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언에 대한 논쟁과 토론에는 관심 없다. 만일 당신 삶의 모든 것들이 족하다면, 하나님 안에서그저 행복하고 만족하다면, 그대로 살기 바라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 배고프다면, 목마르다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과 성령의 능력을 더욱더 충만하게 받으라고 촉구하는 바이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에 규칙적으로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은사도 받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을 하는 것이 다른 은사들로 향하는 출입문인 것 같다."(마헤쉬 차브다의 '방언 체험' 중에서)

  이 사람(마헤쉬 차브다)은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보다 훨씬 중요한것은 내가 지금 확실히 느끼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27

 

오순절을 기점으로 사도들을 통해 이 각각의 독특한 집단에게 부어주신 사도행전 방언의 역사는 오늘날 '달라고 떼쓰고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그런 방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88

 

고린도 시의 중앙 높은 곳에 위치한 "아프로디테(비너스)"신전에서의 이방 숭배의식과 거기에 나타난 '방언'(지금 우리가 알고 말하는 그 방언과 흡사한, 게다가 통역까지도 하는)  96,97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는 '글로사(glossa)'인데, 이 단어는 신약에서 50번 사용되었는데, 16번은 신체기관의 "혀", 단 한번은 2장 3절의 "불의 혀같이 갈라진 혀들", 33번은 '언어'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단 한번도 방언이 단지 하나님만이 이해하시는 하늘의 언어를 뜻한 적이 없다. 그 단어는 결코 신비한 것이나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 적이 없다.   110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선교사의 아들이 있다. 그가 한번은 방언으로 집회는 교회에 참석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방언 통역을 받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라고    186

 

오늘날 방언을 보고 그 속에서 방언을 인정하는 카슨 교수와 같은 사람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카슨의 그 고민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성경을 정직하게 본다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 자체가 없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왜 그들은 고민이 없습니까? 방언이 언어임을 확신해서그런가요? 아니지요. 아예 말씀이 무어라고 가르치는 데는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18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학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 14:37)     197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방언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우리의 순종입니다. 말씀이 아닌 체험이 나의 판단을 결정하는 시금석이 될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이성적인 대화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201

 

바울은 교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은사의 본질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그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203

 

오늘날의 방언은 결코 하늘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 방언이 아버지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직통도로는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방언은 성경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전부를 원하십니다.     205

 

"우선 은사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 나름의 신조와 신앙고백이라고 내세울 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부터 지적해야겠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사도들의 체험이나 전통적인 '기적 신앙'외에는 제시할 것이 없는 원시인에 가깝다.... 그들은 신학적인 사색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그런 것들이 이 운동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경 해석은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다. 게다가 이 운동 안에서 조차 은사 체험에 대해 신학적인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거나, 그런 일에 괘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232

 

방언이라는 체험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는 성경에서 멀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전인격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234

 

기독교의 진리는 신비한 체험을 찾아 이곳 저곳 헤매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35

 

사도들은 이렇게 애걸하지도 않았고 실패에 대해 변명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 받았다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변명이 필요합니다.  237

 

인간은 신비주의적 체험에 한없이 약합니다. 뭔가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 무엇에 그냥 무너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우리가 만질 수있고 볼 수있는 그런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신비하지 않은'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예수님을 기록한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종교입니다. 보고 만질 수있는 예수를 기록한 성경을 성령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말씀을 통해 모든 인류가 그토록 고민하고 애태우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240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꾸 새로운 계시를 갈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어진 계시를 바로 개닫는 것입니다. 사놓은 책은 안보면서 자꾸 새 책만 사서 모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242

 

성령은 완성된 계시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듣는 '성령님, 어서 오세요. 성령님, 가지 마세요.'등의 구호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항상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단 한순간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243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기 위한 말씀입니다. 약함 속에서 도리어 더 빛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245

 

 

 

- 거룩함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치시고 이끄신다.

 

1부 사도행전의 방언에서는 오순절사건, 사마리아인의 회심사건, 고넬료의 회심사건, 에베소 세례요한 제자들의 회심사건 속에 나타난 방언들을 통해서 사도행전의 방언이 예언성취를 통한 구속사의 완성을 증명했다. 

2부 고린도전서의 방언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은사 사용 문제들, 특히 방언에 대한 문제를 통해서 방언의 본질과 역할을 분명하게 증명하였는데, 방언을 포함한 은사의 목적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함인 것을 설명했다.

3부에서는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와 그 위험들을 설명하였다.

 

방언 지지자의 입장의 대표로 특히 '마헤쉬 차브다'의 책과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 이름은 분명히 기억이 나고, 또 몇가지이지만 그가 했던 말들을 나도 예전의 교회에서 들었지만, 정말 '그것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을 단순히 좋게 받아들이며 믿었다기 보다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이 정도의 요약과 정리로 책에서 받은 느낌을 모두 보존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읽는 내내 나의 "무지함"과 진리에 대한 "무관심함"에 답답함, 한숨, 한심함... 등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그와 함께 분명하게 성령님은 여전히 말씀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기적적인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놀라운 일은 교회를 옮긴 이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나와 아내는 방언기도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중 가장 큰 사역은 어떤 기적이나 은사가 아닌 "깨닫게 하심"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없고, 그 깨닫게 하심은 어떤 기적보다 더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Posted by 지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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