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1> 종말과 이단(이필찬 교수님)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한 이단성.


1. 계시론

  환상계시 - 장래 일을 이상으로 보는 것인데, 

             예언하는 사람은 이것의 의미를 모른다.

  실상계시 - 이 환상계시를 실상으로 풀어주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이만희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도 요한은 환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을 썼을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만희라는 것이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언하다"는 의미이다.

  이 대언은,

  창조, 구속, 죄의 지적, 심판, 회복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과 게획의 말씀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미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있는 것이다. --->> 신천지가 왜곡하고 있는 것.


2. 이원론적 세계관

  첫째장막(유재열의 장막성전) - 신천지의 전신이고 기성교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악의 세력을 

                                이것들이라고 해석한다.

  둘째장막(이만희의 증거장막성전) - 신천지 자신들.


  기성교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에베소교회가 꾸중을 듣는 것을 강조하며 버림받은 교회라고 하지만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애정을 가득 담고 계시고 회복을 강조하셨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이 있지만 신천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이다.


3. 영육합일설(영과 육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

   순교하여 죽은 자들의 영과, 견디어 살아남은 자들의 육이 

   합쳐진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144,000의 순교자들의 영, 144,000의 남은자들의 육.


-->> 강의를 듣는 내내, 뭔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지윤이도 똑같은 얘길하면서, "그 교회" 얘길한다.

     그 목사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아직 예언 정확하지 않고 검증되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자기 부부)만 할 수 있다.우리에게 확인받아라"

     "기존 교회들은 종교적 영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앞서가는 교회이고 제대로 된 교회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들은 것도 기억하고 분별하게 된 지윤이...

      도대체 뭘 알고 그렇게 짬뽕하여 지껄인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들 좋은 대로 하려고 한게 그렇게 

      신기하게도 이단의 정상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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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운 교육전도사(실제로 신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자격이 있다고 세운)가 30여명의 성도(청장년 포함)들에게 합계 수십억의 금융사기를 쳐서 피해를 입게 하자, 

"나는 그가 그런 돈장난 하는 줄 전혀 몰랐다.(실제로는 이미 알고있었다) 너희들이 돈 좀 쉽게 빌려써보려는 탐욕때문이니까 소문나면 교회에 곤란하니 너희들이 감당해라" 라고 말한 일.


청년(실제로는 결혼했어도 청년회에 그대로 존속) 여름 수련회를 해외로 나가기도 하고, 국내로 다니기도 했는데 교회 수련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관광과 사진 촬영이 주된 목적이었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이유를 "너희들은 늘 봉사 많이 하고 수고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럴때 즐겨야한다."라고 말하는 목사.


너희들의 부모는 너희에게 해준 것이 없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목사 부부)다.

영적인 아비요, 영적인 스승이다. 우리에게 잘 해라

좋은 것을 먹을 때, 우리를 기억해라.

좋은 것을 우리와 함께 해라. 그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이 사람은 하루에 기도를 몇시간씩 하니까, 이 사람한테 잘 보이면 이사람이 기도할 때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겠느냐?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에게 잘 해라.


예언은 처음에는 잘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꾸 하다보면 실력(?)이 는다.

그리고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고 자신있게 해라.

(성경 어디에도 '틀릴 수 있는 예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십수년간 단 한차례도 재정보고를 하지 않은 교회.


선교헌금, 구제헌금을 작정하고 헌금하라고 하면서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단 한번도 보고하지 않은 교회.(리더 모임때, "교회에서 쓰면 그게 다 선교이구 구제이다"라고 했다.)


"오늘 세 명 방언을 받는다고 음성을 주셨습니다."


예언을 받더라도 받은 사람이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크게 될거라는 예언을 받았더라도, 사업이 잘 될거라는, 문제가 풀어질 거라는 예언을 받았더라도 받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 - 성경 어디에도 이런 말은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잡히고 포박될 것을 예언했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이와 더불어 어떤 청년이 빨간색 통학 버스를 타다가 사고가 난다는 환상을 보고 그 버스를 타지 말라고 연락해줘서 안탔기때문에 그가 살았다고, 환상(예언)때문에 그가 살았다고 하지만 성경에는 예언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 일만 기록되지, 절대 그것을 피할 것을 알려주는 목적은 아니었다)


'선포' 하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사업이 잘 되길, 문제가 해결되길, 꿈이 이뤄지길 선포하라고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선포되어지면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이것은 완전한 사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길 기도하라고 하셨다. 재밌는 기억은 그렇게 선포하고 부르짖은 사람들 조차 그것을 그다지 기대하거나 기억해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그대로의 응답이라고 여기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결국 처음 부르짖을 때 뿐이고 그것이 정말 그렇게 될것이라고는 자기들도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은 '배신자'들의 일이므로 절대 연락하면 안된다.

