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는 미래를 미리 훔쳐보게 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유익을 앗아가며, 자유를 박탈하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한 마귀의 짓이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1


"하나님이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데요, 지금 앞에 일곱가지 빛이보입니다." 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네가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혹은 "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누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형제님에게 지금 답답한 문제가 있는데요,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 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순간적으로 감동을 받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건강한 몸만 별이 들었습니다.(어떤 교인)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무당 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35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 말씀이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 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 탈선이며 쇠퇴다.   39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삶에 신물이 나야, 죄가 주는 일락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키고 난 후에야, 죄의 쓴 열매로 인해 삶이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곤고해져야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 원한다.   50

거룩한 수줍음은 십자가가 내면화된 증거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옛 자아와 그 욕망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얼굴이 나타나는 진정한 성령 집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가 바르게 전파되며 인간의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다.   58

성령은 성령 운동이 아니라 '예수 운동', 즉 예수님을 알리고 높이는 운동을 하신다.   59

성령 운동의 문제는 기적이나 은사를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십자가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한다는 데 있다.   64

일명 '토론토 블레싱'이라고도 불리는 이 쓰러지는 현상은 미국과 캐나다의 빈야드 운동에서 시작된 것인데 한국 교회가 이것을 성경적인 검증없이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큰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68

교회는 사람들을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이 잘 쓰러지지 않는다고 목을 찌르거나 밀어서 억지로 넘어뜨리는 작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69

그러므로 진정한 성령의 사람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며 불필요하게 자신의 능력이 과시되지 않도록 사려깊이 행하는 '거룩한 수줍음'을 가진 사람이다.  72

그러므로 성령을 사역의 성공이나 자기실현을 위한 동력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반기독교적 일 뿐아니라 이단적인 행위다. 일부 성령운동이나 성령의 사역자들에게서 성령의 인격성을 손상시킴으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이단자의 얼굴이 자주 나타난다.   74  (- 임파테이션의 오류, 성령은 사람이 맘대로 부릴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독특한 역할은 우리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의 원천이며 조력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심령에 기도의 갈망과 부르짖음을 불러일으키심으로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며 인내하도록 도우시는 분이다.   78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도들이 세운 터 위에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지, 그들처럼 터를 다시 닦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계시로 받은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 그들처럼 계시를 받을 수는 없다.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어떤 이들을 사도라고 칭하며 그들과 같은 사역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111

과거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박재봉 목사는 자신의기도로 4만 명가량의 병자들을 치유했다고 한다. 그는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의 명단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가 후에 자신이 집회를 인도했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기도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 열 명중 일곱,여덟 명은 신앙 생황을 하지 않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사실을 안 그는 하나님게 신유의 은사를 거둬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병고침을 받으러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는 더 이상 신유의 은사가 없다고 하며 기도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126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저 사람이 눈을 뜬 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눈을 뜬 것입니다." 130  (손양원 목사님, 부산 초량교회 집회중에 나면서 눈 먼 사람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 사람은 뛰며 소리지르고 기뻐하였고 예배가 중단 되고 교인들이 웅성거리자..)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방언의 특성상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말이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하나님게 기도하는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154

어떤 이들은 자신만 외톨이로 남고 싶지 않은 절박한 심정에서 방언 전도사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굴려 "랄랄랄라"를연발하며 인위적으로라도 방언과 같은 현상을 반들어 내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170 (-놀랍다. 이렇게 정확하게 아시다니..)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추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79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184

나는 방언을 30년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것인지 잘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85 (어떤 목사의 고백)

바울은 성적으로 문란하며 서로 시기하고 다투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성령 또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라고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형편없이 사는 그들 안에도 성령이 계시며 그들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거듭 일깨워 주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6:19)"

성령이 우리에게 다시 임하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돌아가야 한다.    214

언제까지 이 성령의 오래참으심과 온유하심과 인자하심을 멸시할 것인가?   217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신다.   226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이 땅에서의 성공에 대한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열렬히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은 종말의 영이시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향한 야망을 날카롭게 대적하는 영이시기 때문에 그 야망 성취를 위해 동원될 수 없는 분이시다.   239

문제는 우리에게 생수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이다.     240

이같이 성령 충만 자체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누리게 될 혜택과 유익에 더 목마를 수 있다.241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는 그 한가지 이유가 바로 주님의 기쁨이되는 것인가? 과연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거룩하게사는 것인가? 내 평생의 소원이 주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것인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주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이가 되는 것인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가? 이런 거룩한 목마름이 있어야 진정으로 성령 충만을 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목마름은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산물이다.   243

매일 목마르고 배고픈 것이 육적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듯이 매일 성령의 생수에 목마른 것은 영적인 생명의 자연적인 표출이다.   243

성령충만은 자신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하지않으면 비참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사실을 뼈아프게 경험하고 이 은혜 없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하나님게 매달리는 사람과 교회를 위한 은혜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경건하게 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 귀한 깨우침을 얻고 거기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은혜다. 실패의 심연에서도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의 줄을 놓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선물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으신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어기실 수 없다는 확신을가지고 이 약속에 호소하며 자신과 교회를 회복시켜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한 은총이다.   247 (-아멘)

이같이 성령이 충만한 은혜가 인간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 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한층 더 고조되며, 우리가 최선의 모습이 아니라 최악의 모습일 때 찾아옴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밝히 드러난다. 주여, 다시  한번 이 일을 행하소서!   248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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