됩니다.


말은 소리로 발화된 말(다바르)과, 

     생각 속까지의 말(에메르, 창1:1에서 사용된 말)로 나뉩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사랑을 동반하고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참 신앙은 "하라, 하지말라"에 그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드리려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

"내 말이 너희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대로라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주셔서 그것을 이루게 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그 지식의 섭취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져오게 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랴..."(중국 선교의 힘든 일을 겪으실때..)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

하나님은 마음을 당신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 일을 기쁘게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보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보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아우구스티누스)



"마음에 둠"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은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양을 버렸다고 해서 내 안에 세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담배끊으신 이야기)

말씀을 깨닫기만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심겨져야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여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먼  여행길은 바로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숙고와 적용'이 없기 때문입니다.(존 오웬)

듣고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적용해서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을 17번째 읽고 계신 목사님,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 읽으시는 목사님)


마음에 말씀이 심기우고, 그것이 열매를 맺고, 그것을 붙잡고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나에게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두어지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빛 앞에서 여러분의 삶의 질서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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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1. 주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9)  죄인을 건지심


욥기 22: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I.본문해설


인간의 불행은 대부분 그의 죄 때문이지만 모든 불행이 꼭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인간의 죄 때문에 불행하다고 확신했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욥처럼 의로운데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생각으로든 그 삶으로든) 삶.


선과 악의 인과응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방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간에, 우리는 이런 불행을 당하게 되고, 누구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 2절, 개정 전..)


처음 예수를 믿은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며 예수를 믿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어떤 원인으로든 간에 당하는 불행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II. 


A. 죄인을 건지신다.(죄없는 자가 아닐지라도 즉, 죄인이라도)


우리의 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각성'입니다.

빛이 환하게 들어올수록 방 안의 먼지들이 더 잘 보입니다.


세상의 사물은 우리의 힘으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원인이 되는 죄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버려야합니다.

비록 지금 고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정금같이 연단하실것을 믿어야합니다.


B. 깨끗한 손이 된다


"두 손"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현실적인 삶을 말합니다.(제유법)

지성으로 죄를 인식하고,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주님의 용서의 확신을 믿으며 정결한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태들을 만나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십니다.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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