교회를 떠난 사람은 모두 시험을 이기지 못한 자들이다. 심하게는 마귀에게 넘어간 자들이다.


영들의 이름을 붙이기(에스더의 영, 나아만의 영, 미움의 영, 시기의 영, 등등...)


"계약서 위에 계약서" (번영신학)


임파테이션 - 자기가 다른 사람(유명한 사람, 베니 힌 같은)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킨다는 뜻. 성경에서 성령은 절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이 되거나 할 수 없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기름부음 - 물질 뿐만 아니라 재능에도 기름부음을 주시면 그 일들을 잘 해낼 수 있다. 그런 재능까지도 하나님이 주신다. (언뜻 들으면 맞는 것도 같지만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능력을 그저 무엇인가 일을 할때 필요한 재능을 얻는 것에 집중하여 가르치고 그것을 얻으려고 기도하게 한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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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 of God

영화 2014. 9. 22. 17:56




Are you Son of God?


I am.



베드로를 부르심, 

마태를 부르심,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운명 후 성전의 지진같은 모습,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심...


예수님의 탄생부터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까지 모두 담았다.

그리고 조금은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부분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보다 이런 메시지 부분에서는

이 영화가 더 강하고 깊게 느껴진다.


지난주 이성호 목사님의 설교와 같은 본문, 같은 내용, 같은 주제.

모든 기적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메시지는,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


기적을 본 사람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에 넘기우지만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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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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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 39:5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의 요셉)


요셉은 선지자(성직자)도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빛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을때, 수많은 노예들 중에서 어리고 젊은 나이에,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을 히브리인(애굽인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노예,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는 노예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가장 천한 일에 종사하는 것이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A.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눈여겨 볼만한 무엇인가가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보였을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보디발은 요셉을 여호와라는 어떤 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번 의로운 일로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된 그의 삶을 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같이 살지만 그들이 요셉을 보고 "우리"라고 말하기 어색한, 그 무엇을 가진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느냐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예수믿는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수없는 사람은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B.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은,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삶가운데 한두가지 잘하고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 인격 전체에 가진 것을 말합니다. 남은 잘 돕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일은 열심히 하지만 게으른 사람도 아닙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감옥에서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은 또 한가지, 요셉에게서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통케하다"는 히브리말의 뜻은 막히지 않고 굽지 않고 쭉 뻗어서 눈감고 운전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뜻입니다.

요셉을 산 보디발이 요셉에게서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이 얻은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우리들에 대해서 '우호적'일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세상에 우리가 '유익'을 남겨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믿고 나서 가족들을 더 섬기고 사랑합니까? 더 수고합니까?

직장생활을 더 잘해서 유익을 줍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것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모습이 참모습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거품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유익을 크게 주었고, 보디발은 그런 요셉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가족들에게, 직장에 유익을 주어서 그들이 여러분을 그런 유익한 사람인 것을 알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만일 일은 안하고 기도만하고, 말씀만 보고 그랬다면 능지처첨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일상의 생활을 잘라먹으면서 믿는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삶을 방식때문에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유익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기때문입니다. 

이 일이 한번이 아니라, '사사건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케하시는 것을 보디발이 본 것입니다. 

일개의 '노예' 한 사람때문에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주인공과 신앙의 눈을 보는 주인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절대신상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역사 중심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가 있는 어디에서든지 예수믿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입니다, 나를 기억하셔서 이들에게 구원과 평안을 주시옵소서. 내가 얼마나 섬기고 사랑하고 죽어야하겠습니까.."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을 특별하게 생각했을까요?

요셉의 특별한 믿음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 사는 것이 요셉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요셉은 비젼, 꿈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 꿈은 자신이 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고 그것이 비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알지도 못했을 그 꿈이 내용이었을 것이지만, 바로앞에 가서도 그 꿈을 좇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자신을 총리로 세우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여러분이 어떤 지위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순전함을 잃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죽을때에도 애굽땅에서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기고 조상들의 땅을 기억했던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려는 사람을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요셉은 자신의 믿음의 순전함을 붙들었을까요?

바로 고난 속에서입니다. 총리로 있을 때가 아니라 노예로서 있을때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노예로 팔려와서 기가막힐 상황에 있었지만 낙망하여 눈물짓기보다는 당장 앞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믿음의 순전함을 지킬까를 더 크게 생각한 것이 요셉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형통케 하심'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핑계삼아서 믿음의 순전함을 지킬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이 고난을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창 39:9   하나님의 임재안에 산 사람(보디발의 아내와의 사건에서의 요셉)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을때,

A. 신의, 주인에 대한 신의를 말하였습니다.

교회용 영성, 예배용 영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삶 속에 깊이 녹아드는 영성이어야 합니다.

치열한 살의 현장에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B. 순수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디발의 아내와 단둘의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전보다는 '순결한 신앙이라는 핵심가치'에 더 많이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신앙을 목숨걸고 지켰기 때문에 그 비전도 이루고, 그보다 더 소중한 축복을 받았으니 그의 일생에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 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꿈에 미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미쳐야할 것은 꿈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여기에 미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도 이뤄주시고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창 41:38, 시 105:19   신령한 사람 요셉(바로 앞에서의 요셉)


요셉이 바로의 꿈을 즉시로 말하고 해석하여 준 그 신령함은,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기보다는 이미 요셉이 그런 일을 할만큼 신령한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요셉의 이 신령함은 감옥에서 말씀으로 연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말씀으로 연단 될때 그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평생에 단 한번도 말씀의 연단을 받아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인 것입니다. 

단숨에 벼락맞듯이 새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가장 힘든 때는 말씀이 나를 연단할 때, 고쳐지기 싫어하는 나를 연단할 때이지만 사실은 그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말씀은 결단코 우리를 혹독하게 몰고가서 죽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연단을 통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씀의 연단으로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도 지금은 아무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긴 시간 동안의 하나님의 말씀의 연단으로 우리도 그 신령함으로 인도하실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형제들을 만난 요셉)


창41:45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며,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 두가지를 기억하십시오




5. 용서의 사람





-- 변향근 집사님의 추천으로 듣게 된 시리즈.

비전과 꿈의 사람이라고 주로 듣고 알려진 요셉의 이야기.

분명 비전과 꿈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굴곡 깊은 삶을 관통하는 그가 지키려고 애쓴 "순전한 믿음과 신앙"을 깊이 돌아보게 한 말씀.

요셉의 인생에서 최고의 관심사와 가치는 꿈을 이루고 크게 쓰임받는 것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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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7.  주일 팔복의 사람(22.마지막회)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I. 본문해설


천국에 속한 팔복의 사람들은 세상이 박해하고,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II. 신자의 삶 : 기쁨과 즐거움(명령형)


A. 기쁨과 즐거움


세상이 알 수 없는 원천에 기쁨의 근거를 갖는 것, 그럴 때 세상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급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진 후에는 그만큼 외로워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면 잃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후유증없이  사랑할 분도 하나님 뿐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이 아픔을 주지 않기때문입니다. (어거스틴)


무한하신 하나님이 날마다 그 지식과 사랑을 가르쳐주시고, 그것이 날마다 증진되는 것입니다.



III. 천국에 상급이 있는가?


A. 견해들


공로로 구원을 이루려는 로마 카톨릭에서 온 것으로 실제로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선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생각을 천국에 투사시켜서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곳에서 상급이 있음을 말합니다.

눅 6:23, 빌(부름의 상급을 위해서 달려가노라), 고전 15:41


어쩌면 천국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의 차이 일지도 모릅니다.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알게 되어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으며, 더 적게 받았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그런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목사님의 견해)


B. 상급받은 팔복의 사람들


나를 사랑한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게 하시고, 나에게 하늘의 성품,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셨습니다.


박해 받을 때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데서 온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하늘의 백성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버리고 싶어할때도 주님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거기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여 팔복의 사람으로 살며 그 외에 행복을 찾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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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3  주일 팔복 시리즈 21.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


마태복음 5장 12절



I. 본문해설.


팔복의 사람이 받는 고난은 나쁜 일을 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과 다른 이질적 존재이기에 받는 "존재적인 박해"입니다.



II. 선지자들과 비교하심.


이 말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받을 상급과 그것을 기쁘게 여기며 헌신 할것을 말씀하십니다.


A. 신정국가와 선지자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기 위해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3직)

왕으로 다스리며,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전통편의 제사장으로,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계시편의 선지자로,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B. 고난받는 선지자들


좋은 의미의 선지자들의 특징 세 가지는,

하나님의 소명,

확실한 계시의 말씀이 주어짐,

충만한 성령의 권능이 함께 주어짐입니다.


이사야 5:7에서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으로 비유하시면서 정의와 공평, 의, 사랑을 소작료, 열매로 요구하셨습니다. 


C.이스라엘 : 제사장 나라 됨


출애굽기 19:6은 신학적 기초로, 창세기 1:1절은 역사적 기초로, 이 두 기초위에 요한복음 3:16절이 설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나라는 자기구별과 정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핵심 가치는,

거룩함,

헌신(벧전 2:5), 

중재(롬 15:16) 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커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누룩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지자가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것을 듣고 마음을 찢는 것,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에 돌이키는 것이 선지자에 대한 영광이고 존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싫은 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구약에서 이렇게 죽은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여러분의 입맛을 맛추는 "요리사"가 되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의사"로서 필요하면 여러분의 배를 가르기도하고 머리 뚜껑을 열어서 종양을 꺼내기도 하고 주사를 놓기도 하고 약을 처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지자의 "외침"이엇습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할 뿐아니라,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존재론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III.하나님의 나라와 삼직의 통합


A. 기독론적 통합

그리스도께서 이 3직을 통합하여 지금도 그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B.구원론적으로 제사장은 "소금"으로 부르심, 선지자는 "빛"으로 부르심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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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주일 팔복시리즈 20.고난받는 팔복의 사람(2)


마태복음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라는 것은 신자가 이 세상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닮음의 사람됨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를 많이 닮은 팔복의 사람이 될수록 박해를 받게 됩니다.


"욕하고",

"박해하고",

- 힘으로 팔복의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박해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 사실, 진실, 진리가 아닌 옳지 않은 방식, 사실이 아닌 것들로 구실 삼아서 팔복의 사람을 박해하는 것

입니다.


"모든 악한 말"

- 말뿐아니라 행동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행이 일어나길 바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이런 모든 박해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여 하는 박해인 것입니다.

예수가 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싫었던 것입니다.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영토가 넓어지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며, 모든 물질과 부를 누리며 사는 강대국이 되는 것인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복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전한 팔복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예수님의 가난한 심령을 보고 잘못됨을 깨닫고,

완악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온유하신 예수님을 보고 잘못을 깨닫고,

포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조차 긍휼히 여기는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으며,

방탕한 욕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한 예수님을 보고 정죄를 받음을 깨닫고,

불의한 사람들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를 보며 자신의 잘못을 절실하게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미워하며 시기하며 분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보며 깨닫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민주정치제도가 있었습니다. 

매년 한번씩 사람들이 모여서 조개껍질이나 도자기 조각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인물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내고, 6000표 이상이 나오면 그 사람을 10년간 도시에서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당시 아리스티데스라는 훌륭한 정치가이며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라고 불리웠습니다. 어느날 도편추방의 투표를 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적었고, 글자를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인줄 모르고 그 이름 적는 방법을 묻자, 아리스티데스는 그에게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몰라요, 나는 그사람이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인간이 도처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수없이 얘기하는 그 소리를 듣는게 지긋지긋해서 쫓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함이라.


시시때때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변절하는 사람에게는 박해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런 무가치한 사람을 박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참되고 맛스럽고 달콤한 것이지만, 그것을 느끼고 아는 사람에게만 그런 것입니다.

선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그 선을 아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너절하고 부도덕하게 살다가 세상 법정에서 정죄받고 투옥되는 사람을 박해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한 벌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나쁜일을 했습니까?

제자들이 무슨 나쁜일을 그렇게 많이 했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본을 정확히 따랐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들은 미워하고 지독하게 박해했습니다.

무엇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세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은 불결했고 그들은 거룩했기 때문이며,

세상은 세상을 사랑했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라는 책에서 기술된 것을 보면,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고집하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황소들을 들이받게 해서 배에 구멍을 내었고, 여섯마리의 말들에 사지, 오지를 묶어서 능지처참을 시키기도 하였고, 굶주린 야수들에게 먹이로 내어주기도 하였으며, 뜨거운 불덩어리로 성기를 지지기도 하였고, 불에 녹인 납을 몸에 붓기도 하였고, 아랫도리를 화형시키며 머리에는 찬물을 부어 자신의 신체가 타는 것을 끝까지 보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핍박속에서 죽어간 그들은 이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을 당하며 거룩하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받는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또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이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면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는 복이 있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니면 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빛, 우리가 아니면 맛을 내게 할 수없는 그리스도의 그 소금이 되도록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맘으로 기도하고 이 진리를 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 회개한 세상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와 함께 빛의 사람, 소금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언제나 일어나지는 못할 지라도, 박해가 더 많이 있을 지라도 그때마다 우리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건 복수의 칼을 가는 옹졸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의로운 통치를 이 세상에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연합의 신비가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며 사는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짓밟혀 본 사람만이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아는 인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는 반드시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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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0. 팔복의 사람    고난받는 팔복의 사람(1)


I. 본문해설


10절까지는 팔복에 관한 것이고, 11절부터 12절은 언뜻보기에는 박해받는 사람에 관련된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팔복의 사람의 존재로 인한 박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


A. 세상에서 의를 추구함.


   신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바깥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B.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함.


   팔복의 사람은 행위의 사람, 소유의 사람이 아닙니다. 인격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원형입니다. 예수를 닮은 사람이며,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늘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 통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팔복의 사람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III.  

팔복의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면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그런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교회가 세상의 평판에 전전긍긍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전긍긍해 본적이 있습니까?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예수믿고 우리들이 5년, 10년 수십년을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 하며 살았습니까? 그리고 과연 그 신념 때문에 우리는 박해를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마음 속에 솟구치는 분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짓밟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린하는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한편으로 분노하고, 한편으로는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이 내가 보텐 악때문이라고 통절하게 가슴을 찢어본 일이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넓어도 세상에 소망을 갖질 않으시고 교회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서 말, 여섯 말, 아홉 말의 가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누룩 한 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삶을 덤으로서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실현되기를 위하여 매일 매일 죽을 결심으로 매순간을 살아가라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의 현실 속에 두신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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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 주일 팔복시리즈 18. 박해를 받는 자의 복(2)


마태복음 5장


I. 본문해설


심령이 가난함이 현재 천국을 누리는 것의 시작이라면 박해를 받는 자는 현재 천국뿐아니라 미래 천국을 누릴것에 대한 보장입니다.


"복이 있나니(마까리오스)"는 이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II. 박해를 받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


천국의 두 국면.

1.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다시 회복되고 존귀하게 되기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영적으로,박해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위로와 용기, 사랑과 평화를 베풀어 주십니다. 


2.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

영적인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계속 될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가 천상적이고 미래의 나라인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나라가 매우 가까왔습니다. 이 영원한 나라가 올 때,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역사성과 초월성. 이 두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3.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신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때까지 신자는 "나그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두움은 빛보다 크고 많습니다.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기때문에 신자는 그때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나그네"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현세적인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심성으로 관심가지시고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이 세상의 풍요와 번성은 무한한 하나님 나라의 풍요에 대한 맛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 이것이 있습니다. 

진리때문에 박해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그 진리때문에 누리는 평화와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 서울 변두리의 100여명 모이는, 부교역자 없는 가난한 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어, 주일학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되어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하는데 교사는 모자라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7명의 교사와 간절히 기도하며 성경학교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꼬박 금식하면서 매일 철야를 했습니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배시설은 나무의자가 있는 한칸이 교회 시설의 전부였습니다.

성경학교가 시작되자 기적이 일어났는데, 보통 100여명 모이던 아이들이 첫날 340명의 아이들이 모였고, 도저히 예배당 의자에 앉힐 수 없어서 의자를 모두 들어내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문앞에까지 앉아서 성경학교를 진행했습니다. 신학도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많은 아이들이 회심을 경험했고, 3박4일 일정의 마지막날 밤은 교회에서 철야를 하기로 해서 아이들은 각자 벼개와 이불들을 들고 모였습니다. 밤에 집회를 하던 중, 갑자기 어떤 남자가 뛰어들어와서 동네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고 이게 무슨 짓들이냐며 조용하지 않으면 예배당에 불을 지르겠다며 독한 말들을 내뱉고 갔고 모두 두려움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박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고,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예수믿고 사는 대는 핍박과 어려움이 많단다.. 라고 조용히 얘기했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입으로 손을 막고 흐느끼며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성령께서 뚜렸하게 그 자리에 임재하셨고, 모두 인내하여 핍박을 이기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지혜로 예배당 밑의 열평가량의 지하실이 생각났고, 아이들을 20명, 30명씩 나누어서 들여보내어 기도를 시켰고, 제가 기억하는, 어른과 아이를을 포함한 집회에서 그토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한 일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치하에 있을 때,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가 감옥에 투옥되었고, 20년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후 소감을 묻자, "감옥에 있을 때는 하늘나라였는데,석방이 되고 나니 지상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모진 고문과 핍박을 이겼느냐고 묻자,

"고문이 괴롭고 독방에서 외로울 때마다 지하교회 성도들과 나눈 성찬을 기억하며 그 고난을 이길 수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동유럽의 한 목회자는 그를 회유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의 권모술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들의 회유에 신앙을 져버린다면 박해받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토해놓았던 수많은 설교와 글들이 빛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저항한다면 당신들은 나를 죽이고 나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내 피는 내 설교 속에 스며들 것이고, 내 피는 내가 쓴 수많은 글 한줄 한줄에 베어들어, 모두 일어나서 그 진리가 소리칠 것이고 결국 그 진리가 당신들을 이길 것입니다."


고난, 박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신앙의 단어입니까?

"복음들고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라는 노래는 이미 우리의 예배속에서 폐기된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졌기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핍박을 모를 정도로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버겁도록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 번민, 상처라고 하는 것, 자기만이 아는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팔복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사치스러운 종교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쓸모없는, 가치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본질에 죽고 살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과 괴로움들이 여러분의 온 신앙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날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독수리와 같은 여러분들의 영혼이 이땅에서 다리가 퉁퉁 굵어지도록 모이나 쪼아먹도록 길들여져 날 수 없는 기름진 철새처럼 되어버지 않았는지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대신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들의 그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또 자신들이 박해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전해지고, 또 붙들고 있는 그 복음이 그야말로 그것과 함께 죽고 살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에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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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6. 주일 팔복시리즈 17.  박해 받는 자의 복(1)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I. 본문해설 


팔복의 첫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와 마지막 여덟번째 복인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동일한 복은 -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팔복은 무엇을 하거나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입니다.



II.  박해 받는 팔복의 사람 


- 화평케 하는 것은 팔복의 적극적 측면이요  의를 위해 박해 받는 것은 팔복의 소극적 측면
- 마르투스(증언, 증거하는 증인/순교자)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 20세기 동안, 예수를 증언하다 3천만 명이 순교했습니다.
( 핍박의 불가피성 )
* 나를 따라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져야 하리..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하나님)
* 세상의 정신과기독교의 정신은 달라야 한다
(윤리가 아닌 다른 평판을 얻도록 하심)
* 기독교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던 시대는 없다.(윤리를 강조하던 시대에도 윤리적인 시대는 없었다-기독교인을 죽여도 죄가 아닌 시대)
- 박해를 받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박해로 인해서 당신의 백성임을 입증해주십니다.
* "때리면 맞고 찌르면 찔리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 자체가 증거이며 증인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순교하게 합니다.



III. "의"를 위한 박해

A. "의"란

- 율법에 부합한 상태
-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상태
- 그리스도의 은혜에 덕입은 상태
(중세의 암흑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적 배경)

B. 윤리적인 것이 아님

* 윤리적인 꼬투리를 잡히고 비난 받는 것은 기독교인의 문제이기에 고쳐서 옳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비난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그저 기독교가 싫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기독교인이 윤리적인 삶을 살면 이 세상 사람들이 흡족할까? 그것이 가능할까?)
* 믿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 대로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알키비아데스는,

"난 자네가 싫어, 자네가 없을 때는 괜찮지만 자네가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자꾸 생각이 나거든.."


로이든 존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지 못하게 하시기때문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자신이 꺾여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C. 죄와 허물로 인함이 아님

- 기독인이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지않도록 사는 것은 마땅합니다.

어디까지가 당연한 대우를 받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인 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 귀의 - 세상의 것을 버리고 진리에 입문하는 것
* 잘못된 복음에 익숙해지면 참된 복음이 올 때 참된 것을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단지 윤리적임을 자랑하기 위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다)
* 진리의 빛을 받아야 오류가 무엇인지를 안다
(거룩함이 없으니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선에 있다는 것이다(박해 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 자신의 존재의 무게에 허덕이는 인생들이여 깰지어다~~!


"여러분은 어떤 점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계십니까?"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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